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세 가지 열정 : 사랑, 지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연민
러셀의 세 가지 열정 : 사랑, 지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연민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7.10.07 17:49
  • 업데이트 2017.10.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셀의 세 가지 열정 : 사랑, 지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연민

'빈곤의 경제' 표지, 그 저자인 사회비평가 에렌라이크, 괴짜경제학의 저자인 저널리스트 스티브 더브너와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브 레빗, 괴짜경제학 표지(왼쪽부터).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게 핍박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미운 짐이 되어버린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외로움과 궁핍과 고통 가득한 이 세계 전체가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비웃고 있다. 고통이 덜어지기를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나 역시 고통 받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볼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가난한 노동자들과 부유한 기업인 중에서 어느 쪽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은 기부와 후원을 하는 것일까?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풍요는 ‘거액의 퇴직금 보장’이라는 황금 낙하산(Golden Parachute)을 지닌 관리자들의 기부보다는 불운한 잡역부들의 희생에 터한 것은 아닐까?

바버라 에린라이크(Barbara Ehrenreich, <Nickel and Dimed>, 2001)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자선가들이다. 그들은 남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며, 다른 집들을 반짝반짝 완벽하게 만드느라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살고,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주식 값을 높여주려고 궁핍을 감수한다. 가난한 노동자에 속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익명의 기부자, 이름 없는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자본가들의 자선 사업은 경영의 일환일 뿐이다. 박민영(<인물과 사상> 2017년 6월호, 박애자본주의에 ‘박애’는 없다)은 자본가들의 자선행위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발겨 놓는다.

자본가들의 자선의 역사가 시작된 때는 19세기 말이다. 사기와 투기를 통해 철도・금속・석유 분야에서 자신의 제국을 건설한 카네기, 록펠러, 세이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업 현대화를 이룬 기업가로 자신들을 부각하려고 자선 사업과 자선 재단을 ‘발명’했다.

예를 들어 철강재벌 카네기는 US스틸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폭력배와 경찰을 사주해 기관총으로 쏴죽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복지재단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했다.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못 살게 되면 파업과 시위를 하며 반항하게 되고, 그러면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준 시스템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부자와 빈자를 조화로운 관계 속에 묶어두기’ 위해 자선사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자선사업은 본래부터 체제방어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자선사업을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금’ 정도로 여긴다.

두말하면 잔소리로,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사 도우미도 버스 기사도 필요하다. 대저택의 소유자도 대기업의 대표이사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이 사회의 존엄한 구성원들이다. 하여 적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남의 자식을 위해’ 자기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가사 도우미에게 걸맞은 보상을 해야 함이 더불어 사는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그리고 자본가들에게는 치부를 가리기 위한 자선을 요구할 게 아니라 ‘정의’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가진 자들에 대한 정의 요구는 간단하다. 세금 제대로 내라는 것이다. 이게 어려운 일인가?

자본주의의 승자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괴짜경제학』(스티브 레빗・스티브 더브너 지음/안진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펠트먼이라는 사람이 워싱턴에서 사무실이 밀집되어 있는 건물 휴게소에 베이글(빵) 상자와 돈 받는 바구니를 갖다 두었다. 무인판매 시스템인 셈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돈과 남은 빵을 수거했다.

회수율을 비교해 본 결과, 사람들의 정직성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규모가 작은 회사가 대기업보다 훨씬 더 정직했다. 100명 이하 사업장은 수백 명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에 비해 회수율이 3~5%나 높았다.

둘째, ‘직원들의 사기’도 정직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원들이 상사를 좋아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할수록 그 회사는 정직했다.

셋째,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부정행위를 더 많이 저질렀다.

이 세 번째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암시한다. 펠드먼은 세 개 층을 사용하는 한 회사에 수년간 베이글을 배달했는데, 그 꼭대기 층은 중역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고, 아래 두 층은 영업과 서비스 그리고 관리부가 일하는 곳이었다.

이 책에서는 중역들이 사용하는 층과 나머지 직원들이 사용하는 층의 회수율 차이는 아쉽게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중역들이 덜 정직한 것만은 사실이고 그 이유에 대한 해석이 아주 시사적이다.

