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미서 시 '가을의 부호' 감상문 ... 다른 부호들로 가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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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11 10:59
  • 업데이트 2019.09.1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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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xabay

박미서의 다른 ‘가을,’ ‘부호’로 감상하기

머리말

세계적으로 ‘가을’을 주제로 한 시의 대표작은 릴케의 ‘가을날’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역시 많이 애송하는 대표적인 가을 시이다. 다른 어느 계절보다 가을은 가장 인간을 종교적이게 한다. 그래서인지 두 시인 모두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시를 쓰고 있다. 그리고 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은 기독교적인 하늘 남성신인 것에 가깝다. 두 시인은 모두 신에게 절실히 간구하는 자세로 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박미서의 ‘가을의 부호’ 역시 신을 언급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박미서의 신은 기독교 남성신이 아닌 태모신 ‘지신地神’이다. 릴케가 가을날 첫 구에서 ‘주여 제철입니다’ 혹은 ‘주여 가을입니다’라고 한 것과, 김현승이 가을의 기도 첫 구에서 ‘(주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는 모두 기독교 신관이 시의 배경이 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에 대하여 박미서의 시 1연 첫 구 “뜨거웠던 지신地神의 문턱을 넘어”는 하늘 아버지 신이 아닌 땅의 지신이 계절의 변화를 돌리고 있어서 대조가 된다. 박미서의 시는 다른 시들과 달리 지신-거문고-개밥바라기로 연결되는 땅과 하늘을 잇는 것이 다른 시들과 다른 것을 본다. 이에 대하여 같은 여성 시인인 최승자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고 한 것은 계절의 변화를 어떤 신의 섭리로도 보지 않는 무신론적이 강한 어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가을을 맞이하면서 네 시인들의 계절에 대한 서로 다른 감각을 보게 된다. 즉, 하늘 아버지신, 땅의 지모신, 그리고 무신론자의 시들을 한자리에 놓고 박미서의 시가 다른 시들과 어떻게 같고 다른 관점에서 감상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릴케와 김현승의 ‘가을’

먼저 릴케와 김현승의 시를 한 자리에 불러와 둘의 시들이 어떤 관점에서 같은 지를 본 후에 박미서의 시를 그 자체로 대비 시킨다.

릴케의 ‘가을날’

주여, 가을입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보내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살찌게 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적인 날을 베풀어 주셔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홀로일 것입니다
깨어 책을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흩날릴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사이를 오갈 것입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박미서의 ‘가을의 부호’

뜨거웠던 지신地神의
문턱을 넘어
붉은 멧비둘기를 몰고서

벼이삭 담은 항아리처럼
금빛으로 부풀어 올라
걸어오더니 ...

경험을 더 얻기 위해서
거문고 줄을
달맞이꽃으로 받쳐들고
가벼운 비상을 하려나 봅니다.

그 별지기에게
무엇으로 날아올지
합체되는 갈꽃 궤도를
조금 알 것만 같습니다.

휑한 밤길의 용마루 한가운데
개밥바라기
은하수 보이도록 빛발치며
열어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물새 나래로 밀어낸
하얀 독수리 구름
하늘 깃털의 흩어지던 불빛

가을 커튼을 젖히듯이
당단풍나무 아래
모두 모여
빛받이가 되는 것을.

박미서는 평소에 위 두 시인들의 시에 친숙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같은 가을을 두고 지은 시들이지만 릴케와 김현승의 가을은 자못 같고, 박미서의 가을은 한참 달라 보인다. 두 시인이 남성이라는 이유에서만 아닌 그 사관에 있어서나 계절을 보는 시각에서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 말 할 같은 여성 시인 최승자의 시와도 다른 분위기이다. 의도적인 차별화가 아닌 박미서 시인 자신의 평소 생각과 시상이 우연히 다른 시인들과 차별화를 두게 된 것 같다.

