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관견(管見) ⓶국가의 시혜 아닌 인간으로서의 권리

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관견(管見) ⓶국가의 시혜 아닌 인간으로서의 권리

조송원 승인 2017.03.09 00:00 | 최종 수정 2017.06.05 00:00 의견 0

옥스팜 인터내셔널은 가난이 없는 공정한 세상을 지향하는 NGO이다. 사진은 가난 극복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행되고 있는 옥스팜 트레일 워커 장면/옥스팜 코리아 홈페이지 캡쳐.

기본소득이란, 모든 개인에게 생활에 충분할 만큼의 소득을 권리로서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제도이다(야마모리 토오루, <문예춘추> 2017년의 논점 100. p.164). 기초생활수급자 생계비, 실업수당 등 기존 사회보장제도와는 달리 ‘무조건적’이다. 재산이 얼마인지, 소득이 얼마인지, 과거에 취업한 경험이 있는지 등을 따지지 않고 사회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어떤 조건도 없이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

최저생계비 등은 가구(가족)를 기준으로 지급되지만, 기본소득은 개인에게 준다. 기본소득은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위한 돈’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받아 개인이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현금 지급을 원칙으로 한다. 평생 동안, 충분한 금액을, 규칙적으로 지급해야 한다(<한겨레21> 1129호, p.43).

기본소득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을 전복하려 한다. 일하지 않는 노인, 아동,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에 꼭 필요한 활동을 하는데도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정주부 문화예술인 자원봉사자 등도 충분히 먹고살 만큼의 소득을 사회가 보장해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기존 사회복지제도는 실업자를 고용(노동)시장으로 유인하려 하거나 ‘일하는 사람의 복지’(workfare) 성격이 강하다. 반면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억지로 하는 일 대신에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선택할 조건을 만들어주고자 한다(<한겨레21> 1129호, p.44).

기본소득의 개념이 대충 이렇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그 금액은 얼마여야 할까? 필자의 어림짐작으로는 월 100만 원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예산이 400조 원인데 갓난아기든 노인이든 실업자든 대기업 사장이든 노숙자든 공무원이든지 간에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게 되면 물경 600조 원이 필요하게 된다.

이게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말’이 아니다. 소리에 의미가 얹혀야 비로소 말이 된다.)냐며 비웃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정도이다. 그래도 터널 속에서 앞산만 보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여튼 구체적인 논거는 다음 글로 미루고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먼저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다.

흔히들 사회복지제도의 완결판이 기본소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절대 아니다. 사회보장제도와 기본소득은 전혀 별개의 발상이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이 점진적으로 개선된다는 이데올로기가 맞다면 하마 지금쯤은 우리가 에덴동산 같은 낙원에 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새벽종이 울리’고 ‘새아침이 밝아’ 몇 십 년을 뛰어 왔으니.

기본소득이 ‘인간에 대한 예의’인 반면, 사회보장제도는 ‘경제적 동물’에 대한 대우이다. 전자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면, 후자는 인간을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 치부할 뿐이다.

사회보장제도는 빈곤과 결부하여 발전하여 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당시 유력자들에게는 빈민 구제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영혼 구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때문에 수도원과 구빈원은 수용 인원을 정해놓고, 구빈 대상자 선정은 당사자의 객관적 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결정되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빈곤은 죄악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자본주의 규범 하에서는 빈곤은 나태의 결과일 뿐이다. 이 때문에 영국구빈법에서는 유능빈민과 무능빈민을 구별하고, 각기 처우도 세분화했다. 곧 ‘구제에 값하는 빈민’과 ‘구제에 값하지 못하는 빈민’으로 준별한 것이다. 하여 구빈은 자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선별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반드시 돕는 건 아니다.’로 빈곤관의 전환이 이루어져, 오늘날의 복지국가로의 길을 열게 되었다(<세계> 2017년 2월호. 타케가와 쇼고, ‘いまなぜ, 子どもの貧困か’ p.60).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이른 지금, 그 복지국가의 현실은 어떠한가? 영국의 빈민구제기구 옥스팜 인터내셔널(Oxfam international)이 2015년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세계 80대 부자들은 세계 인구 절반인 소득 하위 35억 명 몫에 해당하는 부를 소유하고 있다. 개인들의 노력과 생산성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헬조선’의 현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구체적인 통계를 보자. 2015년 말, 금융자산만 10억 원이 넘는 부자 21만1000명의 금융자산 총액은 476조 원에 달한다. 가계부채가 1200조 원이 넘는 상황에서 같은 땅 같은 시간대에서 이 불평등을 노력이나 재능의 차이로 설명한다면 귀싸대기 맞을 짓하는 것이리라. 뭐가 잘못되었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부탄이라는 히말라야 산중 작은 나라가 제공한다.

부탄은 197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12달러였고, 한국은 255달러였다. 2013년 부탄은 2360달러, 한국은 2만8000달러로 차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삶의 질’에서 부탄은 최상위권이고, 한국은 최하위권이다.

모든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무상인 나라, 산후 유급휴가를 반년 동안 주고, 아이가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근로시간을 단축해주는 나라, 첫눈이 오면 학교나 직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 헌법에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라고 명시한 나라 부탄과 ‘헬조선’, 어느 나라가 더 살만한 나라인가?

혁신적인 사고(思考)가 필요한 때이다. 다음 글에서는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혁(Copernican Revolution)에 대해 논의해 보자.

(이 글은, 특히 통계부분에서는 한겨레신문 2017년 2월 24일자 등의 ‘책과 생각’에 기대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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