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라면을 끓이다
새벽에 라면을 끓이다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8.12.22 20:36
  • 업데이트 2018.12.22 2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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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원 작가
조송원 작가

꾀죄한 입성의 한 촌로가 읍내 식당에 가서 생선요리를 시켰다. 그런데 막상 식탁 위에 나온 생선이 상한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한동안 생선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식당주인이 가서 물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요? 왜 식사를 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계십니까?”

“나는 지금 이 생선과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오.” “대화라니요?”

“생선아, 네가 뭍으로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냐고 물었더니, 10일이 훨씬 지났다고 하는군요.”

식당주인은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생선을 살펴보고는 얼른 새 요리를 갖다 주었다.

#1. 라면을 끓이다.

새벽이 하루의 시작인가? 하루의 끝일 수도 있다. 원圓은 본디 시작과 끝의 매듭이 없다. 시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편의상 새벽을 하루의 시작으로 매듭 지운다. 마찬가지로 나는 종종 새벽을 하루의 끝으로 삼는다.

새벽에 깰 때보다 새벽까지 깨어있는 날이 더 많다. 새벽 네댓 시, 가리사니가 조금 쇠잔해질 무렵이면 몸은 식욕을 들쑤신다. 볼가심을 한 지 칠팔 시간, 허출하다. 커피 서너 잔으로 체력을 받칠 수 없다. 잠자리에 들면 그만일 것을? 아니다. 뱃속이 비면 육신에 잠이 방문하지 않는 법이다. 뭔가로 채워야 눈꺼풀이 무거워지리라.

방 안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물이 끓고, 라면 사리를 넣고, 달걀을 추가하고, 드디어 라면 스프를 넣는다. 이윽고 퍼져 올라오는 얼큰한 라면 국물 향기. 김치 곁들인 라면 사리, 이보다 더 맛있는 요리가 이 세상 어디 있으리오. 마지막 남은 한 입의 국물로 입가심할 때 그 행복감, 더 바랄 게 없다. 이래서 시작의 새벽만큼 끝의 새벽도 좋다.

#2. 물론 합리적 선택이다.

새벽에 라면을 즐김은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인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행동인가. 곧 떳떳하지 못한 쾌락인 것인가? 라면은 탄수화물과 염분 덩어리인 인스턴트식품(즉석식품)으로 제 때 식사의 대용품으로도 사위한다. 그런 것을 새벽에, 그것도 잠들기 직전에 먹으면서 얻는 쾌락은 수 시간 후 후회의 늧일 뿐인가?

교과서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인 식사가 건강의 기초라고들 한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지난 20여 년, 자고 일어나고 먹는 것은 ‘제 때’ 한다.

去年貧未是貧(거년빈미시빈)
今年貧始是貧(금년빈시시빈)
去年無卓錐之地(거년무탁추지지)
今年其錐也無也(금년기추야무야)

작년의 가난은 가난일 것 못 되고
금년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일세.
작년에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금년에는 그 송곳조차 없다네.¹⁾²⁾

조직의 보호를 일찌감치 떨쳐서 ‘꽂을 송곳조차 없’는 사람은 몸의 신호에 정직하게 반응해야 영혼이 자유롭다. 잠이 오면 자고, 눈이 뜨이면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모두 ‘제 때’인 것이다.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적정 체중(172cm/67kg)이고, 필요할 때 토막잠을 자며 삼사일은 밤샘을 할 수 있는 체력은 된다.

#3. 걷는다.

이동수단이 정강말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낙향 준비로 가장 먼저 결단한 게 자동차를 없애는 거였다. 굳이 자동차가 필요치 않는 행동반경 속에서 ‘좁고 깊게’ 살고팠다. 살아내면서 얻은 미립이 하나 있다면, 삶은 속도보다 방향이 비교우위라는 사실이다.

고샅길을 벗어나 논틀밭틀을 걷다보면 자드락길에 연결된다. 외딴 오솔길이다. 감칠맛 나는 길을 느긋한 걸음으로 재를 하나 넘는다. 콧등에 땀방울이 송동글 맺힌다. 몸은 가볍다. 마는 이쯤에서 되짚는 길로 신작로에 들어선다. 자동차가 쌩하니 지나가고 지나온다. 생각해 본다. 저들은 왜 저렇게 빨리 달려야 할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쁜 일일까, 슬픈 일일까? 이도 저도 아닌 일상사라면 저렇게 압축한 시간을 어디다 쓸까? 바삐 달려야 할 이유 없는 내가 저들보다 더 운 좋은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걸음으로 하체의 근력이 딴딴해지고, 오장육부의 기능도 순편해진다. 덤도 만만찮다. 홀로 걷는 길은 외롭기에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불러낸다. 그리고 그와 온갖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의 끝맺음은 보통 ‘세상을 바꾸려면 우주적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내 마음 하나 돌려먹어도 그만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4. 연필을 깎다.

새벽 두세 시에 깰 때도 더러 있다. 일용할 양식을 벌려 이삼일 연속 육체노동을 한 날에는 잠이 초저녁에 방문을 한다. 기꺼이 맞아 깊은 잠을 잔다. 그러면 예외 없이 새벽에 눈이 떠지는 것이다.

우선 찬물을 한 사발 정갈히 마신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하이샤파로 연필을 깎는다. 세 자루다. 연필심의 흑연 냄새도 섞여 있지만, 은은한 향나무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사위는 포근히 적막하고, 홀로 깨어있는 시공간. 아늑한 마음에 또렷한 정신, 무얼 더 바라겠는가.

최상의 인물도 아니고,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다. 하여 분수에 넘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돌아보면 걸어온 길에 반성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여생도 더덜없이 걸어왔던 길처럼 그렇게 또한 걸어가리라.

※1)권영한, 『선시禪詩 303수』(전원문화사, 2003), 102쪽. 2)작자는 향엄지한선사(香嚴智閑禪師. ?~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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