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24>‘발전(Development)’이란 무엇인가?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24>‘발전(Development)’이란 무엇인가?
  • 김 해창 김 해창
  • 승인 2018.04.10 11:27
  • 업데이트 2018.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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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24>‘발전(Development)’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 출처: 위키피디아

E.F.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정말 ‘발전’이란 개념이 궁금하다.

도대체 ‘발전(Development)’이란 말은 언제부터 생긴 말일까? 『발전에서 살아남기』(민음사, 2015)의 저자인 프랑스파리11대학 경제학 명예교수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는 독일의 생태주의자 볼프강 작스의 글을 소개하면서 ‘발전’이란 말의 역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20일 미국 의회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기조연설을 통해 세계 대부분의 지역을 ‘저개발(Under-Development)’ 지역으로 규정했다. 남반구 생활방식의 무한한 다양성을 ‘저개발’이라는 유일한 범주로 쓸어 넣는 개념이 그 때 태어났고 그 뒤 한번도 이의제기를 받지 않았다.

이 개념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발전이라는 동일한 노선을 따라야 하고, 발전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갈망해야 한다. 보다 거대한 생산이 번영과 평화의 열쇠라며 이러한 유토피아모델로 미국을 들고 ‘산업활동’과 ‘생활수준 향상’ 덕분에 ‘민중의 고통’을 제거할 기술지원프로그램을 남반구에 제안했고, 북반구를 따라잡기 위한 남반구의 질주가 시작됐다는 말이다.

세르주 라투슈는 또한 호주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의『위기의 인간』(L'Homme en pe′ril, 1975)을 인용하면서 개발( 발전)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나의 지역을 개발한다는 것은 대상 지역의 모든 자연 식물을 과격한 방식으로 파괴하고, 그런 식으로 파헤쳐진 땅을 콘크리트로 뒤덮거나 주차장을 위해 잔디로 뒤덮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공간이라도 남아 있을 경우 그곳에 콘크리트벽을 다지거나, 작은 개울을 둑으로 만들고, 그 모든 것을 살충제로 황폐화시키고, 그런 다음 그것을 도시화되고 멍청한 일부 소비자에게 가장 비싼 가격에 파는 것을 뜻한다.

볼프강 작스를 비롯해 세라주 라투슈 등이 참여한 ‘발전에 대한 문화적 대안 국제네트워크(INCAD) 선언문은 오늘날 잘못된 발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1992년 5월 4일 캐나다 퀘벡주 오포드에서 ‘발전의 종식’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첫째, 발전프로젝트를 위해 남반구 국가들이 진 보든 빚을 1년에 20%씩 점진적으로 탕감할 것, 둘째, 북반구 국가에서 1인당 소득을 1960년 수준으로 축소할 것, 셋째, 적절한 수단을 통해 석유의 무제한 사용을 중지할 것, 넷째, 10만년 만기의 모든 핵발전소 프로젝트를 취소가능한 속도로 사용 전력량을 줄일 것, 다섯째, 국민 국가의 발전을 독려하고 지지하는 글로벌 교육모델을 해체하고 문화적, 자연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지역공동체의 교육시스템을 활성화할 것을 제시했다.

이어 여섯째, 남반구에서 발전이 불러일으킨 피해문제를 놓고 사회 직능별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발전 및 GDP의 허구성이나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는 교육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 일곱번째, 발전담당 부처의 모든 지원을 지식 습득과 쇄신, 생활방식과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의 노하우를 담당할 지방분권화된 협동조합으로 변모시킬 것 등을 요구했다.

슈마허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제3세계 개발을 위해 중간기술을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접목시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대부분의 개도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취업할 기회가 너무 적고, 토지의 규모가 너무 작거나 아예 없기에 대도시 일자리와 관련해서도 이들의 이러한 빈곤의 조건부터 이해해야 한다. 둘째, 개발사업은 대도시가 아닌 농촌과 소도시에서 ‘농업 관련 산업구조’를 만들어내는 일에, 그것도 실업자와 불완전 취업자에게 취업 기회를 최대로 제공해야 한다. 셋째, 개발 임무의 본질은 농촌과 소도시에 수백만 개의 신규 소규모 작업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건설비용이 저렴하고 비교적 단순한 생산방법을 이용해야 하며, 지역에서 소비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넷째, 지역(region) 혹은 지구(district) 차원의 접근을 통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며, ‘문화인프라’도 필요하다. 다섯째, 중간기술은 대부분의 농민들이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1차 가공과정을 스스로 하는 데 적용하는 것이 좋다. 중간기술은 국민 전체의 관심사가 되어야지, 소수의 고립된 전문가들에게 맡겨진 채 홀대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르주 라투슈는『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세상을 바꾸는 탈성장에 관한 소론』(민음사, 2015)에서 ‘명료한 탈성장의 선순환’을 위해서 다음의 8가지 R의 선순환을 강조했다. 그것은, 재평가(reevaluate), 재개념화(reconceptualize), 재구조화(recostructure), 재분배(redistribute), 재지역화(relocalize), 감축(reduce), 재사용(reutilize), 재생(recycle)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적인 이 여덟 개의 목표는 명료하고도 공생적이며, 지속가능한 탈성장 이행과정을 촉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디 8R뿐이겠는가? 이것 외에도 우리 생활에서 바꿔야 할 ‘Re’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 우리 삶 속에서 이러한 변혁을 꿈꿔야 할 때인 것만은 맞다고 본다.

