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3)평생 중인 신분이라는 자의식에 시달린 최천익 진사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3)평생 중인 신분이라는 자의식에 시달린 최천익 진사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19.09.28 10:20
  • 업데이트 2019.09.2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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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최천익의 문집 초간본인 『농수고』 표지.
최천익의 문집 초간본인 『농수고』 표지.

18세기에 동해안의 흥해(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전리)에 호가 농수(農叟)인 최천익(崔天翼·1710~1779)이라는 중인(中人) 신분의 시인이 있었다. 그는 양반 신분이 아닌 대대로 군의 아전을 지낸 집안 출생이지만 진사시에 합격하여 평생 시를 지으며 흥해와 인근 경주지역을 반경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분과 가난한 경제 여건 등의 탓에 우울한 자의식으로 술을 가까이 하였으며, 두보와 같은 시성(詩聖)이 되기를 갈구한 인물이다.

필자는 그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수년 전 그의 고향인 흥해를 찾아 생가 및 후학들을 가르쳤던 서당과 주검이 묻혀있는 무덤을 답사하였고, 마을에 사는 그의 후손을 만나본 적이 있다. 이후 학술대회에서 최천익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면서 여러 지적과 도움을 받아 허술하고 신통찮지만 그에 대한 논문을 처음 발표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이처럼 중인 신분의 시인들이 많이 생겨나 요즘으로 치면 동인활동을 하게 된다. 학계에서는 이런 시인들을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일컫는다. 당시 경주권에서는 여항시인이 드물었으며, 역시 중인 출신의 시인 홍세태가 울산감역관으로 내려와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최천익의 시편들을 읽어보면 아전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한 자신의 울울한 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권엄이 흥해 부사로 내려와 최천익과 교유하면서 그의 능력을 아는지라 조정에 천거하여 벼슬을 주려고 하였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시 경주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사마소(일명 연주소)가 복원되어 최천익은 가끔 그곳에 출입을 하여 경주와 울산지역의 사마들과 술을 마시며 시를 읊기도 하면서 교유하였다. 사마소는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한 사마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당시 경주지역의 명문가 출신인 치암 남경희와 도와 최남복 등과도 격의 없이 교유하였다. 같은 동류의식이 있었기에 사마들 간에는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대체로 서로 존중하면서 어울렸던 것이다.

최천익은 한편으로는 경북 의성 출신의 여항문사로 역시 진사시에 합격하고 한문소설 『염승전』의 저자인 손와 김경천(1675~1765)을 아버지처럼 의지하였다. 그건 같은 아전 출신의 문사로 동병상련의 감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최천익의 시를 한 수 보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다음 시는 농수가 흥해 군수인 권엄에게 보낸 작품 2수 가운데 첫수인 「권 군수에게 두 수를 드림(呈知郡權候 二首)」(『農叟集』 권1)이다.

우리 군수가 나 같은 졸렬한 사람을 용납하여 我候容我拙
시 자리에서 더 친숙하게 되었네 詩席許追攀
자주 남루에서 약속을 받들면서 屢奉南樓約
문득 동쪽 들판에서 쓸쓸함을 잊게 되었네 劫忘東野寒
평생토록 득의치 못하였더니 平生不得意
오늘에야 감히 얼굴을 펴네 今日敢開顔
감격하여 비통하게 읊조리던 곳에서 感激悲吟地
가을바람이 바다와 산을 뒤 흔드는 듯 秋風動海山

위 시에서 보듯 최천익은 권 군수보다 17살이나 위였으나 최대한 자신을 낮춘다. 물론 최천익은 그야말로 궁벽한 지역의 한미한 출신인 여항시인에 불과하였으나 권 군수는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데다 흥해 군수 이후에 한성판윤과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로 신분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난 때문이기도 하였다.

②최천익의 문집 중간본인 『농수집』 본문.
최천익의 문집 중간본인 『농수집』 본문.

권 군수는 최천익의 재주를 안타까이 여겼으며, 최천익의 사후 그의 제자들이 『농수고』(農叟稿) 제목의 문집 초간본을 발간할 때 친히 서문을 써주었다. 권 군수는 서문에서 최천익을 선조 때 미천한 신분으로 시를 잘 지어 이름났던 유희경에 견주어 평을 할 정도였다.

함련의 ‘동야(東野)’는 당나라 시인인 맹교의 자이다. 맹동야의 친구인 시인 한유(韓愈)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도 불우한 삶을 산 벗을 위로하는 뜻에서 「맹동야실자시(孟東野失子詩」 등 몇 수의 시를 지었다. 즉, 최천익의 위 시에서는 자신을 맹동야와 동일한 이미지로 대입시키고 있는 셈이다. 최천익은 중인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자의식에 시달린 사람이므로 경련에서 평생토록 득의치 못하였음(불우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중거(1719∼1790년)가 흥해지역 일대 역참인 송라도(松羅道) 찰방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전송하며 읖은 시(「元察訪罷官北歸」, 『農叟集』 권1)에 “천지는 하나의 객사요(乾坤一逆旅)/ 호수와 바다는 잠시 깃들이는 곳이네(湖海暫棲遲)라며, 인생무상을 노래하였는데, 여기에도 그의 자의식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해도 청하현감과 함께 포항 내연산을 탐승하며 그의 시에 화답한 4수의 시 중에 첫 수(「內延山和李淸河 海圖 四首」, 『農叟集』 권1)에서 ”늙어 두려운 건 시 감정이 짧은 것이니(老畏詩情短)/ 산을 보며 다만 스스로 눈살만 찡그리네(看山只自颦)라고 읊었다. 이는 불우한 자의식으로 살아가는 그가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 시 였으므로, 늙어 시를 지을 수 없을까 두렵다는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또 경주사마소에서 읊은 시(「同南上舍 龍萬 李上舍 敦恒 任上舍 一鑌 李上舍 鼎勳 黃上舍 斛宿司馬所」, 『農叟集』 권1)에서 “엄숙한 자리 참으로 즐겁고 아름다운 모임(稧席眞嘉會)/ 그윽한 회포를 풀 수가 있네(幽懷得暫開)라며, 신분에 대한 차별을 의식하지 않는 사마들과 그나마 편한 마음으로 어울렸다. 양반이든 중인이든 당시에 사마시에 합격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경주권에서 같은 사마들 간에는 신분에 대한 편 가르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신분적 사회구조 속에서 태생적 신분의 한계 때문에 평생 자의식에 시달린 그는 그래서인지 포항과 경주권 사찰의 승려들과 자주 어울렸다. 빼어난 시인이었던 최천익의 그러한 내면세계는 그의 사후 1784년에 간행된 초간본인 『농수고(農叟稿』와 1896년에 간행된 중간본인 『농수집農叟集』)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한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참고자료

①김윤조, 「청천 신유한의 문인들과 그 문학적 성향」, 『한국학논집』 39, 2009.
②조해훈, 「농수 최천익의 시에 나타난 교유 양상」, 『대동한문학』 41,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