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미서 시 '봄 편지' 감상문2 ... 애매성으로 '봄 편지'의 '살짝'
[기고] 박미서 시 '봄 편지' 감상문2 ... 애매성으로 '봄 편지'의 '살짝'
  • 창이 창이
  • 승인 2019.03.23 15:10
  • 업데이트 2019.03.2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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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주

인저리타임에 2019년 2월 9일에 실렸던 박미서 시인의 ‘봄 편지’ 감상문은 지면 관계로 중요한 한 부분을 빠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시어 가운데 ‘살짝’이다. 한국현대 시문학에서 김동리가 소월의 ‘산유화’ 가운데 ‘저만치’란 말을 엠프슨의 일곱 가지 애매성 연구에 연관시킨 것만큼 영향을 준 것도 없다. 저만치 이상으로 그 애매성이 뛰어 난 것은 ‘살짝’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말 하나가 여적 같이 남은 아쉬움 때문에 감상문을 추가 쓰게 되었다.

‘여적’이란 붓 끝에 남은 먹물이란 뜻이다. 박미서 시인의 ‘봄 편지’의 감상을 마치고 나서도 아직 여적餘滴이 생기는 이유는 ‘살짝’이란 표현 때문이다. 즉, ‘봄 편지’ 제 5연

밤비 내리게 하는
가볍고 잔잔한 느낌표 사이에
풀벌레가 살짝
의 ‘살짝’ 때문이다.

김동리가 김소월의 대표작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산유화’를 손꼽은 이유는 ‘...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에서 ‘저만치’란 표현 때문이다. 당시 문학계에서 소월의 대표작으로 ‘진달래’ ‘금잔디’ 등을 손꼽던 마당에 김동리의 주장은 새로운 충격을 문학계에 던졌다. 김동리 주장의 근거는 W. 엠프슨(William Empson)의 애매성 이론에 그 근거를 둔다.

엠프슨의 책 『애매성의 일곱 가지 유형 Seven Types of Ambiguity』이 1930년에 처음 출간 된 이후 1953년까지 3판을 거듭하였다. 일곱 가지 애매성이란 ①유사성 ②이중성 ③동시성 ④복잡성 ⑤혼잡성 ⑥모순성 ⑦다양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 일곱 가지 애매성의 유형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거리, 상태, 정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소월의 시와 박미서의 시에 나타난 애매성을 서로 비교하기로 한다.

엠프슨 이전에는 시에서 애매성은 제거되고 극복되어야 할 과제였지만 엠프슨by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이들 일곱 가지 애매성들을 갖추는 시야말로 시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엠프슨 이후 애매성이란 시각에서 시를 재조명하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엠프슨의 책이 출간된 무렵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구조와 함께 패러다임(기틀) 이론이 나올 때이다. 그리고 1960년 대 초반엔 자데(Lotfi Asker Zadeh)의 퍼지 이론fuzzy theory과 카오스 이론도 함께 등장할 무렵이다. 뉴에이지 운동도 이때에 나타났으며 현대에서 탈현대로 전환되던 무렵이다. 모두 애매성과 모호성이 정확, 분명, 확실한 것을 대신하던 때이다.

김동리가 소월의 산유화에서 ‘저만치’란 표현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엠프슨의 애매성 이론에 근거해 있다. 자연과의 거리, ‘님’과의 거리에서 ‘저만치’란 고유한 한국어 표현은 애매성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시 ‘산유화’의 화자가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연과의 거리를 ‘저만치’라고 할 때에 그 거리를 짐작 하기란 애매하며 화자들마다 다를 수 있다.

아리랑에선 님과의 거리를 ‘십리’ 정도로 보는 것도 한국인들이 평균적인 님과의 서운해지는 적정 거리일 것이다. 이매창과 유희경이 부안과 서울 이란 거리에서 나눈 시를 보면 단장의 그리움이 깃들어져 있다. 서울의 유희경이 부안의 이매창에게 보낸 시를 보면 “나는 서울에 그대는 부안에 천리 길 애간장 다 끊노라”고 했다. 지금 불과 세 네 시간 정도거리인데 한양천리 길을 두고 ‘저만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라면 한국과 미국보다도 시간적으로 더 먼 거리이다. 아마 앞으로는 화성 여행을 하게 되면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저만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화자의 시공간에 따라서 애매성은 달라진다.

