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대화다" - 『부분과 전체』 『얽힘의 시대』
"과학은 대화다" - 『부분과 전체』 『얽힘의 시대』
  • 조송현 조송현
  • 승인 2017.08.08 17:31
  • 업데이트 2018.07.31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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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대화다" - 『부분과 전체』 『얽힘의 시대』

루이자 길더 '얽힘의 시대'의 저자인 루이자 길더가 미국의 한 TV 채널 토크쇼 'Spirit of the Berkshires'에 출연해 책을 소개하고 있다. /Vimeo 캡쳐

어제 한 페친의 ‘물리학자들의 수다’ 포스팅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면서 추억 속으로 인도했다. 세 명의 신사가 도시 한 가운데서 대화에 열중하는 사진과 함께 이런 설명이 달렸다. ‘내가 아는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말이 많다. 언제든 어디서나 물리 이야기로 바쁘다. 노트르담 사원 앞에서 사원을 구경할 생각 않고 길거리에 서서 이렇게 토론을 한다.’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 ‘물리학은 생각을 많이하는 학문인줄 알았더니, 말도 많군요.’ 조금 풀어 쓰면 이런 뜻이 아닐까 싶다. ‘물리학은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생각을 많이 하는 줄 알았는데 말도 많은가 보군요.’

댓글 페친의 눈에는 물리학자들이 ‘말이 많다’는 게 재미있고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말’보다 ‘대화’나 ‘토론’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평소 일상사에서 다변인 물리학자는 드물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팅의 제목을 내 멋대로 ‘물리학자들의 수다’라고 지은 것은 댓글 페친의 시각을 빌린 것임).

그러고 보면 필자도 대학시절 물리학을 주제로 대화인지, 토론인지, 수다인지를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학사주점이나 호프집(당시 켄터키치킨집)에서 다른 학과 친구들이 미팅 어쩌고 할 때 우리는 어김없이 물리학 얘기를 했다. 화제는 주로 전공과목의 주요 개념들이었다. ‘물리법칙은 왜 하필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될까?’도 여러 번 도마에 올랐던 것 같다. 맥스웰 방정식, 슈뢰딩거 방정식 등 물리학의 주요 공식과 수식들이 어김없이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들이 딱 떨어지게 풀리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대화거리가 더욱 많아졌다. 빛의 입자-파동 이중성, 입자의 간섭실험, 불확정성원리, 상보성원리 등. 양자물리학의 개념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기 때문에 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하숙집 친구들에게도 마치 물리전도사인양 ‘설교’했던 기억이 난다.

이즈음 우리가 바이블처럼 읽었던 책이 ‘부분과 전체’이다. 저자는 불확정성 원리의 창안자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이고, 번역자는 김용준 교수. 김 교수는 당시 ‘여자란 무엇인가’로 주목을 끌었던 김용옥 교수의 형이라는 사실도 이채롭게 느껴졌다.

‘부분과 전체’는 1920년대 양자역학 탄생부터 1960년대 소립자물리학까지를 다룬 저자의 자전적 물리학사이다. 난해한 물리학의 여러 개념들을 깨쳐나가는 과정이 생생하면서도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현대물리학에서의 ‘이해’의 개념 해석, 양자역학과 소립자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도 흥미롭다. 나아가 과학과 종교·정치와의 관계, 연구자의 책임을 다루면서 과학과 과학자의 사회적 관계 및 책임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만든다.

양자물리학을 대화로 재구성한 '얽힘의 시대'와 '부분과 전체' 표지.

‘부분과 전체’는 내용 못지않게 강조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과학은 토론’이라는 명제이다. 독일어 원저 제목도 '부분과 전체: 원자물리학을 둘러싼 대화(Der Teil und Ganze:Gesprache im Umkreis der Atomphysik)'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연과학이란 실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토론을 통해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주장을 증명하듯 저자는 본문의 거의 모든 내용을 과학자들의 대화와 토론으로 구성했다.

저자의 의도와 전략은 들어맞은 것 같다. ‘부분과 전체’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물리학자들의 대화·토론 장면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젠베르크 자신과 동료인 볼프강 파울리와의 ‘괴상망칙한 양자도약’에 관한 대화, 닐스 보어와 ‘이해’라는 개념에 대한 토론, 자신의 행렬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과의 토론, 슈뢰딩거와 보어와의 양자도약에 대한 토론 등. 이들 대화와 토론은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탁월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양자역학의 생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대화와 토론’ 방식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매우 낭만적이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소극장과 정원들로 가득찬 독일 괴팅겐의 하인베르크 산의 비탈을 지나 정상까지 걸으면서 원자물리학에 관해 토론하는가 하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스앨란드 섬까지 며칠간 도보여행을 하며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대화한다.

