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6>은발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6>은발
  • 김창욱 김창욱
  • 승인 2018.01.12 10:58
  • 업데이트 2018.0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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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6>은발
 

<은발>의 작곡자 당스(왼쪽)와 이를 노래한 바리톤 윤치호.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이랴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오! 내 사랑하는 님, 내 님! 그대 사랑 변찮아

지난 날을 더듬어 은발 내게 남으리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이랴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은발>(Silver Threads Among the Gold)은 렉스포드(Eben E. Rexford 1848-1916)가 쓴 노랫말에 당스(Hart Pease Danks 1834-1903)가 선율을 얹은 것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실린더식 축음기에 최초로 녹음된 노래 가운데 하나이며, 1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의 주요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 노래를 까까머리 중학시절, 외가에 가서 처음 들었다. 평강천(平江川)을 사이에 두고 대저의 우리집과 강동의 외가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우리집과는 달리 논밭뙈기가 얼마 되지 않았던 외가는 딸린 식솔도 많았다. 게다가 외가는 일찍이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홀라당 태워 먹은 적이 있어서 늘 가난해 보였다. 명절날, 우리집에서 이순신 장군 몇 개나 학이 날아가는 500원 짜리 동전을 절값으로 받을 때 외할아버지는 기껏 다보탑 서너 개로 때우는 일이 태반이었고, ‘내가 이러려고 절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없지 않았다.

외가에 갈 일은 크게 없었으나, 우리 또래의 막내 외삼촌과의 장난질이 그리워 늘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외가에는 우리집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도 있었다. 파란색 통기타와 포터블 카세트 등이었다. 이때 기타줄을 몇 차례 튕겨 보았는데, 그 울림이 왠지 슬프고 우울한 느낌이었다.

또한 포터블과 한 짝을 이루는 카세트 테입도 있었다. 외국노래 전집이었다.여기에는 단선율로 된 노래 악보와 가사, 그리고 노래를 부른 성악가의 사진과 프로필 등이 담긴 책자도 딸려 있었다. 카세트 테입 하나에 양면 각 8곡 정도의 노래가 실렸고, 노래는 한국어 가사로 불려졌다.

학교에서 배운 노래도 있었지만, 처음 듣는 노래도 많았다. 그 가운데 처음 들었던 <은발>은 바리톤 윤치호(1938-2007)의 음성으로 녹음되었는데, 목소리가 탄력적이어서 좋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돌려감기하며 들었다. 특히 왠지 처연한 노랫말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아, 추억이라는 게 있구나. 나이 들면, 윤기 흐르던 머리가 자취 없어지고, 젊은 시절의 추억도 한갓 헛된 꿈이 되고 마는구나.’

결혼식마다 주례 선생님의 말씀은 한결같다.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 검은 머리가 왜 파뿌리가 되지? 언젠가 파뿌리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초췌하고 파리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노안(老眼)이 적어도 쉰에 이르러서 오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야 늙음‘老’에 값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40대 초반에 오고 있었다. 매우 기분 상하게 하는 불청객이었으나, 불청객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나자, 머리통은 온통 흰 머리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염색해야 할 시점이었다. 젊어지기 위해서, 아니 나이 들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아니, 사회적 지위와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월 3회의 염색, 여간 귀찮은 의식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퍽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빠진 머리 몇 올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이도 없지 않은데, 염색할 머리가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직까지는.

은발 https://youtu.be/_7Qqe28lA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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