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의 만주 일기 (3)한 바탕 크게 울 만한 자리
박명호의 만주 일기 (3)한 바탕 크게 울 만한 자리
  • 박명호 박명호
  • 승인 2019.04.15 12:27
  • 업데이트 2019.04.15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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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동이란 첫 경험에서 일어난다.

처음으로 만주 벌판을 보는 그 감동은 ‘크게 울고 싶다’로 축약할 수 있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만주 벌판을 처음 봤을 때 감동을 다음처럼 적었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눈에 헛것이 오르락내리락하여 현란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대고 말했다.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러볼 만하구나!'

연암은 그것을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달을 갑갑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넓고 환한 세상을 만났을 때 울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방이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과 땅 만이 맞닿아 마치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오가는 비구름만이 창창할 뿐인 곳이고 보니, 한 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심성 속에 깊이 숨어 있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만난 것이다. 답답한 반도에 갇혀서 그것이 반도인 줄도 모르고, 마치 그 세상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들이 끝없이 펼쳐진 넓은 땅을 봤을 때 충격을 받게 되고 그제야 세상을 보는 시야도 탁 트이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연암은 캄캄하고 답답한 어머니 태중에 있다가 새로 태어나는 감격을 맛본 것이다.

뜻이 있는 조선의 사내라면 그 벌판을 보고 한 번씩은 통곡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연암뿐 아니라 이육사도 그랬고, 유치환도 그랬고, 당대 문필가, 예술인, 기타 필부까지 그 호연지기를 느꼈다. 우리 시단에 웅장한 남성 어조의 원조이자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이육사와 청마 유치환의 그러한 시세계가 만주 경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중략-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이 육사의 대표 작 ‘광야’의 웅장한 시간과 공간의 배경은 만주가 아니면 도저히 탄생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시(詩)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당시 젊은이의 정서를 지배했던 대중가요 속에도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구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번지 없는 주막 1절. 나화랑 작곡, 백년설 노래>

1930년대 히트작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나그네 설움’ 역시도 그것이 비록 애상적인 정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할지라도 가슴이 벅찬 호연지기임에 틀림없다. 묘하게도 호방한 웃음이 아니라 한 바탕 목놓아 울고 싶은 정서로 표현된다. 그런 노래는 좁은 반도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정서이다.

그렇고 보니 그 노래를 부른 ‘백년설’이라는 가수의 이름 역시 반도에서는 찾기 힘든 대륙적 이름이다. 우리는 그 시절 만주를 보면서 비로소 그 동안에 반도 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역사를 본 것이다. 중국의 속국인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 스스로도 놀랐을 것이다.

해외 여행자유화가 없던 한 스무 해 전만 해도 우리의 젊은이들은 연암 시대보다 더 답답한 세계에 갇혀 지냈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지만 당시 우리는 좁은 반도 그것도 허리가 잘린 반도 남쪽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중년이 되어서 말로만 듣던 넓은 만주 벌판을 처음으로 봤을 때 정말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것이 ‘호연지기’였다.

만주에서 통곡하는 시인이 또 있다. 지난 2003년에 나와 동행했던 조성래 시인은 만주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는 속에 것을 다 끄집어내 듯 통곡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통곡했다지만 그 역시 자신의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던 그 ‘호연지기’를 만나는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감동은 그가 늘 즐겨 부르던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처럼 한없이 깊은 정서의 울림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목 놓아 울었던 것은 이육사가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 놓’은 그 광야에서 ‘천고 뒤 백마 타고 온 초인’처럼 ‘목 놓아 울’었던 것은 아닐까.

남성다움이 사라지고 점차 소인배들만 늘어가는 지금의 경박한 우리 사회에 아직도 통곡할 만한 자리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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