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미서 시 '해질녘' 감상문 ... 라깡의 심리학으로 처용설화 다시 읽기
[기고] 박미서 시 '해질녘' 감상문 ... 라깡의 심리학으로 처용설화 다시 읽기
  • 창이 창이
  • 승인 2019.02.21 01:26
  • 업데이트 2019.03.23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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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웹사이트 '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에 2월 17일 실린 박미서 시인의 시 '해질녘'의  감상문을 '북미 거주', 필명 '창이' 독자께서 보내주셨기에 전문을 싣습니다. 

박미서의 시 ‘해질녁' 감상
‘서라벌의 해질녘’
-라깡의 심리학으로 처용설화 다시 읽기-

by Anna Silivonchik

박미서 시인의 ‘해질녁’의 시제를 ‘서라벌의 해질녘’으로 바꾸면 신라의 태평성대 헌강왕 시대로 우리를 인도해 서라벌의 해질녘 밝은 달 야경으로 우리를 몰입시킨다. 그리고 처용과 당시 화랑들의 풍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에서 처용설화를 다시 보게 한다. 즉, 일연이 빠뜨린 역신과 처용의 아내 간의 만남 과정을 재현했을 때 지금 우리의 성 풍습과는 다른 면을 본다. 그 다름을 라깡 심리학으로 읽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풀어내지 못한 처용설화의 진면목을 엿보게 된다. 때는 정월 보름 모처럼 박 시인의 작품을 계절과 함께 감상하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처용가’는 문맥을 거두절미한 토막 이야기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용설화는 헌강왕이 동해 개운포(현재 울산 앞바다)에서 놀다 돌아오는 길에 동해 용왕을 만나 용왕의 아들 가운데 처용을 신하로 맞이하는 일화의 한 부분이다. 용왕은 헌강왕에게 아들 처용을 주고, 헌강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으라며 처용에게 준다. 이를 염탐한 역신은 그 여인을 탐하여 범하는, 그러나 처용이 춤과 노래로 이 역신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처용가의 맥락이다. 그래서 처용가는 헌강왕 일화의 한 토막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토막을 삽입한다면 그것은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과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박 시인의 시에서 처용설화를 나름대로 다시 완성시켜 보려 한다.

서라벌의 해질녘 역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처용의 집을 찾아간다. 처용이 친구들과 이 시간에 가무를 즐기는 틈을 타 서라벌의 밤은 보름달로 휘영청 밝아 가가호호 등불이 켜지는 해질녘 무렵이다.

그래서 서라벌에는 두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처용이 밤들이 노니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역신이 이 틈을 타 처용의 아내와 잠을 자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휘장으로 가려져 서로를 볼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시로써 이를 연결시키려 한다. 다시 말해 뒤의 이야기를 앞에 끌어다 넣는 전설법(前說法·prolepse)을 도입하면 그것이 바로 박미서 시인의 ‘서라벌의 해질녘’이 된다. 처용설화 자체가 전설법이기 때문에 시는 전전설법이 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없는 전전설법을 박 시인의 시에 넣어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신이 동백꽃 향기 그윽한 초 봄 해질녘 여인 혼자인 처용의 집을 열쇠 없이도 들어간다. 목적을 끝내고도 잠까지 자는 역신은 현실감을 완전히 상실함이 분명하다.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모른다는 말이다. 처용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자신의 숙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 터인데 어떻게 긴 밤을 잘 수 있는가?

지금 우리의 통념으로 처용설화를 읽을 때에 이와 같은 의문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시대와 공간이 처용설화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그 다른 이유를 알자면 라깡 심리학을 여기에 원용해야 한다.

라깡은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의 세 개의 세계관으로 인간 내면을 분석한다. 상상계란 어린 아이의 거울 단계, 즉 3세 이전의 어린 아이가 거울 앞에서 거울 안의 자기와 밖의 자기를 구분 못하는 단계이고, 상징계란 이런 구분이 생긴 다음부터 ‘아버지’란 이름(도덕, 신, 훈계)으로 분별적 자아가 훈련되는 자아이다. 현실계란 불교에서 말하는 초자아적 무의식의 세계이다.

위에서 말한 역신이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 이해 안 되는 부분은 바로 우리는 지금 상징계에 있고 역신은 상상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울 단계에서 분별력이 자라지 못한 자아이다.

