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8>누구를 위한 경제학인가?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8>누구를 위한 경제학인가?
  • 김 해창 김 해창
  • 승인 2017.12.19 13:25
  • 업데이트 2017.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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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8>누구를 위한 경제학인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왼쪽)와 슈마허. 슈마허는 ‘평화와 영속성’이란 개념을 사용해 주류경제학인 케인스 경제학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출처: BBC, 새로운 경제학을 위한 슈마허 센터.

우리는 늘 뉴스에서 ‘경제를 살리자’ ‘경제에 올인한다’는 정부나 지자체, 기업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제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아직도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올해 3만 달러에 진입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우리 가정경제를 생각하면 남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 즉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는 어느 정도 수준이 적절한가? 그리고 우리의 개인경제는 어느 정도에서 기본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충족해야만 하고, 또한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연구와 공감이 필요할 것 같다.

가령, 현재 우리나라 국가경제에서 사회 약자는 소외되고 있다. 노동자의 권익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며, 대기업이나 고소득자에 대한 조세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양극화는 심각하다. 국가경제는 오로지 대기업의 경제로만 연결되는 모양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서 병든 가족이나 직장이 없는 식구가 있다면 다른 가족이 이들을 경제성이 없다고 나 몰라라 할 것인가?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가정경제 단위가 모여 지역경제가 되고, 나라경제가 된다면 지금의 ‘승자’ 독식의 경제학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E.F.슈마허 사상의 핵심에 들어가 보자. 슈마허는 ‘누구를 위한 경제학인가’ 묻고 있다. 그는 주류경제학이 당연시 하는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화폐경제의 문제점과 GNP의 허구에서부터 출발한다. 경제학의 역할이 성장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역설하면서 말이다. E.F.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현대사회의 치명적 오류 중 하나가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성과에 힘입어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환상을 낳았으며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자본을 자본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슈마허는 ‘인간이 만들 수 없고 단지 발견할 뿐이며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irreplaceable) 자연’을 ‘자연자본’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석연료를 소득이 아닌 자본으로 취급한다면 보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이 대체불가능한 자산의 판매대금을 특별기금으로 적립해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거나 아주 적은 정도만 거기에 의존하는 생산방법과 생활유형을 개발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E.F.슈마허의 자연자본 개념은 당시 산업 일변도로 달리던 사회에서 무제한으로 소비되던 화석연료를 소득이 아닌 자본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앞선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슈마허는 ‘인간의 본질은 국민총생산(GNP)으로 측정될 수 없다’, ‘통계는 결코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 한다’며 오늘날도 문제가 되고 있는 GDP 중심의 경제성장론과 통계적 허구를 지적했다.

E.F.슈마허는 새로운 생산방법과 새로운 소비생활을 동반하는 새로운 생활양식, 즉 영속성(permanence)을 위해 고안된 생활양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한 사례로 농업과 원예업의 경우 생물학적으로 건전하며 토지를 비옥하게 하고 건강, 아름다움, 그리고 영속성을 산출하는 생산방법을 완성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면 생산성도 그 뒤를 이어 상승할 것이다.

제조업에서는 소규모 기술, 비교적 비폭력적인 기술, 인간의 얼굴을 가진 기술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집중시켜 임금을 위해서만 일하고 여가시간에만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경영과 인간의 동반자관계에 대한 새로운 형태나 공동소유 형태에 관심을 집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적정기술’ ‘종업원지주제’ 등의 개념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영속성 개념은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E.F.슈마허는 ‘평화와 영속성’이란 개념을 쓰면서 주류경제학인 케인스경제학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케인스는 “윤리적 고려는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방해요인이기도 하며 옳은 것이 제대로 대접받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보편적인 풍요가 가능하며, ‘네 자신을 부유하게 하라’는 물질주의철학에 기대어 거기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E.F슈마허는 이 같은 케인즈의 주장에 대해 첫째, ‘충분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슈마허는 ‘경제성장이라는 게 경제학, 물리학, 화학, 기술 등의 관점에서 보면 뚜렷한 한계가 없지만 환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장애요인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러한 해결의 결과로서 열 가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부를 충분히 손에 넣을 때까지 한없이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관점은 ‘기본적인 자원의 이용 가능성과 경제성장에 따른 간섭에 환경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고 덧붙인다. 둘째, 탐욕이나 이기심을 이용해서는 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역설한다. 케인스가 ‘경제적 진보는 종교와 전통적인 지혜가 언제나 거부하도록 가르치는 인간의 강한 이기심을 이용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한데 대해 슈마허는 ‘탐욕이나 시기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상실하며, 그래서 그 성공은 곧 실패가 된다. 사회 전체가 이런 악덕에 오염된다면 놀랄만한 일은 해낼 수 있어도, 일상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점점 더 해결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한다. 케인스로 대표되는 주류경제학에 대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지혜의 핵심은 영속성이며, 영속성을 위한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슈마허는 “간디가 말했듯이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타당하다”며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슈마허는 영속성을 위한 경제학은 과학과 기술의 근본적인 재편성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만큼 값이 싸고, 소규모 이용에 적합하고, 인간의 창조적 욕구에 부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인간의 창조적 욕구에 부합될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생산과정이 단순한 기계적 행위로 바뀜으로써 노동으로부터 인간다움을 빼앗는다면 인간은 대체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 자신은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의미가 약화된다고 지적하며 노동의 인간화를 강조했다. 슈마허의 경제학은 결국 ‘인간회복을 위한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회복을 위한 경제학은 ‘노동의 인간화’, ‘평화와 영속성, 즉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풍요 속의 빈곤’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슈마허의 지적한 이러한 경제적 관점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경제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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