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미서의 시 '더없이' 감상문 ... 가무한과 실무한의 차이에서 
[기고] 박미서의 시 '더없이' 감상문 ... 가무한과 실무한의 차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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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30 15:02
  • 업데이트 2019.10.0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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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잎새에 이는 바람’과 ‘밤빗방울의 조종釣鐘소리’


윤동주의 시와 박미서의 시는 시의 주제에 있어서 그리고 자연의 변화를  인간 내면의 변화와 일치시킨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인다. 우선 서시가 9개의 줄들로 되어 있는 가하면 ‘더없이’ 역시 모두 9개 연들로 구성돼 있다. 그렇다고 줄과 연들을 일대일 대웅 시키려는 의도는 없지만 두 시들의 전반적인 느낌과 시상이 거의 대응이 가능할 정도로 유사하다. 

서시가 미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처럼 작은 변화에도 괴로워한다는 주체의 내면세계를 들어내고 있듯이 박미서의 시 ‘더 없이’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의 변화를 윤동주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자연현상에 연관시키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하고 속죄하려는 듯 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엿보이게 한다. 그러나 박미서는 하늘을 우러러는 대신에 ‘더 없이’로 세계 내적 자연치유에로 절대적 외로움이 엿보인다.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두 시들 간에 형성되는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두 시들 속에서 시의 전체적인 방향을 잡는 방향타와 같은 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이다. ‘서시’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시구는 이의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박미서 시에 이에 해당하는 시구는 “밤빗방울의 조종釣鐘소리” 일 것이다. 

여기서 먼저 박미서의 시 전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더없이>                                              
                                            
1연                                                             
흑갈색 나비의 매혹적인                    
무게보다도 힘찬
과꽃나무 속으로                               

2연
심해心海를                                      
유일하게 수호하는
진홍빛이 포롱거리고

3연
고즈넉한                                       
빗줄기마다
옛 말 예그리나!

4연
침묵의 바람 맴돌다가                       
금그어지지 않는
폭풍우에서도 생생하답니다.

5연
산구릉지의 기운들                             
다 피어날 때, 사로잡힌
비단향꽃무 소리

6연
티끌없이 간직한 경계선에               
밤빗방울의 조종釣鐘소리
그대로 알면서 가겠습니다.

7연
백로白露 온 맘을                                
창공에서 한껏 두르고
넉넉해지는 꽃가람길 이슬에는

8연
한참을 풀어 둔                                  
그 침묵의 안밖을
감아 돕니다.

9연
더없는 그대로의 축복처럼.                  

‘서시’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에 해당하는 구를 박미서의 “티끌없이 간직한 경계선에 밤 빗방울의 조종釣鐘소리”(6연)이라고 할 때에, 서시의 ‘잎새’가 ‘조종’이 되고, ‘바람’이 ‘빗방울’로 서로 일대일 대응이 될 것이다. 두 시가 접목되는, 그리고 시 전체가 대응 되도록 만드는 처소가 바로 이 두 시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이 ‘잎새’에 스칠 때의 소리, 그리고 ‘빗방울’이 ‘조종’을 칠 때에 내는 소리를 내는 것은 자연의 한 현상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미미한 자연의 소리가 인간 내면의 절대고독을 만든다는 점에서 두 시는 일치한다. 

출처 : 유튜브 '책 읽어주는 여자' 캡처.

윤동주 시 ‘서시’를 쓸 1941년 11월은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기 불과 두 주 전이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의 탄압이 그 극한을 치닫고 있을 때이다. 두 시인의 내면세계를 시를 통해 읽을 때에 1-6 연으로 이어지면서 그 내면의 고독이 장마철 수면이 차오르듯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인지 역사적인 것인지 사회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 같은 것에 괴로워하듯이 .

‘조종釣鐘’이란 동굴의 천정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에 내는 소리라고 한다. 경북 울진의 성류굴에서, 삼척 환선 동굴에서, 그리고 미국의 텍사스 주의 캘스버드 동굴이든, 몬타나주의 헬레나 동굴에서 이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경기도 양평 가는 길 운길산에는 水鍾寺란 절이 있다. 세조가 지병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 새벽녘에 은은한 종소리가 들여오는 곳을 찾아가 보니 토굴 속에 18 나한상이 있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더라는 것이다. 이에 세조가 18 나한을 봉안해 절을 짓고 ‘수종사水鍾寺’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이다. 운길산은 경춘선 운길산역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조종소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보다 더 그윽한 면이 있다. 윤동주와 박미서 두 시인은 모두 자연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말하고 하고 있다. 바람은 위로 상승하면서 소리를 내고, 물방울은 밑으로 하강하면서 소리를 낸다. 그러나 한 밤이나 새벽 고요할 때가 아니면 그리고 우리 내면의 세계가 고요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소리는 같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조종 소리는 절대고독에 가까운 두 시인의 그 내면적 이유가 무엇인지 그 본질적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바람과 물은 이렇게 그 성격이 상반되면서도 불구하고 그 어느 것보다 그 기능에 있어서 유사하다. 바슐라르는 바람을 두고 “부드러움인 동시에 격렬함이오, 수수함인 동시에 착란함”이라고 했다. 바람의 착란함일 때를 ‘폭풍우’라 한다. 박미서는 바람의 이런 양면성을 ‘폭풍우’(6연)와 ‘밤빗방울’(4연)에서 대비 시키고 있다. 물도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갖는다. 잔잔한 호수의 물과 낭떠러지의 물은 바람의 그것만큼이나 대비가 된다.

