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2)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문신 조려(趙旅)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2)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문신 조려(趙旅)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19.09.19 13:00
  • 업데이트 2019.09.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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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의 어계 고택. 사진=조해훈

어계 조려(趙旅·1420~1489) 선생은 단종에 대한 절의를 고집하여 왕위를 찬탈한 세조정권에 협력하지 않고, 고향인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로 내려가 평생 처사로 은거하였던 지조있는 문사이다.

그는 대과시험을 준비하면서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희구하였다. 그러나 조려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강제로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시험을 포기한 채 낙향하여 단종에 대한 지조를 지켰던 선비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자시절부터 현명하였던 문종은 37세로 왕위에 올랐지만, 병약하여 2년 4개월 만인 1452년 5월 14일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에 당시 열두 살의 단종이 1452년 5월 18일에 즉위하였다.

조려는 34세 되던 해, 즉 단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453년 2월 10일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출사를 위한 문과시험에 대비하였다. 점필재 김종직 역시 조려와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나란히 입학하였다.

1453년 10월 계유정란이 일어나서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의정부 대신들이 학살당하고, 1455년에는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1455년 6월 11일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폐서인’이 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에 많은 사대부들은 수양대군의 폭력적인 정권탈취에 반발하였다. 1456년 6월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이 주도한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운동이 여러 차례에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조려는 결국 이러한 폭력적이고 반도덕적인 정권 하에서는 자신의 이상정치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종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생각을 접고 낙향하였다.

어계 조려 선생의 문집인 『어계집』.
어계 조려 선생의 문집인 『어계집』.

조려의 문집인 『어계집』(漁溪集)에 들어있는 시 「박삼가 맹지의 시를 차운함」(次朴三嘉孟智韻)을 한 번 읽어보자. 1475년에 경남 합쳔의 삼가현감으로 박맹지(朴孟智)가 부임하여 조려에게 조정에 출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조려는 아래의 시를 지어 사양하였다.

본래가 멋대로 자란 황양목이 自是黃楊木
뿌리 내린 곳이 차가운 골짝일세 托根又寒谷
뻗은 가지 본래부터 쓸모없는 재목이니 生枝本樗材
나라의 기둥됨을 감히 어찌 바랄손가 敢望柱王國

자신은 멋대로 자란 골짜기의 황양목에 불과하여 쓸모가 없으니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없다라며 벼슬살이 할 뜻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세조 이후 성종 때부터 조려에게 여러 차례 출사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자신의 재주가 부족함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끝끝내 고집하였던 것이다.

조려는 시 「중구절에 높은 곳에 올라」(九日登高)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가엾어라 이 늙은이 오랜 삶이 괴롭구나/마음 속 그리운 님 잊을 수가 없다네(嗟哉潦倒生苦晩/懷佳人兮不能忘)”라며, 생의 마지막까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②조려 선생이 출사를 사양하며 지은 시 「九日登高」.
조려 선생이 출사를 사양하며 지은 시 「九日登高」.

조려는 고향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선비의 정신인 도덕과 절의를 강조한 것도 당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아들 대에는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 큰 아들 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가 배출되었다. 이후로도 선생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가르침에 의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함안과 경북 청송에 세거하던 많은 후손들이 문중 차원에서 창의하여 왜군과 싸우는 등 조려의 충절 정신을 이어갔다.

함안 조씨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입향한 것은 대체로 고려 말 금은(琴隱) 조열(趙悅) 때라는 게 정설이다.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조열은 고려 공민왕 때 공조전서(조선시대의 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이색과 정몽주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함안으로 낙향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고려 정권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응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한 조려·김시습·원호·이맹전·성담수·남효온은 한평생을 스스로 죄인으로 여긴 채 숨어살며 단종을 추모하였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생육신으로 일컫는다.

단종이 유배되자 조려는 함안에서 영월까지 자주 왕래하며 단종의 안부를 챙겼고, 원호·이수형과 함께 치악산 무릉리 입구에 제명록을 세우고 단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또한 단종이 유배지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자 단숨에 영월로 올라가 통곡하며 대책을 강구하였다.

조려의 할아버지인 조열은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고, 자식들에게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겨 자식들은 그 유지를 받들었다. 손자 대에 와서는 조려가 과거룰 보았으며, 생육신으로서 충절을 지킨 이래로 함안 조씨 가문은 절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조려의 5세 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는 등 국가에 큰 공을 세워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에 기록된 동계 조형도와 정유재란 때 순절한 대소헌 조종도 등 후손들의 충절에 의해 함안 조씨 문중의 명성은 더욱 널리 퍼졌다. 이 문중은 그동안 9명의 문과급제자 및 수많은 생원·진사시 합격자, 13명의 충절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내는 등 학문과 충절로 이름난 명문가가 되었다.

현재 영월의 장판옥에 조려를 비롯해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32인을 비롯한 268명의 위패를 모셔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에서는 매년 4월 단종제를 올린 후 이들의 제사를 지낸다.

조려를 배향하는 서산서원은 1713년(숙종 39)에 사액되었다. 왕이 그에게 내린 시호는 정절(貞節)이며, 저서로는 『어계집』이 남아 있다.

<참고자료>

-심경호,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4.
-김봉곤, 「생육신 어계 조려의 생애와 추숭」, 『남명학연구』 49, 2016.
-김성언, 「은둔의 미학, 어계 조려의 시를 중심으로」, 『동양한문학연구』 14, 2011.
-이행렬, 「어계 조려의 운둔과 문화경관」, 『한국조경학회지』 39, 2011.
-허권수, 「함안 조씨의 함안 정착과 대소헌 가문」, 『남명학연구』 38, 2013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