릴케의 ‘가을’과 박미서의 다른 ‘가을’

릴케 시는 ‘주여’로부터 시작한다. 독일어로 ‘Herr’ 를 ‘주여’로 번역했다. Herr가 남성 존칭어인 것은 재론을 할 필요가 없다. 김현승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라고 간구 할 때에도 그 기도의 대상은 릴케의 그것과 가히 멀지 않다. 김현승은 스스로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문인이었다. 지금까지 릴케의 시를 감상하는 감상자들이 “여름은 위대 했습니다”의 ‘위대하다’의 독일어 ‘gross’에 몰두한 것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릴케는 여름을 싫어했기 때문에 “여름은 위대했다”고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하다’를 ‘길었습니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은 ‘베니스의 만추’에서 릴케는 “한 여름이 꼭두각시의 무더기처럼 거꾸로, 지치고 살해당해 매달려 있다”고 했는데, 이는 ‘가을날’의 여름의 위대함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가을날의 연속적인 읽힘에 대해서도 일관성이 무너진다. ‘주여’를 부르던 릴케가 시의 후반부에 와서는 자연에 순응하고 따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시를 읽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박미서의 시는 이런 비일관성 없이 지신-거문고-개밥바라기로 일관성 있게 가을의 부호를 띄우고 있다.

그러나 릴케의 삶 자체와 ‘가을날’은 그의 생애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는 전반에 걸쳐 그 특징이 ‘가을’ 같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리움과 쓸쓸함과 죽음과 슬픔과 같은 우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을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동양적인 자연관으로 가을을 받아드리려는 것이 릴케 시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가을이 자연의 순환 나아가 우주의 순환 고리에 하나라는 감각은 그의 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대하여 박미서의 시를 접하게 되면 여름의 위대함이냐 아니면 길었느냐가 문제시 되는 것이 아니고, Herr에 방점을 찍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박미서 시인이 ‘가을의 부호’를 알리는 전령사와도 같이 존재로 ‘지신’을 언급한 것은 릴케와 김현승과 강한 대조를 만들게 한다. 그리고 지신은 가을의 부호 자체인 동시에 전달하는 주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신’은 ‘태모Greater Mother’이지 ‘여신Goddess’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땅의 생산과 다산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릴케가 여름을 한 이틀 연기하여 익지 않은 과일에 마지막 맛을 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신은 결코 남성신 아버지 신일 수는 없다. 대지의 지신에게 빌었어야 할 것이다. 아니 지신은 땅-딸 자체이다. 생산을 좌지우지 하는 존재가 아니고 생산 그 자체이다. 이 점에서 릴케와 김현승의 경우도 번지수가 잘 못 된 신에게 다산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박미서의 시 1연은

1연
뜨거웠던 지신地神의
문턱을 넘어
붉은 멧비둘기를 몰고서

로 시작한다. 지신이 대지를 뜨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신의 몸 자체가 뜨겁다. 2연에서

벼이삭 담은 항아리처럼
금빛으로 부풀어 올라
걸어오더니 ...

라고 한 것은 지신의 몸 자체가 항아리로 비유되면서 항아리의 부풀어 오른 모습이 여름은 위대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 전통에서 다산과 생산을 좌우 하는 신을 ‘산신産神’할머니라 하며 나중에 남성화 돼 ‘三神’이 된다.

박미서의 시는 이 지구라는 땅위에서 변하는 가을을 1-2연에서 말 한 다음 그 가을이 우주의 경계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부도지>>에 보면 우주가 있기 전에 律呂가 있었다고 한다. 지신 태모는 이 율려 혹은 음악에 의해 우주를 짓는다.

이를 박미서는

경험을 더 얻기 위해서
거문고 줄을
달맞이꽃으로 받쳐들고
가벼운 비상을 하려나 봅니다.