윤동주 바람의 이러한 양면성은 갈등과 위안이란 내면적 작용인 동시에 우주적 영역으로 그것을 확장 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윤동주의 시와 박미서의 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윤동주는 다른 시들에서도 비슷한 시상을 말하고 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가슴 3. 부분)

문득 이파리 흔드는 저녁바람에 
솨-무서움이 옮아오고(산림 시, 부분)

윤동주의 시에선 “이렇듯 외부적 정황에서 내면적 상황으로 전이에 내포된 부정성이 청각적인 ‘문풍지 소리’로 형상화 된 ‘바람’으로 변한다”(임현순, 윤동주 연구, 122쪽) 

그런데 대부분의 윤동주 연구가들이 이러한 윤동주의 내면세계를 윤리의식의 결벽증으로 돌리려 하는 것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윤동주에게서 ‘바람’은 ‘괴로움’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무서움’의 대상이기도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박미서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윤동주의 바람이 거센 폭풍우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박미서의 조종의 소리는 폭풍우로 변한다. 고요한 동굴의 빗방울소리가 아닌 심해를 요동치게 하는 광풍으로 변한다. 

윤동주 시에서 물, 바람, 하늘, 별과 같은 자연은 사물 자체로서 1차적인 의미를 거쳐 주체가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에 매개 구실을 한다. 그러나 박미서의 시에서는 자연이 이런 매개체 구실을 하지를 않는다. 자연 자체가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하여 자연의 자기 치유에 자신을 던져 버리고 있다. 윤동주에게서 자연은 이와 같이 주체가 자기 인식을 해 가도록 하는 즉, 두 가지 기능을 가진다. 스스로 있는 1차적 자연과 윤동주가 자기 인식을 해 가는 매개체로서의 2차적인 자연이 그것이다. 그러나 박미서의 시에서는 자연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서 매개체로서의 자연이 부재한다.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하는 데 박미서는 ‘나’라는 주체도 ‘괴롭다’는 감정 표현하는 말을 구사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의 1연의 ‘흙갈색 나비’와 2연의 ‘심해’라는 말을 통해 내면의 절대적 외로움을 더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시의 ‘흙갈색 나비’라는 표현은 그 표현 자체로서 강한 외로움이란 정서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심해를 ...진홍빛이 포롱이고’는 ‘바람에 이는 잎새’에 비할 바가 아닌 비애의 감정을 전달한다. 그래서 박미서가 윤동주 같이 ‘괴롭다’는 표현은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현재 내면세계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면 두 시인이 무엇을 두고 괴롭다고 했느냐고 다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윤동주가 서시를  쓰고 19일이 지나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아니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구라파와 아시아 전역에서 온 인류, 나아가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이 죽어 나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동굴속의 천정에서 빗방물 떨어지는 소리의 방향으로 귀 기울어려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창 밖의 폭풍우 지나가는 소리와 조종소리가 동시에 귓전을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폭풍우 다음 가을을 알리는 백로白露, 하늘에서 서리가 내리면 꽃가람 길 가 풀들의 이슬은 모두 서리로 변한다. 윤동주는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이란 표현을 박미서는 “백로 온 맘을 창공에 한껏 두르고‘(7연) 라고 한다. ’백로‘란 한 단어가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다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로는 계절인 동시에 우주 공간이다. 윤동주의 후쿠오까 감옥 유리창에 흰서리가 깔고 덮을 때에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노래하며 울었을 것이다. 동주가 살던 시대와 미서가 살던 시대는 달랐다. 그러나 ‘모든 죽어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은 같아 보인다. 

내면의 세계와 우주 간에 소통을 하는 시

윤동주는 시의 끝에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라고 한다. ‘사랑’이란 표현을 ‘부끄럼’이란 표현과 대비 시킨다.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보면서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사랑해야지”로 이어진다. 윤동주의 시는 다분히 기독교적이다. 부끄럽고-괴롭고-사랑해야지로 이어지는 윤동주의 내면세계는 기독교적 정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 자기가 지금 박해 받고 있는 처지에서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인가.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에 철저히 하고 있는가? 윤동주의 사랑의 대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이 확실하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사랑의 대상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먼저 ‘어머니’ 외국 소녀들 ‘풍, 옥, 경,’ 그리고 ‘비둘기,’ ‘강아지,’ ‘노루’와 ‘사슴’ ‘토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프랜시스 잼’ 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등 외국인과 동물 까지 동경의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유학 시절 일본 친구들과 야외 같이 놀러 다니고 카페도 같이 갔다고 한다. 그는 제국주의를 증오했지 인간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미서는 다른 차원에서 사랑을 읽는다. 그것은 6연의 “침묵의 바람 맴돌다가 금그어지지 않는 폭풍우 속에서도 생생하답니다” 사랑의 목록을 동주 같이 나열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합일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2연의 “심해 속에서 포롱거리는 진홍빛”의 존재가 폭풍우가 지나간 다음(6연)에 더 생생해 지는 것을 보는 데서 자연으로서이 존재의 강력한 힘을 발견한다. 자연의 힘 자체가 사랑이란 말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고, 자연 자체가 사랑이란 말이다. 폭풍우가 지나가지 않으면 심해의 모든 존재는 죽고 만다. 바다의 혁명 그것은 푹풍우이다. 자연에 의한 자연치유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미움으로서 폭풍우 같지만 그것이 곧 치유였다.

