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의 만주 일기 (16)남자 버스차장과 '해란강의 아이들'
박명호의 만주 일기 (16)남자 버스차장과 '해란강의 아이들'
  • 박명호 박명호
  • 승인 2019.07.15 03:36
  • 업데이트 2019.07.15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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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류원무 선생과 함께.
2008년 8월 류원무 선생과 함께.

연변에 가면 나는 언제나 ‘순수’라는 막연한 화두에 시달린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순수’에 집착하게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보다 자본주의 때가 덜 묻은 과거의 모습이 많이 남아서일까. 순수에는 연민의 정도 있고, 과거도 있고, 나약함도 있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자면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경사가 거의 없는 긴 고갯길은 정겹기 그지없다. 그 고개를 넘어가는 낡은 버스도 아직은 구식이어서 예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처음 용정에 갈 때 나는 버스에서 그 순수와 부딪쳤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남자차장의 눈빛이었다. 타인에 대한 아무런 경계가 없는 순진한 눈빛, 아니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무장조차도 없어보였다. 아무나 주먹을 내밀면 그냥 맞고만 있을 것 눈빛이 나로 하여금 무한한 연민의 정을 일으키게 했다.

마치 주인이 시키는 대로 꾸벅꾸벅 순종만 하는 소처럼 말이다. 마침 윤동주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어선지 남자차장의 얼굴에서 윤동주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게다가 낯선 사람에 대한 아무런 경계가 없는 남자 차장의 순진한 눈빛을 보면 무엇이 잘 사는 것이고 무엇이 발달된 것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순진한 눈빛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는데 그것은 그때 그 남자 차장을 보면서 남에 대한 아무런 경계의 빛이 없는 다시 말하면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알았다.

사실 나는 그러한 눈빛을 진작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문뜩 이상한 느낌을 받고 발길을 돌렸다. 얼핏 시골서 올라온 사람 같았는데 시골 사람치고는 눈빛이 달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역 지하도에 좌판을 깔고 약초를 팔던 사람들은 바로 연변 사람들이었다. 같은 시골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눈빛의 달랐다.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비로소 그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늘 보는 우리의 눈빛이 얼마나 영악하게 닳았는가를 모르고 지내온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순수한 우리네 옛 모습, 그 눈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용정 명동촌의 아이들.
용정 명동촌의 아이들.

나는 그 소년 차장을 보면서 ‘80년대 후반에 본 연변의 동화 ‘해란강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 책 속에서도 티없이 맑은 ‘순수’가 있었다. 당시에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었기에 굉장한 감동이었다. 두루뭉술 ‘감동’이라 표현하지만 내용 하나하나가 마치 옛날 춘궁기 소죽불에 구운 감자 맛이었다. 거기에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순수의 세계가 오롯이 담겨져 있었다. 해란강가의 순진무구한 소년들의 이야기,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내 어린 시절의 세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우리 사회 또한 그러한 과거의 모습을 살뜰히 지워버렸다. 그러나 그 세계가 저 두만강 너머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크나큰 위로였고, 선망이었다.

'해란강의 아이들' 표지.
'해란강의 아이들' 표지.

만주에 갈 때마다 ‘해란강의 아이들’을 쓴 ‘류원무’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가 마침내 그를 만났다. 역시 인정이 많아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나는 만나자마자 그 책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처음에는 번역 동화를 쓰다가 한족도 몽골족도 자신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민족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창작을 했다, 했다. 소학교 교사인 부인의 경험을 토대로 썼다고 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호’란 학생이 장래희망을 묻는데 다른 아이들은 장군, 비행사 등을 말하는데 ‘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해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며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류원무 선생도 세상을 떠나셨고, 연변도 많이 변해버렸다.

박명호

◇소설가 박명호는

▷경북 청송 출생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장편 '가롯의 창세기', '또야, 안뇨옹'
▷소설집 '우리 집에 왜 왔니', '뻐구기뿔',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
▷잡감집 '촌놈과 상놈' 등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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