분별력은 없으나 내면의 에로스의 보편적 합일의 욕망과 뇌의 변연계 속의 기본적인 욕구는 우리와 다름이 없는 자아이다. 역신과 처용의 아내는 이불에 덮여 있고 발만 내 보이는 것은 이불이 알 혹은 동굴 같은 전자아적 상상계를 상징한다.

가락국의 구지봉 신화에서도 거북이 땅 속에서 고개를 내밀지 못하는데, 그래서 ‘너 누구냐?’고 묻자, ‘우리다’라고 답하듯이. 자기가 자기에게 답하는 거울 안과 밖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아 말이다.

시인은 번민과 오뇌 속에서 새 자아를 발견하여 텅 빈 내면의 세계에 자리 잡은 새로운 영적인 힘을 재확인하자는 데(지팡이는 깨달음의 상징) 시작의 목적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시인의 시작 의도는 처용에 대한 의미 규정을 상상계에서 상징계를 거쳐 현실계로 진입하려는, 처용의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역신이 처용 자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 가운데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는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용 자신이다.

역신이 처용의 대한 태도에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 장면이 바로 처용의 자아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는 모습이다. 소위 인간이 ‘철이 든다’라는 자아 이행이다. 처용의 한 자아는 아버지이고 다른 한 자아는 아이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할 때에 이를 라깡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구분한다.

그럼 자기 아내를 범한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는 처용은 누구인가. 이 자아가 이미 상징계의 너와 나, 너의 아내와 나의 아내를 구별하는 분별적 자아에서 초분별적 초탈의 세계로 넘어와 만난 자아이다. 이를 현실계라 한다. 현실계란 존재를 존재 그대로 받아드리는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 무애理事無礙의 불교적 세계관이다.

처용 자신이 자기 아내를 두고 달 밝은 서라벌 해질 무렵 밖에서 가무와 함께 유희를 즐겼다고 할 때에 여자 없이 놀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돌아 왔을 때에 이불 안에 자기 아내와 자고 있는 역신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고, 이 역신을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자아가 상징계의 자아이고, 이 자아를 용서하는 자아는 불교적 초탈의 현실계의 자아이다.

그래서 처용설화는 처용의 세 개의 자아가 이행하는, 그리고 신라 사회가 헌강왕 때를 전후하여 의식 변화가 크게 일어나는 변모의 모습을 여실히 엿보게 한다.

여기에 박 시인의 시 ‘해질녘’을 ‘서라벌의 해질녘’으로 시제를 바꾸고 전전설법의 기법으로 삼국유사에 넣으면 일연이 못다 쓴 글이 완성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강왕 설화 가운데 처용설화 바로 앞에 이 시를 넣으면 <삼국유사>의 새로운 접근법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연을 따라 시를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서라벌의 해질녘
-역신이 처용의 집을 찾아-

저물녘 발자국
그 뒷모습
가득히 비추는 창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찾아 가는 발자국, 여인 방에 비추이는 저녁 놀)

피어나는 숨은 꽃
바라보네
다섯 고갯마루
(역신의 내면이 붉은 노을 같이 작열함을 본다, 넘기 어려운 극한의 다섯 고갯마루,아름다움 그 자체와 결합되려는 에로스적 접신 -플라톤의 합일성)

동백나무 산새
얽힌 메아리
머리 위에 전설
(동백나무 산새들이 또 다른 자아의 오뇌같이 지저귀고 있다. 창밖에서 역신과 여인을 바라보는 상징계)

씻기우는 바람 따라
차오른 향기
돋아나네
(역신과 처용의 아내 바람 타고 고개를 넘어)

흰 구름 그늘
맑게 풀어간 내음
갓 생겨난 빛
(구름 그늘에서 노닐 때 경이로운 내면의 빛을 발견하다, 에로스적 카타르시스와 승화해나가는 영성은 새로움에 이른다 )

동그란 달
고개의 정수精水
심연에 꽂은 지팡이
( 현실계의 사사무애와 이사무애의 세계, 성과 속이 하나인 보편적 아름다운 세계, 처용의 춤과 노래가 되는, 심연에 꽂은 지팡이로서 통합의 고개를 넘는다.)

<창이 / 미주 오렌지카운티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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