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미서의 시 '점, 심點心' 감상문 (2)‘점, 심’을 ‘점∙심’으로 읽기
[기고] 박미서의 시 '점, 심點心' 감상문 (2)‘점, 심’을 ‘점∙심’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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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30 17:15
  • 업데이트 2019.12.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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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잎은 ‘玄之又玄’, 현묘하고 또 현묘한 것 아닌가. 출처 : 픽사베이

점, 심點心 / 박미서

수많은 새들에게
열매 내준 팽나무 하나,
바라보는 이슬을 위해
켜 주는 외로움 부드러웠다

진초록잎들,
달라 보이는 단풍으로 눈부시게 내리면서
아무 두려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순례자의 청원의 그림자,
스스로 꿈을 이루어가는
억새풀 힘, 감싸듯 떠올랐다

아름다운 사람의
두 눈을 켜놓을 때처럼
고개 들어 보이는 것마다

하늘색 물보라 스치는 움직임
결핍없는 점들의 선물,
마파랑의 미로迷路 속
눈부시게 기이한 그물코

함초롬히 눈 뜨는
천사들의 귓속에서
사그랑사그랑...

내밀한 모든 뿌리빛 통하여
충만하게 강강술래 이루어,
네 따스한 슬픔이 일으키는
점 하나 갖게 되었다

무작정 있는 궤도의 點,
밝음의 심心,
한 덩어리 투명한 잎,
나뭇가지 살아내는
찬눈물의 쪽달 데려오리라

머리말

박미서의 시 ‘점,심’을 만약에 ‘점∙심’으로 읽는다면, 다시 말해서 콤마 , 를 점 ∙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시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감상문(1)에서는 인간 의식 내면의 구조와 전개 과정에서, 다시 말해서 의식 혁명 차원에서 감상했다. 이에 감상문(2)에서는 시제 ‘점,심’에 초점을 맞추어,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의 문제,’ 들뢰즈의 ‘유사와 상사의 문제,’ 그리고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라는 주제들과 연관시켜 감상해보려 한다. 그래서 감상문(2)는 시인의 의도에 맞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가 마침표 . 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푸코의 말년의 사상을 다 정리하는 것과 같이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푸코는 그 많은 책을 이 책 하나로 종합 한다고 했다. 만약 박미서의 시 ‘점∙심’을 푸코의 시도대로 위와 같이 배열하다면 시를 감상하는 흥미는 더할 것이다.

(푸코는 위와 같이 그림을 바꾸어 그렸다)

‘‘점∙심’도 바꾸어 표현하면

와 같다.

"∙은 점이 아니다” 라고 하면 마그리트가 제기한 문제보다 양상이 더 복잡해진다. ‘파이프’의 경우는 구상적으로 그림으로서 가능한 파이프을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는 그 자체가 구상적인 것도 비구상적인 것도 아닌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파이프는 부피도 질량도 있지만 ∙를 ‘점’이라고 정의할 때에 그것은 부피도 질량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박미서가 시를 통해 제기한 문제는 마그리트가 제기하려 했던 것 보다 한층 양상이 복잡해진다.

여기서 ‘∙심’ 이라 하는 경우와 ‘점∙심’이라고 하는 경우까지 더해지는 경우 지금까지 마그리트가 제기하려고 했던 논쟁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그리트의 작품과 박미서의 시를 비교 감상하기가 시작될 것이다.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문제'

소쉬르가 시 ’점∙심’을 감상한다면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점’과 ‘∙’과 ‘심’의 삼자를 두고 어느 것이 기표이고 어느 것이 기의인지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를 기표라 하고 ‘점’을 기의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의가 기표의 상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글자 ‘점’이란 기의 밑에 수많은 ∙를 두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은 기표를 기의보다 위에 두려 할 것이다.

사실 소쉬르와 라캉의 가운데서 박미서는 ‘∙심’이라고 함으로서 기표와 기의 문제를 ‘심’을 개입시킨 삼자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그러면 ‘점과 심’ 가운데 어느 것이 기표이고 기의인지를 결정할 수 없는 소위 ‘결정불능’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박미서의 시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이런 결정불능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하늘색 물보라 스치는 움직임
결핍없는 점들의 선물,
마파랑의 미로迷路 속

들뢰즈와 '유사와 상사의 문제'

들뢰즈가 박미서의 시를 본다면 ‘유사類似’와 ‘상사相似’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점’과 ‘∙’이 서로 유사냐 상사냐의 문제 말이다. 점과 ∙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종과 류의 관계로 종속하게 된다면 둘 사이는 ‘유사 類似’가 될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 사물 간의 관계와 같이. 어느 하나는 동굴 안에 있고 다른 하나는 동굴 밖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서양 철학의 지난한 문제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점이 ∙를 포함包涵하는 관계라면, 즉 물병에 물을 담듯이 병이 전체가 되고 물이 부분이 돼 일방적으로 담는 관계라면 유사이다. 실물과 그림자의 관계와도 같이.