기존의 경제성장과 다른 발전 개념을 추구하려고 하는 중요한 개념의 하나가 ‘내발적 발전(內發的發展; endogeneous development)’이다. 내발적 발전 개념의 기원은 스웨덴의 하마솔드재단이 1975년 유엔경제특별총회 때 작성한 보고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에선 미야모토 겐이치가 제시한 것으로 내발적 발전이란 개발의 목적을 GNP의 증가에 두는 것이 아니고 지역의 환경․복지․교육․문화 등의 종합적인 향상을 추구해 지역의 자원과 기술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슈마허가 강조하는 ‘지역 접근’과 상통한다.

이러한 ‘발전’ 개념을 극복하고자 지구 차원에서 환경보전과 경제발전의 조화를 생각하며 제기된 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이다. 계기는 1987년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세계위원회(WCED, 통칭 블룬트란트위원회, Brundland committee)’의 보고서인 「우리의 공통된 미래(Our Common Future)」이다.

이 보고서는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을 ‘미래세대가 스스로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능력을 해치지 않고 현재 세대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is development that meets the needs of the present without comprising the ability of future generations to meet their own needs.)’으로 정의한다. 환경배려를 ‘세대 간 형평성(inter-generational equity)’이라는 형평성 개념으로 파악한 점이 새롭다.

세르주 라투슈의 『발전에서 살아남기』(왼쪽)와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 원서 표지.

이는 슈마허가 자연을 소득이 아니라 ‘자연자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모로토미 토루는 지속가능한 발전(SD)을 위해 필요한 자원이용의 규제 원칙으로 다음을 내세웠다.

첫째, 환경자원의 가격 매기기에 관한 시장의 실패는 시정돼야 한다. 둘째, 재생가능한 자연자본의 재생능력은 유지돼야 한다. 셋째, 기술진보는 재생불가능한 자연자본에서 재생가능한 자연자본으로의 전환이 촉진되도록 제도를 통해 추진돼야 한다. 넷째, 재생가능한 자연자본은 이용돼야 한다. 다섯째, 경제활동은 자연자본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로 제한돼야 한다.

브룬트란트위원회 보고서 이래 경제학에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지속가능’보다는 ‘발전’에 액센트가 주어진 것이 사실이기에 ‘지속가능성’ 자체를 중시하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러한 지속가능한 발전, 나아가 지속가능성에 대한 개념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간디의 사상을 경제학적으로 해석한 슈마허의 ‘영속성(permanence)’ 이란 개념이다. 슈마허는 이러한 ‘영속성’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시장중심의 경제학을 넘어선 ‘메타경제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렇게 볼 때 경제학적 관점에서 살펴 본 ‘지속가능성’ 개념은 협의의 환경보전을 넘어 사회경제적 측면을 포함한 보다 광의로 사용되게 되고 개념으로서도 깊어져왔다. 이러한 사회경제 구조가 발현되는 공간인 도시는 이러한 지속가능성을 바탕으로 해서 유지·발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환경의 지속가능성, 경제의 지속가능성,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따라서 이들 3가지 지속가능성을 통합적으로 실현하는 점이야말로 실질적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처럼 발전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종래의 발전(Development)의 개념의 지표가 1인당 GDP의 상승이라면, 지속가능한 발전(SD․ESSD)에서는 NNW(국민순복지)나 녹색GDP가 주가 되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으로 나아가면 구체적인 수치보다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나 ‘웰빙(well-being)’을 중시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례로 보면 1970년대 박정희 시대에는 ‘경제성장=발전’이었다. 이때는 ‘1인당 GNP 1천 달러, 수출 1백만 달러 달성’을 국가목표로 내세웠다. 그런데 1990년대에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이야기가 나왔다. 2000년대 들어서 이명박 정부 때까지도 사실은 지속가능한 발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에는 이명박 정부의 ‘747’정책과 같이 1인당 GDP 4만 달러를 목표로 내세우지 않았다. ‘국민행복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정량적인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겠지만 이와 함께 최소안전기준이나 굿거버넌스가 강조됐다. 그것은 ‘행정안전부’가 ‘안전행정부’로 이름이 바뀐 것만 봐도 그런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 나면서 이러한 것이 ‘명목상’ 캐치프레이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았다. 박근혜 정부는 다시 GDP 목표를 강조하고 나섰다.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나 ‘지속가능성’이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함께 지향하고 공유해나가야 할 가치를 어디 두느냐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충분한 논의 없이 정책적 구호나 홍보선전의 대상에 그쳤다. 과연 우리는 ‘발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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