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7)이광희의 『태화당북정록』을 통해 본 계림사화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7)이광희의 『태화당북정록』을 통해 본 계림사화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19.08.12 16:11
  • 업데이트 2019.08.1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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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년(영조 1)에 경주에서는 계림사화라는 큰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경주뿐 아니라 영천과 울산지역의 선비들이 유배를 가거나 감옥에 갇히는 등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사화라고 하면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간 4대 사화만 떠올린다. 그렇다면 중앙인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어떤 연유로 사화가 있어난 것일까?

이조판서와 좌의정 등을 역임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이라는 노론의 정치적 지도자가 있었다. 그가 포항 장기 지역에 유배살이를 할 때 영향을 받았던 그 지역 유생들이 죽림서원을 세우고 송시열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죽림서원의 송시열 초상을 경주의 노론 유생들이 1722년 경주로 옮겨와 인산영당에 봉안하게 된다.

하지만 경주부윤 권세항과 울산부사 홍상빈이 지역의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하여 남인 유생 100여 명을 앞세워 경주의 송시열 영당을 철거하였다. 영당 철거에 참여한 남인 유생들은 육영재(育英齋)의 하과(夏課·여름철에 모여 공부하는 일)에 참여한 경주·영천·울산지역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경종이 사망하고 노론을 지지하던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 채명보 등이 그 때의 일을 상소하여 권세항과 홍상빈의 관직은 박탈되었고, 관련 유생 28명이 처벌을 받았다.

이 중 육영재의 유사(有司·현재의 총무 내지는 사무국장)로 활동하였던 울산 유생 태화당 이광희(李光熹·1688~1746)는 함경도 명천에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기간 중에 그곳에서의 일상의 모습과 자신의 심경 등을 기록했다. 계림사화로 유배살이를 한 선비 중 유일하게 적소에서의 생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면 이 일기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한 번 들여다보자.

2007년에 발간된 『태화당북정록』 번역본.

일기는 명천에 귀양 가는 도중의 거리, 산천의 형세, 일어난 일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곳의 유배객들이 명천 군수 이중술의 호의적인 대접을 받으며 형성한 교유관계 등의 내용이 많다. 또한 가족의 대소사(제사·생일 등)가 있는 날의 감회, 편지왕래와 병문안, 송별, 감사인사, 배웅과 근처 명승지 구경 등이 주요 내용이고, 간혹 친인척들의 부고가 날아드는 날에는 찾아서 조문하지 못하고 멀리서 슬퍼해야 하는 유배객으로서의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가족과 친인척, 친구들의 꿈을 꾸었다는 기록이 많다. 이는 그만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배지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계림사화가 일어난 배경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자. 송시열은 1675년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로 유배지가 바뀌었다가 다시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가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버렸다.

송시열이 세상을 뜬 이후 그를 모신 사당건립이 노론계열의 선비들 사이에서 전국적으로 논의되는 가운데 1704년(숙종30) 거제의 반곡서원, 1707년(숙종33) 포항의 죽림서원이 건립되었다. 이후 경주 인산서원 등이 건립된다.

『태화당북정록』 원문 내용.
『태화당북정록』 원문 내용.

송시열이 장기에서 5년간 유배를 살다가 거제로 이배되는 과정에 경주부를 경유하면서, 경주의 유림인 곡산한씨 등과 접촉하였고 이후 이 집안의 한시유·한흥유 등의 주도로 송시열을 모신 영당이 건립된다. 하지만 경주지역의 남인계 등은 영당의 건립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영당 훼철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계림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남인과 노론의 힘겨루기로 이후 지역 유림 간 큰 진통을 겪는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비슷하게 일어난다. 그 이후 1738년 안동의 청음서원 훼철사건과 1744년 영덕의 신안서원, 그리고 1788년 영양의 운곡서원과 1848년 울산의 난곡서원 변괴 등 역시 경주에서 일어난 계림사화처럼 지역 유림 간 큰 갈등을 겪었다.

숙종대에 환국이 여러 차례 일어나고 다시 노론이 득세를 하면서, 경주 역시 송시열과의 인연을 내세워 서원건립을 도모하면서 지역 유림의 노론계 지위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계림사화로 유배살이를 한 이들의 후손들은 1923년 계를 모아 지금까지 일정한 날에 모여 고통을 겪은 조상들을 함께 기리고 있다.

이광희의 일기는 1964년 그의 7대 손인 이용걸이 2권1책으로 『태화당북정록』을 간행했으며, 2007년에는 번역본까지 발간됐다.

<참고자료>

-장재한 역, 『태화당북정록』(2007)
-오상욱, 「계림사화의 배경과 영향 고찰」(『동방한문학』 73, 2017)
-이연숙, 「17~18세기 영남지역 노론의 동향」(『역사와실학』 23, 2002)
-조수미, 「유배일기 『太和堂北征錄』에 기록된 ‘꿈’의 양상 연구」(『민족문화논총』 57, 2014)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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