사실 소월시의 애매성은 ‘진달래’에서 ‘사뿐이 저려 밟고’가 ‘저만치’ 보다 더 애매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밟을 때에 뼈가 아프도록 밟는 것도 아니고 느낌이 없을 정도로 밟는 것도 아닌 ‘사뿐히’라고 할 때에 그 밟기 정도가 얼마인가? ‘사뿐이’(표준어는 사뿐히) 그리고 ‘저만치’는 애매성의 한 단면들이다. 진달래는 예이츠가 그의 여인 모드 곤에 바친 시 ‘그는 하늘나라 융단 옷감을 바라네.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가 원형이라고 한다. 표절이라고까지 심하게 평하나 그렇지 않다. 소월의 ‘사뿐이’는 예이츠의 ‘softly’의 번역이라고 하나 두 말을 애매성이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큰 차이가 난다. 예이츠의 시를 보자.

만약 내개 황금빛과 은빛 짜여진
하늘나라의 수놓아진 옷감이 있다면...
나는 그 옷을 당신이 가는 길 발아래 깔아드리고 싶네
하지만 나는 가난해서 오로지 꿈만 가졌으니
당신 발아래 내 꿈을 깔아드릴 수밖에
사뿐히 밟으소서.

‘tread softly’를 ‘사뿐히 밟으소서’로 번역하였다.(권경수 저, 예이치와 모드곤, 63-4쪽) 예이츠의 시가 먼저이고 보면 소월이 예이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진달래’를 작시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영어의 ‘softly’를 ‘사뿐히’로 번역하여 표절 오해를 더 불러내지만 두 말의 어감은 완전히 다르다. 사뿐히 영어로 번역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뿐이’와 ‘살짝’

박미서 시인의 ‘살짝’은 소월의 ‘저만치’와 ‘사뿐이’ 이들 두 표현을 결합 해 놓은 것 같다.

밤비 내리게 하는
가볍고 잔잔한 느낌표 사이에
풀벌레가 살짝

봄 그리고 밤에 내리는 비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가랑비 정도일 것이다. 봄·밤·비는, 봄이 ‘저만치’ 오는 전령과도 같고 이를 인간이 피부로 느끼고 감촉하는 섬세함을 두고 박 시인은 ‘가볍고 잔잔한 느낌표 사이’라 했다. 이를 소월은 ‘사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봄을 풀벌레는 아직 땅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낌표로 감촉할 정도이다. 이를 박 시인은 ‘살짝’으로 처리한다. 소월과 박 시인의 애매성의 3대 요소인 거리, 상태, 정황에 맞추어 비교를 하면 아래와 같다.

               저기, 저쪽 (장소와 거리)
'저만치'     저렇게 (상태)
              저와 같이, 저런 모양 (정황)

박미서 시인의 ‘살짝’ 역시

             밤비 내리게 하는 (하늘과 땅, 장소와 거리)
‘살짝’      가볍고 잔잔한(상태)
             느낌표 사이에(정황)

‘봄 편지’의 단 하나의 연에서 박 시인은 애매성의 세 가지 요소들을 다 넣고 있다. 시인의 축약되고 간결한 시 쓰기의 솜씨가 엿보인다.

1960년 대 초반 미국 버클리대학 일군의 과학 전공 교수들이 저녁을 함께 하면서 잡답을 하는 과정에서 애매성의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지금 같으면 미투(me too)에 걸릴 만한 대화였다. ‘누구의 아내가 미인인가?’의 농담조 토론이었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대화가 결국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 위 일곱 가지 애매성 유형을 적용할 때에 ‘미인’의 개념은 애매모호하다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by 신동권

대화는 결론 없이 끝났지만 이란의 자데 교수는 여기서 ‘퍼지이론’을 착안한다.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운전하자면 차보다 더 큰 컴퓨터를 싣고 가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자유자재로 운전을 하는가? 애매성을 처리하는 감각이 인간이 기계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고 그 이후 세탁기와 카메라 등에 퍼지 기능을 넣으니 세탁기는 자유자재로 옷의 색깔에 알맞게 빨아주고, 카메라는 자유자재로 명암을 조절한다. 농장에서는 도마도가 익어 가는 색의 애매한 정도도 퍼지이론이 척척 맞혀준다.