계절의 신 지신은 경험을 더 얻기 위해 우주의 율려 거문고 줄을 ‘달맞이 꽃으로 받쳐들고’ 가벼운 비상을 하려 한다. 실로 장엄한 시상이라 할 수 있다. 여름이 가는 것을 애써 막아서면서 까지 열매의 마지막 맛을 내게 해달라고 신을 객관화 시켜 놓고 기도하는 자세가 아닌, 지모신 자신이 계절의 옷을 갈아입고 우주적 비상을 하려는 그래서 한 해의 못 이룬 경험을 완성하려고 하는, 그러나 어떤 초월적인 힘이 아닌 거문고의 율려를 통해 가볍게 비상을 하려한다. “오직 8려의 음 만이 하늘에서 들려오니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성의 마고 또한 이 음에서 나왔다”(부도지 26쪽)

선천과 후천 사이의 시대를 ‘짐세朕世’라고 하는 데 지모신 혹은 지신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이동하는 중간기 즉, 짐세에 머물면서 두 세계를 거문고 줄로 조율하려 한다. 반드시 밤과 낮 사이에서만 피는 달맞이꽃은 짐세를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는 꽃이다. 달맞이꽃을 거문고에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은 가히 짐세로 우리를 이끌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거문고 줄을 달맞이꽃으로 받쳐들고”

이와 같이 여름에서 가을로의 변화를 우주 변화의 원리로 파악하고 있는 박미서는 여름(선천)의 완성을 우주의 가을 속에서 경험 얻으려 별지기의 동네로 오른다. 박미서의 시가 선천의 여름에서 후천의 가을로 넘어 가는 중간기 짐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우주의 여름과 가을의 사이, 짐세에서 아직 가을의 징조 만 보이는 것을 ‘가을의 부호’라고 한 것이라 본다. 그 중간기의 확실하지 않은 가을의 ‘낌새’를 ‘조금 알 것만 같다’라고 한다.

4연
별지기에게
무엇으로 날아올지
합체되는 갈꽃 궤도를
조금 알 것만 같습니다.

‘개밥바라기’와 가을의 ‘부호’

별지기 하늘 우주 동네를 주름 잡는 존재, 그것은 ‘개밥바리기’, 저녁에 뜨면 ‘개밥바리기’라 하고 새벽에 뜨면 ‘샛별’이라고 하는 별. 우리 민족의 주인별은 당연히 북두칠성이고, 이집트인의 그것은 시리우스이고, 마야인에게는 개밥바라기(금성)이다. 그리스인에게도 비너스(금성)가 주된 별이다. 마야인에게 금성은 남자인데 그리스인에겐 여자이다.

5연

휑한 밤길의 용마루 한가운데
개밥바라기도
은하수 보이도록 빛발치며
열어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우리 민족은 한 곳에 오랜 기간 동안 정착돼 살았기 때문에 북극성을 감싸며 도는 북두칠성이 주관심사가 되었지만, 마야인은 베링해를 거쳐 먼 북남미 대륙을 거의 횡단하면서 여행을 하여 왔기 때문에 항상 떠는 자리가 변하는 금성이 그들이 주된 별이 되었을 것이다.

금성은 매우 요상한 별이다. 태양계 안에서 다른 행성들과 달이 해가 서쪽에서 뜨며, 태양의 내측으로 돌다 외측으로 돌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새벽에 떴다 저녁에 떴다 종잡을 수 없는 별이다.

2018년 10월 31부터 2019년 8월 14일 샛별 morning star이고, 2019년 9월 22일부터 2020년 6월 3일 개밥바라기 evening star이다. 그러다 다시 2020년 6월 8일부터 다시 샛별이 된다.(Bruce Scofield, Mayan Astrology, 2007, 317쪽)

현대과학은 이렇게 금성의 바람기 정체를 이렇게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그러나 고대 마야 왕들은 금성의 이런 변덕부리기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해 결국 권위가 실추하게 되었고, 이것이 마야 왕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김상일, 윷의 논리와 마야력법, 2015, 151-161쪽).

그래서 마야인들은 금성을 ‘바람둥이 별’이라고 한다. 모든 별 가운데 가장 걷잡을 수 없는 궤도와 언제 나타날지도 정확하게 셈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천문학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화하게 금성이 언제 개밥바라기일지 언제 샛별일지 셈할 수 있지만 마야 천관들은 목숨을 걸고 그것을 알아맞히어야 했다. 제관인 동시에 왕인 당사자가 금성의 출몰 일시를 정확하게 알아맞히지 못해 결국 왕의 신적 권위가 실추했고 그 결과로 마야 제국이 멸망했다고 한다.

