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8>부라보콘
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8>부라보콘
  • 김창욱 김창욱
  • 승인 2018.02.02 10:48
  • 업데이트 2018.0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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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욱의 '나를 적시고 간 노래들' <18>부라보콘

1970년대 톱 탤런트 정윤희가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 출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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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보콘은 1970년 해태제과에서 처음 나온 아이스콘이다. 어릴 적 흑백 TV를 볼라치면, 12시에 용두산공원에서 만난 처녀총각이 부라보콘을 핥아먹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스콘을 받쳐 든 연인의 얼굴은 티끌 하나 없이 해맑았고, CM송은 달콤했다.

우리집 3남 1녀 중의 장남인 큰형은 언제나 똑똑하고 반듯한 모범생이었고, 공부면 공부, 그림이면 그림, 축구면 축구...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재능을 타고 났다. 그런 까닭에 큰형은 언제나 우리집 대표선수였고, 엄마 또한 대견한 아들을 항용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큰형이 총명하다는 소문은 이내 동네방네 퍼져 나갔고, 서너 살이나 많은 동네형들로부터 금세 그들과 동급으로 인정 받았다.

큰형이 동네에서 범털로 인지도를 한껏 높여갈 때 작은형과 나의 존재는 고만고만한 깃털에 불과했다. 동네 사람들이 엄마를 부를 때도 큰형 이름을 따서 ○○엄마라고 불렀고, 우리는 ○○동생이라 해야 겨우 고개를 끄덕여 줄 정도였으니까. 큰형과 달리, 동생들은 집안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았다. 명절 때 세뱃돈 액수가 달랐고, 큰형에게 사준 옷은 으레 작은형에게 물려지고, 그것은 다시 내게 물려졌다. 더 이상 물려줄 곳이 없었던 나는 늘 물려받은 옷이 닳아빠지도록 입어야 했다.

본디 동네 이름이 유풍도(有風島)라 그랬을까? 동네형들이 대체로 헛바람끼가 좀 있었다. 아들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마뜩찮게 여겼던 엄마는 큰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대처(大處) 양정으로 유학을 보냈다. 고래가 망망대해(茫茫大海)를 헤엄치듯 범털은 골짜기 깊은 산속을 누벼야 하니까! 마침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실행한 셈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야 했던 큰형은 결코 만만한 생활이 아니었으리라. 우연히 훔쳐 본 일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던 버스가 헐떡이며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멈추었다. 한 입에 나를 꿀꺽 삼킨 버스는 다음 정류소에서 나를 토해 낼 거다. 다시 두어 차례 다른 버스로 갈아타면 마침내 이모집에 도착할 거다. 나는 버스에 오르기 싫었다. 엄마와 헤어지기 싫었다.’

가끔씩 큰형이 집에 올라치면, 촌티 나는 동생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한 아름 사 왔다. 그간에 아껴 모은 용돈으로 바꾼 것이리라. 박수동의 울퉁불퉁한 고인돌 만화가 실린 어린이 월간지 ‘어깨동무’, 새콤달콤한 환타, 맛동산이나 새우깡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동생들이 큰형을 만나러 대처로 나갈 기회도 있었다. 맨 처음 큰형이 동생들을 데려간 곳은 초읍의 어린이회관이었다.

‘어린이회관? 그렇다면 어린이들이 여기에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란 말이지? 커다란 방에서 내 또래 아이들이 넓다란 책상 앞에 빙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지? 누가 내게 말을 시키면 어떡하지?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지?’

그런 한편으로 ‘역시 도회지라 뭔가 다르기는 다르구나. 아이들이 회의를 하다니...’ 나는 곧장 주눅이 들었다. 어린이회관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나는 연신 두리번거렸다. 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어쩌지? 아무 말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어린이회관까지 갔으나,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는 어린이회관을 나왔다. 여기저기 오똑하니 서 있는 간이매점, 모이를 줍다가 화들짝 날아오르는 비둘기, 하늘 높이 떠 있는 풍선 따위가 눈에 들어왔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고함소리가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큰형은 어린 동생들에게 부라보콘을 하나씩 사 주었다. 촌에서는 뭉툭한 모양의 아이스케키 밖에 없는데, 이리도 요상하게 생긴 얼음과자가 다 있다니. 난생 처음 먹어보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맛이기도 했다. 우리는 희디 흰 아이스콘 입자를 입술에 묻혀가며 먹었다. 아껴가며 핥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부라보콘은 여지껏 촌에서 먹던 아이스케키와는 가위 비견될 수 없었다. ‘역시 대처에는 맛 있는 게 참 많기도 하다’고 여기며, 나도 엄마한테 졸라서 어서 대처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부라보콘을 핥아먹으며,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을 난생 처음 느꼈다.

부라보콘 https://youtu.be/4LJABmpYM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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