'어느 순례자의 청원의 그림자'

그러나 만약에 점과 ∙이 서로가 서로를 포함包含하는 관계라면 상사相似, 즉 시뮬라크르가 될 것이다. 包含은 包涵과는 달리 설탕과 물의 관계와 같이 상호 담는 관계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바램일 것이다. 박미서의 시에서 점과 ∙을 유사 관계로 볼 것인지 상사 관계로 볼 것인지가 감상의 관건이 될 것이다.

'눈부시게 기이한 그물코'

유사와는 달리 상사는 그물코 같이 상호 연계망을 만드는 프랙털 현상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包含이란 그물코의 모양을 하는 서로 담고 담기는 관계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점과 ∙를 서로 包含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心’이다. ‘점∙심’에서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읽을 것이다.

진초록잎들,
달라 보이는 단풍으로 눈부시게 내리면서
아무 두려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나뭇잎이 ‘진초록잎’과 ‘단풍’일 때에 이는 유사인가 상사인가?

라캉과 “오브제 a"

라캉이 박미서의 시를 감상한다면 욕망과 ‘오브제 a’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점’은 ∙을 다 표현해내려 해도 양자 사이에는 간격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간격을 라캉은 ‘오브제 a’(대상 a)라고 했다. 이것은 순수 간격 그 자체이다. 이상과 꿈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현실 사이에서 생기는 간격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간격에서 ‘욕망慾望’이 생기게 된다. 도공이 이상적인 ∙라는 도자기를 만들어내려 한다고 하자. 아무리 공을 들여도 그 이상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때에 이상적인 것을 잡으려는 욕망이 생기게 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겨난다.

라캉 심리학에 ‘오브제 a’는 모든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점’과 ‘∙’ 사이에서 정신질환이 생긴다는 말이다. 박미서는 그 치료법을 알고 있다. 바로 ‘점∙심’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어느 순례자의 청원의 그림자,
스스로 꿈을 이루어가는
억새풀 힘, 감싸듯 떠올랐다

‘청원의 그림자’, 그것이 ‘오브제 a’가 아니겠는가? 욕망의 문제는 아래 노자의 도덕경에서 그 정점을 보게 된다.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노자는 ‘도’와 ‘상도’ 사이에서 ‘도가도비상도’라고 고민한다. 이는 ‘점’과 ‘∙’ 사이에서의 고민이다. 어느 것이 ‘도’이고 어느 것이 ‘상도’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여기서 큰 의미가 없다. 양자 사이의 괴리와 간격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도덕경 해설가들이 이 점을 간과했다.

노자는 상도와 도 사이에서 ‘欲 ’이 생긴다고 했다. 그래서 ‘상무욕이 관기묘, 상유욕이 관기요’라고 했다. 무욕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현묘한 것을 보게 되고, 유욕이면 눈에 보이는 요요한 것을 본다고 했다.

이는 라캉이 말하는 욕망이론과 다를 것이 없다. 라캉과 노자가 모두 이상과 현실적 것 사이의 간격에서 욕의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박미서는 욕이란 말 대신에 ‘심’이라고 했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두고 언급했다는 점에서 관점은 같다고 할 수 있다.

내밀한 모든 뿌리빛 통하여
충만하게 강강술래 이루어,
네 따스한 슬픔이 일으키는
점 하나 갖게 되었다

‘점’ 하나는 노자가 말하는 ‘현묘’함이 아닌가?

무작정 있는 궤도의 點,
밝음의 심心,
한 덩어리 투명한 잎,
나뭇가지 살아내는
찬눈물의 쪽달 데려오리라

‘투명한 잎’은 ‘玄之又玄’이 아닌가? 노자는 도를 하나의 실체로 보지 않고 ‘궤도軌道’로 보았다. 도는 멀리 간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되돌아온다. 도는 가고 오고 왕래할 뿐이다. 그러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밝음의 심心'과 '한 덩어리 투명한 잎'를 노자는 ‘현모지도’라 한 것이다. 그러나 도가 사상에서 ‘심’을 찾기란 힘들다. 나중에 들어온 불교는 현묘지도를 ‘심’이라고 본 것이다. 이제 ‘점∙심’을 도덕경 1장과 견주면서 서로가 서로를 감상하면 그 미감을 한층 더하게 될 것이다.

<창이 / 북미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