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의 만주 일기 (9)연변라지오방송 (하)시인과 당나귀 그리고 싸락눈
박명호의 만주 일기 (9)연변라지오방송 (하)시인과 당나귀 그리고 싸락눈
  • 박명호 박명호
  • 승인 2019.05.27 13:39
  • 업데이트 2019.05.27 13: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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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고수툰에 김일량 시인 부부, 서규정, 조성래 시인 2006년
연변 고수툰에 김일량 시인 부부, 서규정, 조성래 시인. 2006년. 사진=박명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푹푹 눈이 나린다 (하략)
-백석-

삼사십 년대 북방정서의 대표 시인인 백석은 남만주 일대를 유랑하다 어느 겨울 어느 집 누추한 방에서 쓸쓸히 혼자 소주를 마신다. 밖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짚북데기 불에 추위를 쫓으며 그래도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한다. 시인의 신세는 처량하기 그지없지만 세월 지난 우리네 입장에선 참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십여 년 전 겨울 나는 부산의 두 시인(서규정, 조성래)과 길림성 안도현 벽촌 김일량 시인의 집에 며칠을 묵었다. 돈이 없던 백석은 어느 가난한 집 에서 겨울 저녁을 보냈지만 우리는 난방이 잘된 북간도식 토담방에서 한층 안온하게 겨울밤을 보내고 있었다.

북간도식 토담집의 특징은 입식 부엌에다 원룸 형태였다. 영하 이삼십 도의 추위가 보통인 그곳에서는 열손실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부엌과 방이 하나로 트여 있다. 처음엔 상당히 어색했지만 생각처럼 별로 춥지도 않았고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벽촌이라 밤이 되니 저녁을 먹고 술 한두 잔 주고받고 나니 달리 할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김 시인의 부인은 잠자리를 위해서 마실 가고, 우리 넷은 나란히 누웠다.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던 그 밤 우리는 ‘연변라지오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침 방송에서는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가 낭송되고 있었다. 그렇고 보니 청마 선생께서 살았던 곳이 남만주 안도현 어디쯤일 것 같았다.

연변 고수튼에시
연변 고수툰에서 필자.

그런데 우리가 듣고 있었던 것은 ‘연변라지오방송’만이 아니었다.

밖에는 백석의 겨울밤처럼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가 난다 해서 싸락눈이라 했던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 사이사이 이따금씩 멀리서 나귀 우는 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긴 여행과 추위는 오간데 없고 가슴이 자꾸 뜨거워졌다. 북녘 땅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던 백석의 시도 떠올랐다.

나타샤, 당나귀, 눈... 눈을 볼 수 없는 남쪽 나라 부산의 작가가 이렇게 눈 내리는 북국의 한 벽촌 토담방에서 부산의 두 시인과 연변의 시인과 나란히 누워서 눈 내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부산의 대선배인 청마 유치환의 시가 낭송되는 방송을 듣는다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시인의 집 벽에는 거울과 백두산 풍경화 사진액자가 걸려 있고 액자에는 백두산 입장권과 선물한 친구들의 문구가 써져 있다. 투박하게 멋을 부린 글씨였지만 그 투박한 글씨에서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김일량 동지
살아서 글로 싸우고
죽어서 글로 남기라

태어난 한 곳에서 50년간 그대로 살고 있다는 시인, 변화의 시대에 좋은 재능을 가지고도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을 지키고 한 곳에 산다는 고집이 그의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석화(시인)는 말했다. 자연이 그대로 담긴, 생태 시인, 자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안도현 양병진 고수촌에서 아내와 둘이서 사는 시인. 낮에 본 그의 시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빛은 자기 흰 살 속에서도
가장 하얀 속살만을 뽑아서
한 채 두 채 집을 짓고 있다.

눈내리는  연변 고수툰
연변 고수툰의 설경. 사진=박명호

서규정 시인과 나는 누운 채로 담배를 피웠다. 특히 서규정 시인의 담배는 거의 증기기관차 굴뚝 수준이다. 그래도 연기는 흙벽 집이어서 천정으로 쉽게 흩어져 금방 사라져 버렸다. 분위기 탓인지 담배 연기를 무척 싫어하는 조성래 시인도 ‘허- 분위기 좋네’를 연발했다. 그는 뒷날 그 상황을 그렇게 읊었다.

오오, 나는 한때 외로운 잠적을 기도했네.
잊지 못할 애인의 이름 어리석게 외우며
추운 땅의 끝으로 말없이 떠나갔네.

박명호

◇소설가 박명호는

▷경북 청송 출생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장편 '가롯의 창세기', '또야, 안뇨옹'
▷소설집 '우리 집에 왜 왔니', '뻐구기뿔',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
▷잡감집 '촌놈과 상놈' 등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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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2019-05-28 04:54:20
만주, 마음이 아려지는 곳이다. 만주국 통화성에서 태어 났다. 하필이면 괴뢰 정부 만주국이 왜 나의 호적에 평생 따라 다니는 제? 그래도 추억의 본적이 되었다. 박명호 시인의 정감 넘치는 기행문 빠짐 없이 잘 읽고 있다. 한 편 이 곳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장과 그 대원들도 조금 언급해 주었으면 아무리 이념의 벽이 무섭다 해도 시인은 용감해야 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