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사랑을 묻다
길에서 사랑을 묻다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8.01.15 00:04
  • 업데이트 2018.0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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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사랑을 묻다

가을 코스모스만큼 그리움을 자아내는 꽃이 또 있을까? 출처: 하동 북천 코스모스 축제 홈페이지

어느 임금에게 외동딸이 있었다. 그 딸이 심한 병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다. 의사들은 묘약을 쓰지 않는 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그래서 임금은 딸의 병을 고쳐주는 자에게는 그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다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법을 지닌 망원경으로 그 포고문을 보았다. 그리고 임금의 딸을 가엾게 여기어 어떻게 해서든 공주의 병을 고쳐주자고 형제들과 의논을 하였다.

형제들 중 한 사람은 마법의 양탄자를 가지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마법의 사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과를 먹으면 어떤 병이든 다 낫게 된다. 세 형제는 왕궁을 향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갔다. 공주에게 사과를 먹게 했더니 그녀의 병은 정말 거짓말 같이 깨끗이 나았다. 임금은 매우 기뻐하면서 연회를 베풀고 새 왕위 계승자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맏형이 말하였다. “내가 마법 망원경으로 포고문을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곳에 올 수 없었다.”

둘째가 말하였다. “만약 마법의 양탄자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먼 곳까지는 도저히 올 수 없었을 거야.”

셋째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쨌든 마법의 사과가 없었더라면 공주의 병을 낫게 할 수는 없었지.”

만일 당신이 왕이라면 이 세 형제 가운데 누구를 사위로 삼겠는가?

셋째이다. 양탄자를 가지고 있던 둘째는 여전히 그 양탄자를 가지고 있다. 망원경을 가지고 있던 첫째도 여전히 그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과를 가지고 있던 셋째는 그 사과를 주어버렸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모든 것을 공주를 위해 주어버린 것이다.1)

그리움, 참 정감어린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그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그리움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리움은 애잔한 ‘가슴앓이’와 짝을 이룬다.

푸르디푸른 날에도 살아내기가 겨울 때가 있었다. 그럴 적엔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타인의 도리 없는 노쇠와 뜻밖의 횡액이란 절망에서 내 절망의 탈출구를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이런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행위는 대체로 만족스런 결과를 주었다. 푸른 잎새 몇 무참히 떨어져 나가고, 잔가지 몇 부러져도 60년 아름드리 소나무로 건재하니까.

가슴앓이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리운 사람의 따뜻한 위무의 손길만이 약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 그리움이 병인病因인 것을. 기적을 남기며 멀어져 가는 기차에 손을 흔드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으로 가슴앓이는 치유되지 않는다. 저들의 애잔함이 내 애잔함에 더할 뿐이다. 대합실에서 행복에 겨운 재회의 포옹을 목도하는 것으로 가슴앓이는 누그러지지 않는다. 그리움만 더할 뿐이다.

사람으로 인한 가슴앓이는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 친구와의 약속 시각은 두 시간 여 남았다. 5km 상거의 이웃 양보면에 사는 이모님 댁으로 차를 몰았다. 찾아 뵌 적이 제법 되었다. 띠동갑인 형님도 한 번쯤은 찾아보는 게 인정이려니.

“엄마는 잘 계시고?” 동생의 안부부터 물었다. 95세의 이모는 아직도 허리가 꼿꼿했다. 세월이 몇 십 년 전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엄마는 무탈하게 잘 있다고 하자, “하모, 네 엄마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엄마는 84세이다. 이모의 입장에서는 11살이나 어린 동생이 응당 팔팔해야 할 터였다. 역시 삶에는 절대 영역이 없다. 동쪽 끝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모두 서쪽으로 보일 것이다. 형님이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냈다. 간만에 만났는데 맨입으로야 보낼 수 없다며 무어라도 입요기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이런 형님이 살가운 인정미를 바라고 이모 댁 걸음을 했는지도 모른다. 형님이 음주운전을 저어해 딱 한 병씩만 마시자고 했다. 이모의 따뜻한 눈길, 형님과 정담을 안주한 수작酬酌, 친구와의 약속만 없었더라면 날밤을 새웠을 것이다.

