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벙글 무렵
벚꽃이 벙글 무렵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9.03.30 08:35
  • 업데이트 2019.03.30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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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은 /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응, 그러자. 낯을 씻어야 하니 30분 후에 보자.” 벚꽃 구경을 겸해서 드라이브하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장을 하는 친구다. 요즘 농사일은 농번기가 따로 없이 바쁘지만, 면사무소에서 이장회의를 한 김에 시간을 낸 모양이다.

“화개 십리벚꽃 길은 ‘벚꽃축제’로 번잡할 테니, 진교 쪽으로 가자.” 하동은 지역을 가릴 것 없이 벚꽃 천지다. 있던 길에도 가로수는 대개 벚나무고, 새로 단장한 가로수는 거개가 벚나무다. 삽짝을 나서는 일이 드물어 마당에서 보는 앞집 백목련의 순백과 몇 그루 매화에서 겨울 가슴이 활짝 열리지는 않았다.

벚꽃 터널을 지난다. 참 좋다! 한껏 피워 올려 봄 가녀린 바람에 배시시 웃는 벚꽃의 화사함에 가슴의 겨울 때가 온전히 가신다. 간드러지는 노랫소리가 없고 사람멀미에 울렁거리지 않아서 더 좋다. 사람은 사람 있는 데로 꾄다. 사람이 모이니 장사판이 벌어진다. 발길을 당기려 다투어 오디오 볼륨을 높인다. 벚꽃은 저 먼데 일이 된다.

점심을 먹으려 면소재지로 들어갔다. 맞춤한 식당에 주차하기가 마땅찮다. 근처의 면사무소 마당에 차를 댔다. “이게 누고? 원이와 천수 아니가. 야, 참 오랜만이다. 마침 잘 됐네. 같이 식사하러 가자. 면장님과 함께 밥 먹으러 나가는 길이다.”

막 차문을 열고 나오는 참이었다. 한전(한국전력공사) 하동지사장으로 얼마 전에 부임해 온 초중 동기인 친구였다. 면장도 초중고 동기다. 지사장이 면장 친구를 찾은 모양이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다. 면장도 같이 가자며 휴대폰을 꺼냈다. 횟집에 2인분 예약을 했는데 추가 주문을 할 요량이란다. 진교면은 바다와 면해 있다. 좋은 횟감이 많다. 천수가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면장의 휴대폰을 잡았다. 너희 둘이 회 먹으러 가. 나는 천수와 돼지국밥 먹을란다.

“굳이 좋은 회 마다하고 또 궁상맞게 돼지국밥이가?” 앞요리로 나온 순대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내게 천수가 지청구 비슷한 걸 먹였다. 곧바로 대답했다. “지사장 그 친구, 2백 원짜리야.” “2백 원이라니, 무슨 말이고?” “음, 2백 원이 무슨 말인고 하면······.”

천상병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손바닥을 내보인다. 그것은 20년 이상 몸에 밴 천상병식 인사법이다. 그를 만나서 그의 손바닥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천상병으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다고 믿어도 거의 틀림이 없다.

천상병이 손바닥을 보여 준 대가로 부르는 가격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해져 있다. 그것은 자기와의 친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평균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정해진다. 천상병식 감정가격이 있는 것이다. 최하로는 왕대포 한 잔 값에서 최고로는 그 열잔 값인데 2백 원에서 2천 원이다.

그런데 이 20년 묵은 감정가격이 때때로 희비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패가망신한 옛날 부자에게 2천 원은 부담이 되는 액수이며, 형편이 나아진 옛날 가난뱅이에게 2백 원은 너무 낯간지러운 것이다.

어느 날 천상병이 신경림에게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천상병에게 있어서 신경림은 언제나 왕대포 한 잔짜리였다. “이봐 상병이. 난 이제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내 책에서 나오는 인세도 제법 있고, 마누라 벌이가 괜찮단 말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5백 원으로 하자.” “문디자슥, 수작하지 마라. 넌 아직 2백 원짜리야.”*

한국전력공사가 밀양 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찬성 측 주민에게 선심성 필리핀 관광을 지원한 사실이 감사에서 드러났다. 밀양 송전탑 사태 중 가장 큰 문제점은 한전 보상금을 둘러싸고 찬반 주민이 갈려 마을공동체가 무너진 것이었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감사원은 한전이 송전탑 건설 사업비 중 3200만 원을 들여 공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찬성 측 주민 19명에게 ‘필리핀 전력설비 시찰’을 지원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2015년 12월 5~10일까지 5박 6일간이었는데, 필리핀 일리한발전소 1회 방문 외 모두 관광 일정이었다. 감사 결과, 주민들은 발전소 시찰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천수야. 천상병의 감정가격은 상대방의 주머니 사정으로 정해지지만, 내 기준은 좀 달라. 좀 거창하게 말하면 ‘사회적 가치’다. 내 기준에 따르면 지사장 친구는 2백 원짜리도 안 되지만 동기라서 높이 쳐 준 거다. 1960년대의 왕대포는 지금으로는 호프에 비길 수 있겠지. 3, 4천원. 5천 원짜리 자장면 같이 먹자면 합석하겠지만, 3, 4천 원짜리에게 10만 원짜리 회를 얻어먹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안 그래?”

진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옥종 쪽으로 잡았다. 이렇게 하동군 반쪽을 일주하며 드라이브하면서 벚꽃 구경을 하는 셈이다. 옥종 길은 골이 깊다. 꽃망울이 아직 터지지 않고 벙글려 한다. 화려함을 감추고 있다. 사나흘이면 만개하겠지. 늦음이 어쩜 완전함이란 생각이 든다. 불현듯 ‘버닝썬’ 사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데뷔가 결정되면 회사에서 배정해준 차를 타고 다니며 코디네이터, 헤어·메이커업 담당 등 신인 한 명당 서너 명의 스태프가 붙어 스타 대접을 해준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기획사들끼리 자존심 경쟁을 벌이면서 신인들에게도 가급적 많은 스태프를 붙여주는 과시적 행동을 하는데 결국 연예인들이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런 특권의식은 정준영·승리처럼 인기와 돈에 기대 여성을 대상화하고 조롱과 혐오를 퍼붓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불법에도 무감각해지게 만든다. 대중의 영향력이 큰 연예인들일수록 더욱 섬세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정덕현 평론가는 “승리처럼 10대 후반부터 연예업계에 들어와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라면 비즈니스 세계에서 주고받는 쾌락에만 충실하게 살아왔을 뿐 제대로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정준영이나 승리처럼 스타였다면, 그들보다 더 올곧은 행동을 했을까? 내가 한전의 고위직이었다면 마을공동체 파괴 작업에 더 앞장서지 않았을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 무명과 가난을 합리화할 정당한 근거는 될 수 없다. 그러나 ‘건강한 가난’은 결코 사위할 꼬투리가 아님은 확실하다.

‘가능성은 실현을 능가한다’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기온이 좀 낮다. 꽃망울 틔움이 늦음, 당연하다. 화개 십리벚꽃과는 달리 이 당장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할 뿐, 때가 되면 다 피게 되어 있다. 벚꽃이 벙글 무렵, 벚꽃길을 드라이브하며 갖는 차분한 감상이다.

※*강홍규, 『관철동 시대』(일선출판사, 1987), 109~110쪽. **김희곤, 「한전 밀양공동체 파괴 드러나. 송전탑 찬성자 골라 국외 관광」, 『경남도민일보』, 2019년 3월 21일. ***남지은, 「알맹이 빠진 ‘스타 만들기’」, 『한겨레신문』, 2019년 3월 21일.

<작가·인저리타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