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0>허균과 매창의 러브스토리㊦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0>허균과 매창의 러브스토리㊦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18.04.04 10:31
  • 업데이트 2018.04.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0>허균과 매창의 러브스토리㊦

허균 영정. 출처: 강원도 강릉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내 기념관.

매창 죽음 이후 허균의 삶

허균은 당대에 천대받던 기생뿐 아니라 신분 때문에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던 서얼 등과 정신적인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신분적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평생의 벗으로 여기고자 했던 매창은 허균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은 시 창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은 진심으로 애도하는 헌시를 지었던 것이다.

허균은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597년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20여 년의 관직 생활 동안 파직과 복직이 되풀이되었다. 공주목사로 있으면서 파직되기까지 8개월 동안 심우영과 이재영 등 서자들을 공주 관아에 불러 함께 생활하였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허균의 관직 생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기생이다. 허균이 처음 파직된 것은 “서울에서 창기들을 불러 모아놓고 따로 관아까지 만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1604년의 실록에는 “일찍이 강릉 땅에 갔을 때 기생에게 혹해 그의 어머니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허균 문집에는 그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는 기생 매창을 비롯해 다양한 기생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에게 매창은 특별한 존재였다. 허균은 매창이 세상을 떠난 해인 1610년,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탄핵을 당하여 전북 함열로 유배된다.

허균은 유배지에서 문집 『성소부부고』를 엮고, 1612년(광해 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하는 동시에 민중을 위한 소설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홍길동은 서얼이지만 재능이 탁월하였다. 탐관오리들뿐 아니라 부패한 사찰의 중들에게도 벌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재물을 약탈하여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준다. 게다가 신분적 위계가 없이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율도국’이라는 나라까지 세운다.

소설을 쓴 이듬해인 1613년에는 허균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강변칠우’ 또는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는 사건이다.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을 강탈한 사건이다. 칠서(七庶)는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으로, 모두 서자였다. 이 사건은 역모로 조작돼 서자들의 죄를 다스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 출처: 강원도 강릉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내 기념관.

7명의 서자 가운데 심우영은 허균의 제자이기도 할 정도로 허균은 평소 이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허균은 서얼의 후원자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당시 대북 정권 최고 실세이자 동문수학했던 이이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이첨의 후원 속에 허균은 인목대비 처벌을 강경하게 주장함으로써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광해군은 이런 허균을 신임하면서 호조참의·형조참의를 거쳐 좌참찬의 벼슬을 내린다. 허균은 1614년과 1615년 명나라에도 두 차례나 사행으로 다녀온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의 연장선상이었다.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은 물론 남인계의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정치적 이슈였다, 허균과 함께 정치적 노선을 함께 하였던 영의정 기자헌 역시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의 고변 상소로 허균은 궁지에 몰린다.

1617년 12월 기준격은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허균이 즉각 반박 상소를 올렸지만, 인목대비 폐출을 반대하던 각지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탓에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거기에다 1618년(광해군 10년) 8월 10일 남대문에 격문이 붙었다. 이 격문은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인 현응민이 한 짓이라고 알려지자 허균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허균은 죽는 순간까지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침내 허균은 1618년 8월 24일에 현응민·우경방·하인준 등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되면서 한 많은 50세의 생애를 마쳤다.

허균은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 서학 등에까지 두루 관심이 깊었다. 세상을 바꾸려다가 오히려 부메랑을 맞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당시 조선사회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여러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며, 성리학의 이론논쟁에서 벗어나 하층 민중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선지자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매창 사후 2년 만에 평등세상을 희구하며 <홍길동전>을 쓴 이유가 시적 기량은 뛰어났지만 서녀로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간 그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필자의 허황된 생각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