아쉬운 안희정의 분노(憤怒) 해석

아쉬운 안희정의 분노(憤怒) 해석

조송현 승인 2017.02.23 00:00 의견 0

'선의' 논란에서 '분노' 논쟁을 촉발한 안희정 충남지사(왼쪽)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당신은 분노합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음을 금방 느낄 것이다. 분노(憤怒)라는 개념이 모든 사람에게 꼭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분노는 성남이나 화 정도로, 또 어떤 이에게는 복수심을 자아내는 증오(憎惡)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사회적 공분(公憤)이나 의분(義憤)으로 각인돼 있을 것이다. 이러니 질문을 받은 사람은 질문자가 말하는 분노가 어떤 것인지 해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저널리스트인 필자에게 분노를 명확하게 각인시켜 준 것은 2011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Indignez-vous)’(돌베개)이다. 그 분노는 공분이나 의분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나이가 들수록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분노를 삭이고 만연한 불의에 눈 감는 세태에 94세 노인의 ‘분노하라’는 쩌렁쩌렁한 외침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채찍이었다.

반나치 레지스탕스였고,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업에 참여한 외교관이었던 에셀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는 촉구는 강렬했다. 에셀은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고 밝혔다. 인권을 유린하는 나치의 전체주의에 분노해 저항운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맥이 같다.

에셀은 나치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분노할 데는 많다면서 젊은이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치계 경제계 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분노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면서 “어느 누구라도 이 보편적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고 강조했다.

에셀에 따르면,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니 사회와 주변에 무관심한 사람은 참여 의지가 없는 사람이며 따라서 분노할 이유가 없다. 에셀은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며 분노할 줄 모르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렇지만 나치 같은 거악이 사라진 오늘날 도대체 어디에 분노한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에셀은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외친다. 방관자적 태도로는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고 충고했다.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형제자매들의 희생과 파시즘의 야만에 맞선 여러 나라의 단결 덕분에 나치즘은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 살아 있다. 그래서 여전히 ‘분노하라’는 호소는 유효한 것이라고 에셀은 강조했다.

에셀은 분노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영역 두 곳을 지적한다. 첫째,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의 격차,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양극화이다. 이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참여는 촉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권이다. ‘내 나라 안에서는 내가 주인이니 마음대로 대량학살을 자행해도 된다’고 생각한 히틀러 식의 인권유린이 현재에도 자행되고 있다고 에셀은 지적한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를테면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하는지 등이 보일 겁니다.”

에셀은 그러나 ‘도에 넘치는 분노(激憤)’를 경계했다. 그는 격분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격분은 이해할 수는 있으나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격분 탓에 희망을 놓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표지.

에셀은 여기서 나아가 비폭력을 강조한다. 미래는 비폭력의 시대이자 다양한 문화가 서로 화해하는 시대라고 확신한다. 사르트르가 “폭력은 실패다. 하지만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다”고 한데 대해 에셀은 이렇게 반박한다.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 더 확실한 수단이다.”

에셀(2013년 96세로 사망)의 분노론은 흥미롭다. 94세의 고령임에도 정정하게 열정적인 삶을 사는 비결을 묻자 그는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에셀은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라면서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최근 안희정 충남지사의 이른바 ‘박근혜 대통령 선의 발언’과 관련해 “안 지사의 말에 분노가 빠져 있다”며 “분노는 정의의 출발이며,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문 전 대표의 분노는 에셀의 ‘분노’와 정확히 일치한다. 필자도 단박에 그렇게 해석했다.

그런데 안희정 지사는 문 전 대표의 분노에 대해 “지도자의 분노는 피바람을 부른다”고 응수했다. 안 지사는 문 전 대표의 분노를 공분이나 의분으로 보지 않고 복수심을 자아내는 증오 정도로 해석한 것 같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분노라 하면 사적인 분노가 아니라 공적인 분노, 즉 공분이나 의분으로 해석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그리고 분노하면서 참여하고 정의를 세우는 수단은 피바람이 아니라 언제나 '비폭력적인 희망'임을 전제하는 것이 기본 아닌가?

안희정 지사의 '분노' 해석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안 지사가 결국 사과하면서 ‘선의’ 발언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문 전 대표의 분노에 대한 안 지사의 해석은 심각한 여진을 남겼다. 안 지사의 해석은 국정농단 및 방조 세력과 정권교체 반대 세력들에게 두고두고 악용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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