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나이트』와 〈만전춘〉(전편)
『아라비안나이트』와 〈만전춘〉(전편)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8.07.15 21:19
  • 업데이트 2018.07.17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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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라비안나이트(존 로우린스) 중(유튜브 캡처).
영화 아라비안나이트(존 로우린스) 중(유튜브 캡처).

아주 옛날, 왕 중 왕으로 군림하던 사산 왕조의 한 대왕이 두 왕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형 샤리야르가 부왕의 뒤를 이었으며, 동생 샤자만은 멀리 사마르칸드의 왕으로 봉해져 형 곁을 떠났다. 두 형제의 밝은 정치로 20년 동안이나 태평성대가 이어지던 어느 날, 형은 문득 동생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을 초청했다.

동생은 형을 만나러 가던 첫날밤, 도성 밖에서 야영을 했다. 문득 형님에게 줄 선물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나 혼자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 보니 왕비가 침상에서 흑인 요리사와 알몸으로 껴안고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이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아직 도성이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 남편이 있는데도 이 모양이니, 형님의 궁전으로 떠나 오래 머물게 되면 저 음탕한 계집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친 듯이 노한 왕은 두 연놈을 단칼에 네 동강 내버리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체 없이 출발 명령을 내리고 여행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도 왕의 머릿속에는 줄곧 아내의 부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슬픔에 잠긴 왕의 얼굴빛은 누렇게 뜨고,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20년 만에 만난 형제는 반가움과 기쁨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형은 동생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걱정하였으나, 동생은 여독이 풀리지 않아 그렇다는 핑계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동생의 건강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은 아내의 부정한 행실만을 생각하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으므로, 용한 의사의 어떤 명약도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형 샤리야르 왕은 동생에게 기분도 풀 겸 함께 사냥이나 가자고 청했다. 그러나 동생이 끝내 사양하자 할 수 없이 형 혼자 사냥을 떠났다. 왕궁에 홀로 남은 동생 샤자만 왕은 아내의 부정한 행실만을 곱씹으며, 고뇌에 시달려 수척해진 몰골로 정원을 내려다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때마침 형수인 왕비와 시녀들이 정원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인들은 정원 가운데 연못으로 몰려가 일제히 옷을 훨훨 벗어던졌다. 그런데 여자들 틈에 백인 노예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윽고 남녀 둘씩 짝을 지어 정원 구석구석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혼자 남은 왕비가 누군가를 큰소리로 부르자, 우람하고 늠름한 흑인노예가 군침을 흘리면서 숲에서 뛰쳐나와 왕비의 하얀 몸을 감아 안았다. 왕비도 그를 미친 듯이 끌어안고 알몸을 밀착시켰다. 이윽고 두 사람은 탐욕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빨면서 네 다리를 칭칭 감은 채 바닥으로 눕더니 마음껏 욕정을 불살랐다. 다른 짝들도 질세라 빨고, 애무하고, 교접하고, 분탕질을 해대더니,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서로 떨어져 정원에서 사라졌다.

우연히 형수의 음란한 행실을 목격한 동생은 깜짝 놀라면서도 자신의 슬픔을 달랬다. “아, 내 불행은 형님의 불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형님은 왕 중 왕,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추앙받는 대왕이다. 그런데도 궁전 안에서 이처럼 추잡한 짓이 행해지다니! 더구나 형수는 흉측한 흑인노예와 사랑 놀음을 즐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은 세상에 널려 있구나! 이제야 세상에 부정하지 않은 계집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겠구나. 이 세상 어떤 사내라도 계집의 음심에 걸려들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계집들 위에 알라의 저주 있으라. 칼의 손잡이를 계집에게 내주고 그 치마폭에 싸여 사는 얼간이들에게도 알라의 저주 있으라.” 그 순간 이후 샤자만 왕은 슬픔을 달래고, 고뇌와 절망, 원한과 불평을 말끔히 떨쳐버렸다.

사냥을 마치고 열흘 만에 돌아온 형은 거짓말처럼 건강해진 동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생은 자신이 겪은 불행하고 비참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동생이 아내의 부정으로 병까지 들었다는 이야기에 형은 불길 같은 노여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을 당하여 수척해진 동생이 갑자기 건강을 회복한 까닭은 뭘까? 형은 동생에게 그 까닭을 거듭 캐물었지만 동생은 한사코 그것만은 제발 묻지 말아달라고 계속 회피했다.

