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진리는 멀고, 자유는 비싸다
그러나 진리는 멀고, 자유는 비싸다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7.08.07 22:22
  • 업데이트 2017.08.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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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리는 멀고, 자유는 비싸다
 

진리와 자유 진리의 바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자유, 아니면 두려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솔이가 닭 한 마리를 주둥이에 문 채 또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닭장은 난장판이었다. 기성을 지르며 횃대에 앉지도 못하고 벽에서 벽으로 점프하고 어떤 놈은 짚북데기에 대가리를 처박고 또 어떤 놈은 탈출하려다 벽 틈에 몸뚱이가 걸려 요란하게 날개를 치며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같이 산책할 땐 솔이 목사리를 풀어준다. 저도 자유롭고 싶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다행히 사모예드란 품종은 사람과 아주 친화적이라 ‘절대’라 해도 좋을 만큼 사람에게 입질하는 등의 공격성은 없다. 하여 안심하고 내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는 ‘풀린’ 솔이와 뒷산을 한 바퀴 돌고 마을로 들어섰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2-3분이나 되었을까, 주위 의식 않고 걷다가 문득 솔이를 찾으니 졸래졸래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던 솔이가 안 보였다. 아차, 여기는 마을이지, 싶어 되짚어 내달려 가보니 그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를 부유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대신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하동 시장에서 닭을 사면서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에서 철학의 효용에 대해 말하는 한 구절이 생각났다. 물어 죽인 닭 2마리, 죽어가는 닭 1마리, 도망가서 아예 ‘귀가’하지 않고 ‘가출’해버린 닭 6마리. 그리고 위자료로 소주 대병 1병. ‘아, 한 달 술값이 날아가는구나. 결국 자유의 대가는 닭 값 물어주는 것이다?’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물론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개의 야수성을 간과한 내 탓이지 자유의 탓은 아니다. 그리고 얽매임도 동물은 물리적인 구속이 문제가 될 것이나 인간은 ‘그 무엇’에 사로잡히는 의식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여튼 나는 태생적으로 그리고 찍은 발자국을 뒤돌아봐도 소유보다는 ‘자유인 지향’이었다. 자유란 ‘스스로 말미암음’(自由)이다. 행동준칙이 ‘스스로’에서 나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스스로’가 어떠해야 자유로워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1-32절)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예수가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진리가 자유롭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예수의 참 제자가 되면 된다. 참 제자가 되려면? 조건이 붙어 있다. ‘내 말에 거하면’. 이게 무슨 뜻인가?

성경은 한글판도 참 어렵다. 그 깊은 속뜻을 이해할 수 없음은 내 내공의 부족 탓이겠지만, 명색이 국어교사 출신인데 표면적인 뜻도 해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여 영문 바이블을 참고한다.

“If you continue in my word, you are truly my disciple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make you free."(Jn 8. 31-32.)

‘continue'를 거(居)한다고 번역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에 머무른다, 곧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헌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 목사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언정 예수의 제자로선 부족하다. 하여 진리는 멀고 멀어 자유는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하는 것만이 자유의 자격신청서가 아니겠는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에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석가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인기척에 방문을 여니, 단정한 차림의 건장한 두 청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면이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전도이겠지만 내가 그들을 맞는 것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한 달 있으면 이 친구는 감옥 갑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1년 6월의 정찰제 판결을 받았군, 익히 아는 내용이라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 악수를 했다. 별다른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아 식사나 한 끼 챙겨주고 싶었다. 나도 마침 점심때라 허출하던 참이었다.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터한 결정을 내렸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현실이 안타깝고 그들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분명한 건 그들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복무제가 시행되지 않는 현실과 종교적 신념의 충돌로 전과자가 되어야만 하는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한 청년이 자신의 맞은편 벽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돌아봤다. 액자 속에 성경 한 구절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장 7절)

이발관의 호랑이 그림처럼 가게들에서 자주 본 글귀였다.

언젠가 하릴없이 드라이브하는 내 승용차에 중년 승려 한 사람이 편승한 적이 있었다. 낯선 사이라 분위기를 눙칠 요량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말을 붙였다. 수행 정도를 가늠코자 하는, 오만한 법거량(法擧量)이 아니었다. 마침 성철의 『백일법문』을 곁에 두고 있던 터였다. 하여 잘하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갑론을설(甲論乙說)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다 싶은 탐심이 동했을 뿐이다.

하필 그때 그 승려의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여호와의 증인’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굳은 얼굴로 식사에만 몰두하자 그도 말문을 닫았다. 말없이들 식사를 끝냈다. 내가 계산을 하는 참에 그들은 커피를 뽑아들고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악수를 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잘 가게, 몸조심하고’

감옥 갈 청년이 닫은 승용차 문을 다시 열고 내렸다. 전송하려 머무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고 한참이나 미소만 지어보이다가, 되돌아섰다. 편안한 미소였다.

부러 꾸몄는지 정말 편안해서인지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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