지금 자율주행 자동차란 다름 아닌 기계에 사람을 능가하는 애매성 처리 능력을 입력해 넣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면 ‘사뿐히’를 ‘softly’로 번역했다면 ‘살짝이’는 같은 부사로 furtively, by stealth, on the sly, easily 등으로 번역된다. 국어사전에는 ‘남의 눈을 피하여 재빠르게,’ ‘힘들지 않게 가볍게,’ ‘심하지 않게 아주 약간,’ ‘가만히 몰래,’ 어떤 일이 있 따라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는 ‘살짝 살짝’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남녀가 물레방앗간에서 남 몰래 만날 때에 ‘살짝이 옵서예’ 란 노랫말도 있다.

softly의 반대가 hardly라면, ‘살짝이’의 반대말은 strongly 혹은 heavily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민족 문화의 수준과 정도는 서로 반대말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언어가 얼마이냐이다. 예를 들어서 ‘노랗다’란 말 하나만 두고도 ‘노랗다-누렇다-샛노랗다’ 등 다양하다.

퍼지논리학은 우리 민족의 이러한 애매모호한 정서적 성격을 표현하기에 알맞다. ‘한 두어 개’라고 할 때에 과거에는 비과학적 비논리적이라고 했지만 퍼지 논리는 1개, 2개, 3개를 모두 ‘한두어개’란 집합 속에 넣고 이 집합 속에 들어가는 요소들의 귀속도를 측정한다. 2개면 1을, 1개와 3개에도 한두어개의 집합 속에 넣어 0.5와 0.7 정도의 점수를 주는 데 이를 ‘퍼지 귀속도’이라고 한다. 애매모호한 것에 다양하게 귀속도를 주어 그 귀속도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처리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구상의 모든 민족 문화 가운데 퍼지 귀속도가 가장 높은 문화가 우리가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softly와 hardly 사이에 그 귀속도가 얼마나 되는지 easily와 heavily 사이에 그 귀속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영문학자가 아니라도 그 유사언어 사전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귀속도가 높을수록 문화수준이 높은 것은 말할 것 없다. 다시 말해서 애매성이 높을수록 문화수준이 높다.

그런데 일본식민 통치는 이러한 문화 귀속도마저 말살하고 말았다. 우리를 ‘엽전’ 혹은 ‘핫바지’라고 할 때에 앞뒤를 분간 못하는 민족이라고 무시했다. 그러나 엠프슨의 애매성 일곱 가지를 볼 때에 모순성과 이중성과 혼잡성 같은 것이 포함된다. 뜨거운 것을 마시면서도 ‘시원하다’고 하는 것은 퍼지 논리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

‘살짝’과 ‘슬쩍’

애매성이 생기는 이유는 이와 같이 찬 것과 뜨거운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먼 것과 가까운 것과 같은 서로 반대인 것들이 서로 일치하는, 즉 모순, 역설, 아이러니 같은 것에서 비롯한다. 살짝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심화된다. ‘살짝’의 네 개 사전적 퍼지 귀속도를 보면,

남모르는 사이에 재빠르게.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심하지 않게 약간.
표 나지 않게 가만히.

와 같다. ‘살짝’이 만약이 어감이 강한 말 앞에 가면 ‘슬쩍’이 된다. 만약에 박 시인이 ‘살짝’ 대신에 ‘슬쩍’이라고 했다고 해보자. 시의 어감이 완전히 달라지고 풀벌레는 좀도둑이 되고 말 것이다. 살짝과 슬쩍 사이에 ‘스리 살짝’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살짝’은 ‘조금’ 그리고 ‘약간’과 함께 퍼지 귀속도를 만든다. 퍼지 귀속도가 높아질수록 반대일치와 역설 혹은 모순 같은 개념의 비중이 높아진다. 바로 이런 요소들을 서양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장자편에서 숙과 홀은 모호한 혼돈이란 귀빈을 초대해 하루하루 몸에 구멍을 내 주니 마지막 날 그 흑암은 죽고 말았다고 한다. 눈, 코, 입 등의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다. 생명 자체가 혼돈이란 사실을 숙홀이 몰랐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를 ‘숙홀의 오류’이라 한다. 우리의 지금 문명은 이런 숙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날이 아닌지. 스타워즈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기계 장치의 불을 끄고 수동으로 돌아가던 장면을 상기하자.

by 신동권

생명의 단서로서의 ‘살짝’

박 시에서 ‘풀벌레’는 생명의 단서를 의미한다. 봄철에 풀벌레는 아직 일찍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사실은 아직 땅위로 내밀지 않고 있다 해서 생명자체가 땅 밑에 없는 것은 아니다. 8월의 매미가 없는 데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벌레로 숱한 시간 동안 땅 밑에 숨어 있었다. 땅 밑의 흑암과 혼돈에서 ‘밤비’가 내리면 비밀리에 그것도 밤에 살짝 나와야 한다.