발레 세헤라자데☞

동생이 그럴수록 형은 더 듣고 싶어졌다. 형이 거세게 다그치자 동생은 할 수 없이 자기 눈으로 본 사실을 낱낱이 털어놓고 말았다. 아내의 부정을 전해들은 형은 너무 노여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직접 자기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형제는 사냥을 간다고 속이고 왕궁을 떠났다가 밤늦게 변장을 하고 몰래 왕궁으로 돌아왔다. 날이 밝아오자 형제는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왕비와 시녀들의 음탕질은 동생이 말한 그대로였다.

샤리야르 왕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아, 온전한 독신으로 살지 않고서는 이 더러운 세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겠구나! 알라께 맹세하노니 인간세상이란 하나의 커다란 죄악에 지나지 않다.” 그리고 동생에게 말했다. “오, 아우여!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자. 왕위 따위엔 미련이 없으니, 알라의 대지를 두루 돌아보자. 그러는 동안 우리처럼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할 때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편이 낫겠다.” 그 길로 형제는 왕궁을 빠져나갔다.

두 형제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바닷가 어느 목장 가운데 있는 큰 나무 밑에 이르렀다. 샘물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별안간 바다 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 무서운 소리가 울리더니 파도가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커먼 기둥이 솟아올라 목장 쪽으로 왔다. 형제는 나무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파도 속의 시커먼 기둥에서 마신魔神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체구에다 팔과 가슴은 몹시 억세고, 넓은 이마에 살갗은 먹처럼 시커멨다. 마신은 머리에 수정 궤짝을 이고 어슬렁거리며 육지로 올라오더니 두 형제가 숨어 있는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수정함을 내려놓더니 일곱 개의 강철 자물쇠를 따고 뚜껑을 열었다. 수정함 속에서는 놀랍게도 젊고 날씬한 미녀가 나타났다. 거인은 그 미녀의 무릎을 베고는 곧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여자는 잠든 마신의 머리를 살그머니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나무 아래에 섰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올려다보고 숨어 있는 두 왕을 향해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형제가 말을 듣지 않자, 여자는 만일 안 내려오면 마신을 깨워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겁이 난 두 왕이 벌벌 떨며 나무에서 내려오자 여자는 욕정을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 안 들어주면 죽이겠다는 위협에 두 형제는 할 수 없이 여자의 욕정을 채워주었다.

일을 끝내자 여자는 두 형제에게 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갑을 꺼내 570개의 도장반지를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여자가 오늘까지 흉측한 마신의 머리맡에서 몰래 정사를 벌인 남자들의 반지였다. 형제는 여자의 요구에 따라 반지를 빼주었다. 여자는 기구한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았다. 자신은 결혼 첫날밤에 마신에게 납치당했다고 했다. 마신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여자를 손댈 수 없도록 일곱 개의 철쇄를 채운 상자 안에 그녀를 가뒀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그 상자를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속에 처넣어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얼마든지 자신의 욕정을 채울 수 있었다고 했다.

“가련하게도 이 마신은 숙명이란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는 걸 모른 거죠. 또 여자란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이 아무리 싫다 해도 반드시 그 뜻을 이루고 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죠.”

여자를 믿지 마라, 결코 믿지 마라/ 그 마음에는 바람기 가실 날 없어,/ 기쁨도 슬픔도 전혀 아랑곳없이/ 여자의 밑천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 여자의 맹세는 헛되고 헛되며/ 끝없이 이어지는 거짓말의 향연./ 진실로 요셉의 본을 받아/ 간교한 혀와 농간을 조심할지니!/ 사탄에 꾀인 아담이 내쫓긴 것도/ (모르셨나요?)농간 때문이라네.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죠.”

나무라지 마라, 사내들이여!/ 화를 내자면 끝도 없으리니/ 그대들이 화를 낼 만큼/ 내 죄는 결코 무겁지 않아./ 비록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될지라도/ 무수한 지난날 숱한 여자들이 맛본/ 그 바람기는 가실 리 없으리니./ 참으로 칭송받아 마땅한/ 세상에 다시없는 사내는/ 간살스런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태산 같은 마음을 지닌 사내라네!

여자는 말을 마친 뒤 마신에게 돌아가 마신의 머리를 다시 무릎에 올려놓더니, 마신이 깨어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형제를 재촉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