친구는 이미 화개장터 인근의 ‘다오실’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약속 시간 10분쯤 전에 도착해 ‘기다리는 사람’의 몫을 감당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이모의 따뜻한 손이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당신의 동생이 좋아한다는 곶감을 챙기랴, 겨울에는 무가 동삼이라며 무트로 안기는 무 보따리 실으랴, 아무튼 몸 성히 엄마를 잘 모시라는 이모의 긴 사설을 들으랴 늦은 탓이다. 아우님이 찾아줘서 고맙다는 형님의 치사를 서둘러 작별 인사로 도중에 자르지 않았다면 더 늦었을 것이다.

친구는 얼굴 근육을 최대한으로 동원한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그러나 어쩐지 그 웃음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분위기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일행은 없는 듯했다. 며칠 전 큰아버지의 장례식 참석 차 고향에 들른다며 만나고 싶다고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동기로서 서로 알고 지내던 터수가 있어 반가웠다. 그러나 전화기 저쪽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마냥 반가워만 할 수도 없어 좀 난감했다. 물론 짚이는 데가 없는 바는 아니었다. 아직 연옥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는가?

친구는 50대 초반에 서울시청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시골 고등학교 출신으로서 9급 공무원으로 출발했으니 대단한 출세였다. 물론 서울의 모 대학 야간 법학과를 다녔다고는 했다. 그 무렵 서울 간 결에 몇몇 동기들과 연락이 되어 소동창회 비슷한 모임이 되었다. 그 친구도 참석했다. 1차 2차를 끝내고 그 친구와 단 둘이서 3차를 했다.

괴롭단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다짜고짜로 나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듯 소리쳤다. 축하한다며 집중되는 동기들의 술잔을 환하게 웃으며 잘도 받아 마시더니 과음을 했나?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느낌이 다르다. 뭔가가 있다. 단순한 술주정이 아님을 직감했다.

어쩌랴, 소우주와 소우주가 만나서 순행함이 어차피 지난한 일인 것을. 죽자 살자 사랑했던 아내는 세월과 더불어 자기기 그린 사람과는 한참이나 멀어져 갔다. 새 구두 신은 사람이 진창길 피하듯 시가 식구들을 사위한다. 시부모는 물론 남편의 형제자매까지 아예 집에 들이려 하지 않는다. 신심이 도타워서라면 좋으련만 제사를 안 모실 핑계거리로 교회에 나간다. 농투성이 아버지 어머니의 거친 나무토막 같은 손이 안쓰럽다. 7년 전 사무관 승진했을 때 그 좋아해 주던 형제들이 눈에 밟힌다. 아, 어쩌란 말인가!

친구의 이름은 현우이다. 賢자와 愚자를 쓴다. 아내를 택하든 부모형제를 택하든 ‘현명함’과 동시에 ‘어리석음’일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지 않음은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뒤섞임이리라. 몸부림으로 통음으로 이성 줄을 놓아버린 현우에게 한가한 이름풀이를 할 계제는 없었다. 나 또한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우리 둘은 짐짝처럼 호텔로 옮겨졌고, 다음날인 일요일 정오 무렵에야 눈을 떴다.

“현우야, 네가 아내를 선택했든 부모를 선택했든, 아무 선택을 하지 않았든 네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서울 남부터미널로 직행하는 버스에 오르기 직전 악수를 건네며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씩 웃었다. 그러면서 악수한 내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쓸쓸한 아우라가 아련히 피어오르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은 남도대돌아오는 길은 남도대교를 건넜다. 늘 화개에 갈 때는 가는 길은 경상도 하동 길, 돌아올 때는 전라도 광양 길을 선택한다. 가속기를 밟았다. 차는 살걸음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 곳에 미리 작정이라도 한 듯 스르르 차가 멈춘다.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상 수상작 『유키구니』(설국雪國)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또렷이 생각해 내려고 조바심을 내면 낼수록 종잡을 수 없이 희미해져 가는 신통찮은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촉감으로 지금도 젖어 있어서 자신을 멀리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별스런 풍광이 있는 곳도 아니다. 인적이 드물 뿐이다. 그러나 항상 이 길섶에서 그 사람을 추억했다. 미소를 보고, 목소리를 듣고, 살살이꽃 이야기를 되새김질했다. 하여 야스나리는 손가락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지만, 난 이 장소가 그 사람을 기억한다.

코스모스의 우리말 이름이 살살이꽃이다. 가늘디가늘지만 Cosmos, 곧 우주이다. 코스모스처럼 가녀린 그 사람의 눈동자 속에 우주가 통째로 들어 있다. 그리움에 가슴앓이를 할 정도로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을 가진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인가?

※1)마빈 토케이어/신현미 옮김, 『탈무드』(도서출판 다모아, 1993),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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