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13>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 슈마허의 그리스도적 경제관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13>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 슈마허의 그리스도적 경제관

김 해창 승인 2018.01.23 00:00 의견 0

슈마허가 1974년에 펴낸 '풍요의 시대-그리스도인의 견해'(왼쪽),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독일어 초판 표지(오른쪽)과 탈코트 파슨즈가 번역한 영문판 표지.

E.F.슈마허는『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발간한 다음해인 1974년에 『The Age of Plenty-A christian View(풍요의 시대-그리스도인의 견해』(The Saint Andrew Press)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 소개되지 않은 이 책에서 슈마허는 ‘그리스도인의 견해’라는 말을 쓴 것은 ‘불교경제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가치체계에 대한 성찰을 정리했다.

슈마허는 ‘사람은 주 하느님을 칭송하고,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 창조됐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고, 지구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이러한 사람을 위해 창조됐으며 그가 창조된 목적에 맞게 그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 다른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하며, 그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그러한 것을 이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도 슈마허는 불교경제학에서와 같이 ‘인간의 크기’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고 ‘작은 것이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며, 이것이 단순소박함으로 연결되는데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도 단순소박함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도 비폭력 또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지배dominion)’하라고 한 것에는 ‘노블리제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슈마허는 비폭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물학적이나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농업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세계 상황을 바꿔가기 위해서는 △소규모 △단순소박함 △자본절약적 기술 △비폭력을 슈마허는 강조했다. 그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필요로 하는 다른 모든 것은 절로 주어질 것이니라’라고 하는 성서의 말씀을 결론으로 내놓았다.

E.F.슈마허는『내가 믿는 세상』의 마지막 장 ‘나의 믿음’에서도 이와 같이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강조한다. ‘불교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고 말하는 데 비해 기독교는 위로부터 성령에 의해 태어났다고 하는데 인간의 존엄함은 이런 높은 위치에서 나오며, 높은 신분이 의무를 진다는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슈마허는 또 성서를 인용해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이 사람들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라는 말을 강조하며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들에 대해 자신의 달란트가 많든 적든 그 받은 달란트대로 행하여 살아야 할 것이라고 끝을 맺는다.

이러한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을 읽다보니 ‘기독교경제학’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독일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이란 저서이다. 이 책은 1905년경에 막스 베버(Max Weber)가 저술한 것으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의 세속 내 금욕이 '자본주의의 정신’에 적합성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역설적인 논리를 이끌어내, 근대자본주의의 성립을 논한 것이다. 이 책은 1930년에 탈코트 파슨즈(Talcott Parsons)에 의해 영어판이 출판됐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캘빈주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며, 그것은 캘빈의 예정설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봤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배금주의나 이윤의 추구가 아니라 합리적인 경영‧경제활동을 비합리적으로 지배하는 강한 에토스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에서 말하는 메타경제학의 최상의 가치가 바로 자본주의경제학에서는 캘빈의 예정설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같은 기독교라고 해도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과 가톨릭은 다른 면을 보여준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이 캘빈주의의 영향이 강해 종교적 비합리성을 가진 합리주의에 의해 근대자본주의가 발달했다면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같이 가톨릭 영향이 강한 나라나 독일과 같이 실천적 합리성이 강한 나라에선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발달이 늦어진 것도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캘빈의 예정설의 핵심은 구원받는 인간은 미리 결정돼 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의 유무에 의해 그 결정을 변경할 수 없다. 인간은 신의 의지를 알 수가 없기에 자신이 구제될 지 여부를 미리 알 수 없다. 따라서 신에 의해 구원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된다.

이처럼 두려운 예정설은 기독교신자로서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의 마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인과논리를 낳았고, 결국 캘빈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일절 욕망이나 사치, 낭비를 금하는 대신 신이 정한 직업을 천직으로 삼고 신앙과 노동에 금욕적으로 매진하는 것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장 금욕적이고 돈벌이를 강하게 부정하던 캘빈주의에 의해 오히려 금욕, 절제의 정신으로 만든 값싸고 질 좋은 재화나 서비스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면서 이윤을 얻는 것은 바로 이웃애의 실천 결과이며, 그러한 노동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노동’의 증거가 돼 돈벌이를 긍정하는 논리로 근대자본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시계의 발명으로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개신교도들의 근면을 일깨워 노동의 생산성을 크게 높이게 됐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근면 절약정신은 합리적 경영을 낳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효율적인 생산방식이 도입됐고, 그렇게 금욕적 노동에 의해 모인 돈은 낭비되지 않고 저축됨으로써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대자본주의를 낳고 발전시켜 근대화가 진전됐다. 그러나 그 후 신앙의 세속화와 함께 이윤추구 자체가 자기목적으로 변하게 됨으로써 현대자본주의가 본질적 위기를 안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슈마허의 메타경제학으로 풀어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은 절제와 근면이며, 이러한 것이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로서의 이윤 추구를 이끌어내고 경제성장이 곧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경제학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이러한 최상위의 메타경제학에서 이윤 추구만이 강조되다 보니 본말이 전도됐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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