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꿈, 나의 꿈
아버지의 꿈, 나의 꿈
  • 정찬무 정찬무
  • 승인 2018.07.02 11:49
  • 업데이트 2019.02.10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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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꿈, 나의 꿈

얼마 전 우리 부부는 포상휴가를 나온 군인 아들과 함께 모처럼 세 식구가 식사자리를 가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아들이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아들은 지방대 실내인테리어학과에 다니다가 돌연 휴학계를 내고 해병대에 입대해 복무 중이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군대 제대하면 여행작가가 될까 합니다."

아들 말을 듣자마자 얘 엄마는 펄쩍펄쩍 뛰었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해야지 전망이 불투명한 여행작가가 뭐냐고......

모자의 대화를 듣다보니 지난날 나의 진로를 결정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15년 전 고인이 되신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처럼 자식의 진로에 관심이 많으셨다. 어쩌면 관심의 정도를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나의 진로는 아버지의 의지와 바람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진로 얘기를 하는 아들의 말을 듣자 아스라한 옛날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2015년 제주도 가족여행 중.
2015년 제주도 가족여행 중 여미지식물원에서.

나는 지리산 자락 시골마을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4남3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소위 ‘배운 사람’이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님과 결혼한 아버지는 당신의 외사촌 형인 소설가 이병주 씨 집에서 지내며 대학을 졸업했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지금의 사법고시인 고등고시를 본격 준비했지만 2차 시험에 연이어 두 번 고배를 마셨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고등고시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고민 끝에 판·검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네 아들 중에 누군가가 당신의 꿈을, 한을 풀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신 듯하다. 나의 파란만장한 삶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네 아들 중 큰 형님은 일찍이 서울에서 공무원이 되었고, 둘째 형님은 고향의 금융기관에 들어갔다. 막내 형과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큰형님이 사는 서울로 전학했다. 그런데 당시 큰 형님의 공무원 수입으로는 2명을 모두 대학에 보낼 형편이 못 되어 막내 형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당시 취업이 잘되던 명문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의 한을 풀어줄 아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막내인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법대로 진학하여 당신이 못다 이룬 판·검사를 했으면 하는 속내를 여러 번 드러내셨다.

그러나 나는 당시 작가의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국내외소설은 물론 역사, 철학,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문학청년의 길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아버지의 법대 진학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문과에 응시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호된 꾸지람을 각오하고 있던 나에게 꾸지람 대신 당시 인기가 높았던 육사 진학을 권유했다. 졸업 첫 해에 아버님의 뜻에 거역하고 국문과에 지원해 낙방했던 터라 이번엔 면목이 없어 아버지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필기시험 합격 통지를 받고 육사에 무난히 들어가나 싶었다. 신체검사가 남았으나 그것은 당연히 통과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이라고,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새 폐결핵에 걸렸던 것이다.

신체검사 받던 그날 아침부터 싸락눈이 왔다. 오전 내내 엑스레이 촬영, 시력검사 등 각종 신체검사를 받은 뒤 아버지와 김밥을 먹는데 장교가 게시판에 '1차 신체검사 탈락자 명단'을 붙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벌떡 일어나 게시판 앞으로 향했고,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서울지역 3675번 정찬무......' 내 수험번호와 이름이 탈락자 명단의 맨 위에 있었다. 순간 "찬무야, 그만 집에 가자."는 아버지의 신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실망과 서운함이 묻은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싸락눈은 어느새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스물아홉살이던 1989년 서울 목동 빠리공원에서 아버지와 산책 중.
스물아홉살이던 1989년 서울 목동 빠리공원에서 아버지와 산책 중.

그 이후 나는 전공 선택과 진로를 두고 아버지의 의사를 더욱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후기 H대학 법대에 들어가 아버지 뜻에 따라 1학년 2학기부터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사시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2학년 1학기 도중 자퇴서를 내버렸다.

그해 새로 예비고사를 치렀다. 다행히 명문대 진학이 가능한 점수가 나왔으나 학과 지망에는 여전히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과 나의 희망 사이에서. 고심 끝에 1, 2지망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과와 경영학과를, 3지망은 내가 원한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다.