아인슈타인이 막 행렬역학을 창안한 하이젠베르크를 자택으로 초청해 과학이론에 대해 설교하듯 하는 토론, 보어가 자택에 파동역학의 창안자 슈뢰딩거를 초청해 며칠간이나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고문하듯 하는 토론도 청운의 물리학도에게는 더없이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최근 한 페친의 ‘물리학자들의 수다’ 포스팅은 이처럼 ‘부분과 전체’에 관한 많은 추억들을 소환했다. 그 소환에 기꺼이 응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양자론에 대한 글을 연재하면서 이 책을 다시 정독하게 된 것은 물론 ‘과학은 토론’이라는 명제를 내건 또 다른 멋진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루이자 길더의 ‘얽힘의 시대-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그것이다.

‘얽힘의 시대’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인데, 그동안 서재에 꽂아놓고 감상만 하다가 이번 방학을 맞으면서 집어들었다. ‘얽힘의 시대’는 원자물리학 혹은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대화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부분과 전체’와 같은 계보의 교양과학서라고 할 수 있는데, 몇 가지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얽힘의 시대'와 '부분과 전체' 표지의 속날개.

차별점 중 하나는 저자가 저명한 물리학자가 아니라 물리학과 학부 출신이라는 것. 이 대목만으로 독자들은 자칫 ‘책의 품질’을 저평가하는 섣부른 판단을 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과학 연구와 책 저술은 엄연히 다른 영역임을 확인시켜준다. 루이자 길더는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학자가 아니라도 훌륭한 과학교양서를 쓸 수 있다는 표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저자 루이자 길더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는 2000년 미국의 명문 다트머스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몇 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한 염소 농장에서 젖 짜기와 치즈 만드는 일을 했는가 하면,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인근 영화관에서 영사기사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을 하면서 8년간 자료를 모으고 책을 썼다는 것이다.

저자의 저명성 외에 차별점은 ‘부분과 전체’가 1920~1960년대에 걸친 양자론과 소립자물리학을 다룬 데 비해 ‘얽힘의 시대’는 1909~2005년에 걸친 양자물리학의 역사 중에서 그 핵심 개념인 ‘얽힘(entanglement)’ 혹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얽힘의 시대’는 ‘부분과 전체’의 후속편이자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양자 얽힘’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양자 얽힘의 대표적인 ‘현상’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두 물체가 양자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면 그 영향은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적으로 전달된다.’

이 같은 양자 얽힘 현상은 ‘상대성이론 위배-광속 초월’, 국소성 위배 등의 심각한 논란을 초래했다. 이것은 세기의 물리학 논쟁인 아인슈타인-보어의 ‘EPR 논쟁’을 판가름하는 현상이기도 한데, 그 결과는 아인슈타인 사후 1981년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얽힘 현상을 부정한 아인슈타인 패배였다. 양자 얽힘 현상은 오늘날 양자전송, 양자암호, 양자컴퓨터 연구 등 물리학계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 이 분야에서 여러 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론적인 연구 수준을 넘어 실용화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루이자 길더는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대화를 편지와 저서, 논문, 그리고 증언을 통해 되살렸으며, 마침내 20세기와 21세기 초의 양자물리학을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인지 '얽힘의 시대'는 독자로 하여금 마치 어느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토론하는 물리학자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새삼 ‘과학은 토론이다’ 명제가 새롭게 다가온다. 대가들과 비교하는 것은 외람된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학창시절 물리학 얘기를 많이 한 것은 아마도 나의 ‘이해’가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옳은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오류를 자각하고 교정하는가 하면 이해를 확신하고 강화하기도 했던 것 같다. 대화와 토론 자체가 중요한 공부였던 셈이다. 그 바탕은 물리학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자신있게 얘기하고 싶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물리학을 떠나 있다가 과학교양서 애독자이자 때로는 저자가 된 지금 ‘부분과 전체’, ‘얽힘의 시대’는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꽃혀 있다. 애독서를 넘어 이젠 저술을 위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흔히 글쓰기의 기본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다화(多話). 쓰고자 하는 소재와 주제에 대해 친구와 대화를 한 다음 시작하면 정말 글이 잘 나간다. 물리학처럼 어려운 개념을 일반인에게 설명하는 글은 더욱 그렇다.

‘얽힘의 시대’의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주요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일화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파동방정식의 주인공인 슈뢰딩거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을 미리 알 필요가 있다.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의 첫걸음인 박사논문을 완성한 기념으로 전 세계를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다. 아프리카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았던 곳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어머니가 그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멋진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순간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가로 떠났다.

양자 얽힘 현상을 알고난 다음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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