박 시인이 봄·밤·비를 일치시키는 데 주목하자. 봄은 겨울과 여름 사이에 그리고 밤은 낮과 낮 사이이고 이 사이에 비가 온다. 그래서 ‘살짝’이란 사이 개념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서 살짝은 밤과 낮 사이의 시간이어야 하고 흑암과 광명의 그 사이의 공간이어야 한다. 사이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모든 생명은 죽고 만다. 유와 무, 생과 사, 그리고 공과 색의 사이는 ‘살짝’이어야 한다. 불교는 이를 ‘찰라’라고 한다. 찰라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그 사이의 순간 ‘살짝’을 붙잡지 못하면 신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빅뱅이 있던 처음 순간(10⁻⁴³초) 동안 우주는 갑작스럽게 팽창을 하지 않으면 우주 창조 자체가 무산되고 만다. 찰라의 순간을 불교는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뜨는 그 살짝의 순간은 물질과 생명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봄·밤·비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살짝’의 네 개의 퍼지 귀속, ‘남모르는 사이에 재빠르게/힘들이지 않고 가볍게/심하지 않게 약간/표 나지 않게 가만히’가 ‘즉’의 의미를 다 담고도 남음이 있다. 이 사이 개념의 ‘즉’은 살짝의 의미를 손상해 ‘슬쩍’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빅뱅의 순간은 ‘살짝’이어야지 ‘슬쩍’이어서는 안 된다.

‘봄편지’ 감상문1에서는 ‘살짝’을 봄에서 여름을 앞당기는 그 사이라고 했다. 계절 속에서 ‘살짝’은 춘분과 추분에 해당한다.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만약에 지구의 공전 과정에서 살짝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면 계절의 순환은 불가능해 진다. 거대한 지구도 풀벌레 같은 미약한 힘이 살짝 밀어주면 계절이 바뀐다. 하루의 야자시와 조자시 사이의 사이에서도 살짝 밀어주고 잡아당기는 힘으로 하루가 바뀐다. 사이의 힘은 느낌 정도의 미약한 힘이다.

‘살짝’을 한자로 표현하기란 힘들다. 겨우 표현해 낸 것이 ‘즉卽’ 과 ‘이而’이다. 그래서 ‘無卽有 生卽死 生卽空 空卽色’이라고 한다. 영어로 ‘as such’라고 하나 모두 ‘살짝’에 견줄 수 없다. 퍼지귀속도로 보아 한참 못 미친다. ‘道可道’라고 할 때에 도와 도 사이의 可 같은 것이 바로 ‘살짝’에 해당한다.

창세기에서 신은 하루하루 창조를 끝낼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를 반복한다. 저녁과 아침을 살짝 살짝 넘긴다는 뜻이다. 환웅도 땅에 내려오기 전에 여러 차례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고 한다[數意]. 천과 하늘 사이 그리고 영원과 현재 사이는 퍼지귀속도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사이에 여간 높은 귀속도가 성립되지 않으면 우주창조도 문명창조도 불가능하다.

박 시인의 풀벌레와 ‘살짝’을 연결해 이를 ‘가볍고 잔잔한 느낌표’라고 한 것은 우주가 처음 터지는 순간으로 돌아가 한 번 감상해 보아야 제 맛이 날 것 같다. 봄·밤·비를 가볍고 잔잔한 느낌표(!)의 순간으로 처리하는 시인과 같이 우리 시대가 모든 전원을 끄고 새로운 느낌으로 돌아가야 거리, 상태, 정황이 조화돼야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지 않을까! 살짝의 의미를 이렇게 되새기면서 이전 감상문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으면 좋을 것이다.

<창이 / 미국 남가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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