1지망 법학과에는 떨어지고 2지망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경영학과는 취업이 잘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격려해주었다.

졸업 후 대기업인 K사에 입사하였지만, 전공부터 내 의지와 무관한 경영학을 선택해서인 지 난 대기업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잊고 싶어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다 보니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일할 수 없는 날이 늘어났고, 게다가 선·후배 동기들과 알게 모르게 경쟁을 해야만 하는 사기업 문화도 나의 성격과는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입사 4년여 만에 K사를 퇴사하고 말았다.

그 후 1년 여 공백기를 갖고, 4군데 일반기업을 더 다녔지만 그리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지금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추천하는 헤드헌터 일을 프리랜서로 하고 있다.

진로와 직업에 관계된 그간의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보면, 나는 어쩌면 아버지가 짜놓은 프레임에 갇혀 몸부림치다 진정한 나의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버지 탓을 하는 건 못난 일이지만, 처음부터 내 뜻대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끔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의 현재 직업인 프리랜서의 'Free'란 말이 새삼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에 수 천, 수 만 근의 무게로 다가온다.

언젠가 작가가 되려고 했던 나의 어릴 적 꿈을 꼭 실현하고 싶다.

아내와 아들은 여전히 열심히 진로에 관해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래 아들아, 너는 아빠 세대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는 네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의 적성이나 꿈과 상관없는 법학을 전공했다가 중도 포기하고, 결국 경영학을 타의로 선택 하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고 챙피한 일이지만,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서 내내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릴 적 꿈을 잊은 적은 없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하고, 취미처럼 재미있어 하고, 또 그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보람을 느끼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길 바란다. 수입의 많고 적음을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기를 바란다."

고창 선운사에서 아들과 함께
고창 선운사에서 아들과 함께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직업의 수는 2만 개 정도 된다. 그 2만 개의 직업을 6개월 만이라도 모두 경험해 보고 그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게 어떻게 보면 직업선택의 딜레마이기도하다

5년 전부터 고객사로부터 인재추천 의뢰를 받아 대리급부터 전문경영인까지 고객사에 적합한 인재들을 취업시켜 주는 헤드헌터란 일을 해오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낀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전체 직장생활 중 평균 4~5번 정도의 이직을 하는데, 경력직으로 이직을 고려할 때 그 기준이 선택한 회사가 얼마나 오래 근무할 수 있는 회사인지, 그리고 그 회사의 복리후생제도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회사분위기나 조직문화는 어떤지, 장래성은 어떤지 등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몇 군데 회사 중 단순하게 당장의 연봉을 1백만 원이라도 더 준다는 회사를 최종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해서 이직한 직장인들은 결국 새로운 회사에 적응치 못하고 대부분 2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고민하는 것을 지켜보며 참으로 안타까움을 많이 느낀다.

아들은 군대를 제대한 뒤 잠깐 꿈꾸었던 여행작가의 꿈을 접고 실내인테리어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목표로 하는 대학이 있다며 열심히 수능을 준비 중이다. 애초 마음먹었던 대로 실내일테리어 일이 정말 본인의 적성에도 맞다고 한다. 그리고 국내 학부에서 건축과 실내인테리어를 전공하고 기회가 되면 공간건축으로 유명한 프랑스에도 유학해 선진 실내외 건축공부를 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내비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간과 넓게는 지구라는 공간을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꾸미고도 싶고, 이 다음에 그 쪽 전문가가 되어 노후에 부모님을 위해 도시가 아닌 시골 산자락에 자기가 직접 아름답고 예술적인 집을 지어 주겠다는 코끝이 찡한 얘기도 한다.

"그래, 아들아!"

가장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어찌 보면 가장 빠를 때일 수도 있는 것이고, 무엇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며, 달팽이가 느려도 느린 것이 아니란다.

아빠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너는 꼭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응원한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 아들 오늘도 화이팅!!!

<프로매치코리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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