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물들 무렵
단풍이 물들 무렵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7.11.15 23:28
  • 업데이트 2017.1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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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물들 무렵

지리산의 가을 지리산의 가을/박현영. 제15회 국립공원 사진공모전 우수상. 출처: 국립공원관리공단

단풍은 아름답다. 단풍이 물들 즈음 남녘의 산들은 옷매무새가 요란스럽지 않아 더욱 아름답다. 국도변의 샛노란 은행잎을 감상하다가 느릿느릿 하동공원을 오른다. 야트막한 동산의 공원길은 깔끔하다. 여름, 잡초 베기와 웃자란 조경수 가지치기에 흘린 땀방울의 고마움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전망대에 서면 섬진강이 푸르게 굽이쳐 흐르고 금빛 들판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강 건너 정정하게 푸른 소나무 사이로 점점이 붉고 노란 무동산이 포근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온통 선홍빛 단풍으로 지천을 물들이는 가을 내장산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어쩌면 사람을 위압할지도 모른다. 남녘의 가을산은 오래 묵은 친구 같다. 가을이 되어도 푸른 바탕에 고명처럼 단풍이 군데군데 붉고 노랄 뿐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단풍놀이에 나서는 사람들은 단풍이 아름답다고들만 한다. 싱그러운 잎새를 단풍으로 물들여 낙엽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나무들의 삶의 몸부림, 생존의 지혜일 뿐인 것을...

한겨울 추운 날씨에 밑동 발치의 땅이 얼어버리면 우듬지 잎가지까지 물을 공급할 수 없다. 한데 잎사귀에서 계속 증산蒸散 작용을 한다면 나무는 말라죽고 만다. 하여 고사하지 않기 위해 추위가 닥치기 전에 미리 잎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종즉시終則始, 끝은 곧 시작이라!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잎은 본래 뿌리에서 생긴 것이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낙엽은 뿌리를 덮어 얾을 막아주고 썩어 나무의 자양분이 된다. 제 몸 일부를 죽여서 새봄을 기약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수 있을까?

“나보고 부자 같다고 인사하던 그 주유소 사장이 생각나네요. 공원에 올라오니.”

돌아보니, 어느 새에 왔는지 ‘길벗’이 나를 보지 않고 내가 보던 방향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길벗, 얼마나 그리운 이름인가! 우린 울퉁불퉁한 나그네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목적지를 알까, 모를까? 목적지가 있기나 한 걸까? 저 모롱이를 돌면 저 산만 넘으면 ‘쉼터’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저만치 모롱이는 또 있고 산 넘어 산이 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렇게 허허로운 길에 길벗이 있다는 것,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론 치수 맞지 않은 길동무라면 앞서든 뒤서든 떨어져 허위허위 홀로 걷는 게 차라리 나그네의 무게 같은 것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길벗이라면 한솥밥을 먹든 따로국밥을 먹듯, 두동베개를 베든 먼데서 서로 제 이불을 덮고 자든,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새삼스럽게 부자 타령은. 5000평이 넘는 정원을 가진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나는 길벗이 부자임을 인정한다.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 못지않은 하동공원의 임자인데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매일 하동공원에 올라 주변 경치 두루 즐기고 뛰고 산책하고 운동기구로 체력을 다진다. 집은 들어가 사는 사람이 임자이다. 정원이든 공원이든 이용하는 사람이 임자인 것이다. 부자일 뿐 소유하지 않으니 세금도 한 푼 안 내고, 관리도 군청에서 다 해준다. 이보다 팔자 좋은 부자가 또 있겠는가.

“정말 내가 좀 있어 보여요? 운동복도 싸구려이고 운동화도 시장에서 산 건데...”

“이 사람아, 동네 뒷산 오르면서 히말라야 등반하듯 중무장하는 치들이 없는 사람이네요. 그 정도면 준수하다오, 길벗님.”

평소 같으면 내가 이런 식으로 눙치면 대화가 장면 전환을 한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계속 ‘부자’에 머문다.

“나보고 부자 같다고 한 그 주유소 사장 말이에요, 며칠 전에 돌아가셨대요.”

“그 선배가 하직을 했다고? 나보다 한 10년 윗길이니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중소기업 임원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귀향을 했다. 노후를 보내는 데 경제적으로는 별 부족함이 없을 듯도 한데 주유소를 인수했다. 알바를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이고 아내와 함께 주야로 교대를 하며 억척을 떨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친구는 그를 마뜩찮게 보는 듯했다.

길벗은 달포쯤 전에 말길을 튼 모양이었다. 공원 산책길에서였다. 어쩌다 한 번 공원에 운동하러 오면 그때마다 길벗이 운동하는 걸 보았다더란다. 하루는 스치는 결에 말을 걸더라는 것이다.

“매일 운동할 수 있으니, 사모님은 참 부자인 것 같습니다.”

길벗은 내게 이 말을 하며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미안한 듯 배시시 웃었다. 나도 길벗도 통장 잔고는 딸랑 딸랑, 자기 이름으로 된 등기부등본 한 부도 없다.

통장 잔고와 등기부등본으로 삶을 평가하는 게 온당한 처사일까? 통장 잔고가 쌓이고 자기 이름이 등재된 등기부등본이 몇 부인들, 운동할 시간도 내지 못하는 일상이 제대로 된 삶일까?

그 선배는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로 죽었다. 그런 죽음, 죽음은 삶의 끝일까, 삶의 완성일까?

공원 산책길을 몇 바퀴 돌다가 내려오면서 내가 말했다.

“우리, 부자로 살다가 가난하게 죽자.”

그러자 길벗은, “나는 부자로 살다가 부자로 죽고 싶네요.” 라고 하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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