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16)가을날에 / 임동확
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16)가을날에 / 임동확
  • 전다형 전다형
  • 승인 2019.09.06 13:46
  • 업데이트 2019.09.06 13: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을날에 / 임동확

늦더위와 산들바람이 며칠째 교차하는 초가을, 붉은 수수밭과 흰 메밀꽃밭 사이에 트랙터가 한 차례 땅 고르고 지나간 황토밭이 고요히 누워 있다. 밭두렁을 타고 기어오르는 고구마순 아직 싱싱하고, 채 덜 여문 논의 벼들이 장꾼들처럼 수런대는 오후 한 나절, 수심 많은 어머니의 주름살 같은 고랑을 낸 채 외로이 파종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인근의 야산을 야금야금 먹어치운 고층 아파트, 철근 박는 쇠망치소리 요란한 주택공사 현장을 애써 외면한 채, 푸른 하늘 향해 벌거숭이 사지를 드러낸 산모퉁이 빈 밭. 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그 곁을 오르내리는 KTX처럼 최후의 창백한 결실을 향해 속도를 재촉해가고만 있을 때, 결코 완결을 모르는 한 세계가 여리고 가는 상추 싹을 내밀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고 아쉬운 청명한 햇빛을 마구 퍼부어대는 어느 가을 날, 검은 소멸의 퇴적물을 한껏 먹고 자란 시금치 씨앗이 폭설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여전히 잎 푸른 들깨와 뽕나무, 호박덩굴과 고추밭 사이에서 늘 출발점일 뿐인 무한의 내장이 문득 한꺼번에 사라진 무인칭의 얼어붙은 시간을 꾸역꾸역 소화해내며 자꾸만 젊어가는 보리밭을 토해내고 있다.

◇임동확 시인은

▷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졸(석사).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1987년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 시작. 이후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자신의 『예술론』에서 “네 안으로 들어가 봐라. 그리고 너의 힘든 것으로 세워라. 네가 스스로 밀물과 썰물로 변화하는 땅이라고 한다면, 너의 힘든 것은 네 안에 있는 집과 같은 거다.”라고 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자, 황폐의 계절이다. 논밭이 휴식하는 계절이며, 이 휴식은 새로운 씨앗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새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생성과 소멸의 무한 반복이 이 지상의 삶의 바탕이다. 오래된 우주의 비밀이 숨어있는 「가을날에」를 노래한 임동확 시인은 생의 가을걷이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늦더위와 산들바람이 며칠째 교차하는 초가을”에 들어섰다. “붉은 수수밭과 흰 메밀꽃밭 사이에 트랙터가 한 차례 땅 고르고 지나간 황토밭이 고요히 누워 있다.”는 시행에 이끌려 마음이 넌출 뻗어갔다. “밭두렁을 타고 기어오르는 고구마순 아직 싱싱하고, 채 덜 여문 논의 벼들이 장꾼들처럼 수런대는 오후 한 나절,”에 접어들어 나는 내 생의 7부 능선에 접어든 삶을 추수하려한다. 가감승제(加減乘除), 뿌린 만큼 거두었는가? 수심 깊은 생의 질문으로 목을 떨군다. 「가을날에」에서 화자는 빈 밭을 보며 고층아파트들이 산중턱까지 쇠망치 소리를 밀고 올라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화자는 자연의 풍요와 황폐를 외적ㆍ내적 세계와 대비시켜 이를 형상화하고 있는 「가을날에」 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을 함께 윤송(輪誦)하는 것으로 알찬 가을 추수가 될 것 같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열매들이 온전히 무르익게 하시고/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 주소서.//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이며,/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고/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레/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이랍니다. 가을 타는 사람들 넘쳐나겠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晩鐘)」과 「이삭 줍는 여인들」과 「씨 뿌리는 사람들」 섬세한 붓질이 눈부십니다. 

전다형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