박미서가 왜 ‘나는 괴롭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 졌다. 인간의 개입될 여지없는 자연 자체의 치유에서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연과 6연은 자연이 스스로 치유하는 그래서 절대적 외로움을 주면서 동시에 위로를 주는, 서로 대비되는 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온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 한 폭풍우의 힘과 심해에서 받아드리는 힘이 서로 간의 줄탁동시로 “한참을 풀어 둔 그 침묵의 안팎을 감아 돕니다”(8연)라고 한다. 시인은 폭풍우가 시작될 때와 지나 갈 때의 사이의 침묵의 시간으로 바라본다. 이를 ‘한참을 풀어 둔 침묵’이라고 한다. 심해의 안과 밖을 긴 침묵이 감아 도는 동안 자연은 스스로 파괴하고 치유했던 것이다.

박미서의  구체적인 동경의 대상이나 사랑의 대상도 열거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분명해 졌다. 

‘더없이’와 ‘하늘을 우르러’

박미서와 윤동주의 시 세계가 이렇게 같아 보이면서도 다른 이유는 시제 ‘더없이’와 ‘하늘을 우르러’의 대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윤동주의 ‘우르러’는 괴로움의 연장으로 구만리 장공 안으로 ‘더, 더, 더,..’ 무한을 향해 희구와 동경을 안고 치닫는다. 그의 ‘별 헤는 밤’에서 본 동경과 사랑과 연민은 모두 무한한 ‘하늘을 우르러’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의 언어로 보았을 때에 윤동주는 플라톤 적인 ‘가무한’의 시간과 우주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가무한’이란 끝없이 더 더 더... 셈해 질 수 있는 무한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한은 유한과 단절된 무한으로서 플라톤은 그러한 무한의 세계를 이데아계라고 했다. 자연과 그리고 현실에는 없는 무한이다. 중세기 사람들이 신이라고 말하기에 딱 좋은 무한이 ‘가무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무한을 부정하는 증명을 한 사람은 갈릴레오 이다. 어떤 무한이라는 직선이 있다고 하고, 그 직선을 유한한 직선에 일대일 대응을 시켜 보면 충분히 다 대응이 된다. 무한과 유한이 같다는 말이다. 무한대로 셈할 수 있는 무한도 있지만 1과 2 사이에도 1/2, 1/3, 1/4,....과 같이 무한히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무한은 유한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다고 칸토어는 말하고 이를 ‘실무한’이라고 했다. 

무한이 하나의 개념인 이상 인간 내면에서 그것을 유한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가무한’에 대한 ‘실무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동양적인 세계관은 오래 전부터 이런 실무한을 알고 있었으며, 모래 알 하나 속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고 했다. 박미서 시인이 시에서 ‘더없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실무한의 개념이다. 윤동주는 이를 가무한으로 ‘하늘을 우르러’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플라톤 적인 가무한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하늘을 우러러 가무한을 설정한다면 거기에는 인격적 존재 앞에 선 존재로서 절대고독을 느끼게 되고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된다. 윤동주의 별헤는 밤 같은 경우 가무한을 동경과 연민 같은 내면의 세계와 일치시키고 있고, 자기의 무덤 위에 이름을 적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서시에서는 공간이 무한대로 트인 하늘 공간 안에서 이는 바람에 윤동주의 괴로워했고, 박미서 시인은 동굴이라는 닫힌 공간안 물방울 소리에 있었다. 전자는 가무한 공간이고 후자는 실무한 공간으로 잘 대비되지 않는가?

바로 이렇게 무한을 내면의 실무한으로 받아 드릴 때에 비로소 미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처럼 작은 자극에도 괴로워하는 섬세한 주체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두 시인은 서로 다른 번지에서 읽고 있었다.  박미서의 실무한은 ‘더없이’에서와 같이 ‘더 더 더’가 아닌 현존재의 실존 자체가 신 자체이고 우주이다. 

그래서 절대적 외로움은 신 앞에 선 자아의 외로움이 아니고, 자연 그자체가 자기조직하는  절대고독이다. 즉, 심해와 폭풍우의 관계는 새로움인 동시에 심해를 자기 정화하고 재생을 주는 변화이다. '더없는 그대로의 축복처럼' 이러한 자기 재생적이고 스스로의 치유적인 것을 보내주고 있다.  

<창이 / 북미 남가주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