박미서 역시 개밥바라기의 이러한 바람기를 두고 ‘가을의 부호’란 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시는 2019년 9월 22일부터 2020년 6월 3일까지 이어지는 개밥바라기를 정확하게 계산이나 한 듯이 시의 적절하게 가을의 부호를 띄우고 있다. 시의 마지막 두 연들을 감상하기 전에 같은 여성 시인 최승자는 “가을은 개같이 찾아온다”고 한다.

‘개 같은 가을’과 ‘위대한 여름’ 사이에서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시집 ‘이 時代의 사랑’(1981)에서

땅은 몸 파는 여자의 하체 같이 병균이 득실거리고, 모든 열매들은 인간에 더 이상의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다. 여름이 가을에 넘긴 선물은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최승자에게 여름은 절대로 위대했다고 할 수 없다. 여름의 연장으로서 가을을 최승자는 고발하고 저주하고 있다. 최승자에게는 남신도 지모신도 없는 철저한 무신론적이다. 가을철의 열매를 신의 선물이라고 노래하는 릴케를 조롱이나 하듯이.

그러면 이러한 최승자의 부호 없는 가을에 대한 분노와 저주는 서양 기독교 남성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Herr에 대한 분노 그 자체가 신에 그대로 역력히 나타나 있다. 최승자의 무신론자적 자세는 ‘기도하지 않으리라’(1989)에서 ‘촛불이 타고 있는 동안은 /심장이 타고 있는 동안은 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내 심장 한 개의 촛불로 만들어 온 밤을 태우기만 하리라/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기억의 집‘ 중에서) 최승자에게는 릴케 같은 인격신도 없고 도연명 같은 자연도 없다. 그의 심장 자체가 신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은 기도할 곳도 필요도 없다. 몸 자체가 신이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남자로부터 여자를 몸으로부터 마음을 분리시켜 놓은 이원론에 대한 저주가 지금 뼈에 사무치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여성들이 서양 여성주의에 함몰돼 한국 남성들에 대한 매도와 저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최승자의 시에서 이를 읽는다. 이에 대해 박미서는 한국 전통 문화의 뿌리 깊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가을을 말하면서 미래를 향한 가을의 부호를 띄우고 있다. 시의 첫 연에서 지신을 불러 오는 것으로 다른 시인들과 차별화를 하고 있다.

박미서의 시는 이런 무신론자의 가을에 대하여 한 부호를 다음과 같이 전달하고 있다.

6연
물새 나래로 밀어낸
하얀 독수리 구름
하늘 깃털의 흩어지던 불빛

7연
가을 커튼을 젖히듯이
당단풍나무 아래
모두 모여
빛받이가 되는 것을.

이 마지막 두 연들은 릴케와 최승자의 두 가을 사이에서 ‘물새’를 시인은 자기 자신에 비유할 때에, 물새의 나래로 양극단을 모두 수렴하면서 독수리 같이 비상하며 빛을 발하려는 의지. 그 때에 ‘불빛’ 사이로 가을 커튼 젖히고, 지모신과 개밥바라기가 당단풍 아래에 모여 빛받이가 되기를 비는 듯. 마치 신단수 밑에서 웅녀와 환웅이 마주보고 인고의 시간들을 회상하듯.

박미서의 ‘가을의 부호’는 마고 성으로부터 짐세를 거쳐 새로운 문명 창조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는 의지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가을 정신없이는 새로운 생명 탄생은 없을 것이다. ‘가을의 부호’를 이렇게 읽어 보았다. 마지막 연을 다시 읽는다.

7연
가을 커튼을 젖히듯이
당단풍나무 아래
모두 모여
빛받이가 되는 것을.

<창이 / 북미 오렌지카운티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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