펠드먼은 중역들이 자신의 지위에 대해 지나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고작 1달러인 베이글을 무전취식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뛰어난 경제학자인 저자들은 달리 해석했다. 베이글 무전취식은 횡령이나 다름없는 화이트칼라 범죄이다. 액수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하여 저자의 판단은 이렇다.

“어쩌면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중역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돈이 으뜸’인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수 조원의 재산은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청부(淸富)라 할 수 없다. 필립 슬레이터(이시은 옮김, <부 중독자>, 어마마마)에 따르면, 보유 재산이 100만 달러가 넘거나 연간 순소득이 5만 달러 이상이면 누구든 부 중독자로 봐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책은 1980년에 쓰였으므로 이 수치에 10을 곱해야 현재 달러 가치가 될 것이다. 하여 어림잡아 보유 재산이 110억 이상이거나 연간 소득이 5억 이상이면 능력이 출중하다고 보기보다는 부 중독자로 봐야 한다.

갑부가 공직자가 되면, 돈에 대한 욕심이 없기에 공평무사하게 공무를 처리할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회사돈으로 자택 수리에 30억 원을 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의 함의는 무엇일까? 갑부들은 채울 수 없는 탐욕 주머니를 차고 있든지 부 중독자가 아니라면, 조양호 회장의 배임 혐의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건희 회장도 배임 혐의로 경제개혁연대가 고발했다.

‘마음으로 수고하는 사람은 남을 다스리고, 힘으로 수고하는 사람은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 살리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 의해 먹여지는 것이 천하에 공통된 도리이다.’(<맹자>, 등문공편 상)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바로 『대학』에 나오는 ‘혈구지도’(絜矩之道)이다. 혈(絜)은 ‘헤아리다’ 혹은 ‘(무엇을) 자로 잰다’이다. 곧 나의 마음을 척도로 하여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리는 것이다. 곧 혈구지도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군왕이든 관리든 모름지기 이 ‘혈구지도’를 행할 수 있는 군자만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대적 해석으로 정치가들은 국민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해야 한다. 사원들이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삶을 사는데, 기업이나 주주의 안위에만 관심하는 기업가는 애당초 ‘힘으로 수고하는 사람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유지의 비극’은 필연으로 여겨져 왔다. 주인이 따로 없는 공동 방목장에선 농부들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소를 끌고 나와 먹인다. 개인적으로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방목장은 곧 황폐화되고 만다는 게 공유지의 비극의 경고이다.

엘리너 오스트룸(윤홍근,안도경 역, <공유의 비극을 넘어>, 랜덤하우스코리아)은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적 해결 방식, 시장적 해결 방식, 공동체적 해결 방식을 각각 소개하면서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국가와 시장은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할 수 없거나 그 성과는 미흡하다. 유토피아적 이념으로 치부될지언정 너와 내가 주인으로서 행동하는 공동체적 해결 방식만이 가장 유용하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상대방이 협조하려는 의지가 확인되면 언제든지 이에 협조로 응답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며, 다른 누군가의 행동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 자기 일처럼 나서서 이를 제어해내고자 하는 ‘이타적 유전자’도 가진 존재이다.

정치가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좌우되는 종속변수일 뿐이며, 기업가는 소비자의 사회의식에 일희일비할 뿐, 절대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는’ 독립 상수는 될 수가 없다.

역사발전에 저명인사들의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복잡다기해진 21세기에 사회 변화의 추동력은 단연 ‘일반 시민’이다. 더 중요한 건 우리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촛불 혁명’의 살아 있는 증거이고 주역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아주 당당하게 촛불 시민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역설하지 않았는가.

일제 식민사관의 농간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냄비 근성’이 얼마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인간은 생래적으로 장기간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생존할 수가 없어 스스로 내파한다. 그렇지만 적절한 우선순위를 정해 ‘적폐청산’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저명인사에 빚지는 일 없이, 뛰어난 사회활동가의 도움 없이도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가장 강력하지만 이름 없는 너와 내가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거기서 너와 나도 사람답게 행복 추구하며 살고, 그리고 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자손에게도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