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화와 '한국적 보수'의 종말㊤
북-미 대화와 '한국적 보수'의 종말㊤
  • 조송원 조송원
  • 승인 2018.04.22 18:00
  • 업데이트 2018.04.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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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대화와 '한국적 보수'의 종말㊤

조만간 북-미 정상회담을 갖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기와 장소는 6월 중순 스위스와 싱가포르가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사진 합성 : 인저리타임

「한평생 민주당 지지자였던 내 친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진보적 성향이 강한 도시에 소재한 실버타운에 살고 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그 친구는 새로 들어온 입주자들과 한 식탁에 앉았다. 친구는 이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선거 결과에 무척이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흑인이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는 꼴을 안 봐도 되겠네요.” 한 여자가 말했다. 내 친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봐요.” 친구가 말했다. “저랑 정치적 견해가 다르신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험한 말을 듣고 있기가 심히 불편하네요.”

“저런.” 그 여자가 말했다. “이제는 무엇이든 느끼는 대로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걸 모르시나 봐요? 정치적 올바름¹⁾ 따위는 개나 줘버려요.”」²⁾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에서 캘리포니아의 한 여자가 말한 대로 ‘무엇이든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의 경우 민간인 사찰이나 ‘블랙리스트’에 대한 자기 검열 없이 자신의 적법한 사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진보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 ‘정치적 올바름’을 ‘개나 줘버린’다는 것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남용이고 악용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지닌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감정을 무차별적으로 배설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보수주의자이다. 비록 공화당 주류와 각을 세우고 있지만,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백인 중·하위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통상과 외교, 국방 등 국정 전 분야에서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정책이 트럼프의 핵심 지지 기반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트럼프는 대한민국과 쌍무 무역협정을 재협상하여 많은 것을 얻었다고 자랑했다.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의 양보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재협상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일방적’이란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재협상 국면에서 트럼프가 휘두른 협상 무기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할 브랜즈Hal Brands는 이 재협상을 ‘강압적 경제 외교’의 교과서라고 평가한다.³⁾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와 안보를 이용한 압박 전술을 사용했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대한 주요 철강 수출국으로서, 미국의 관세 위협에 취약하다. 그리고 한반도에 극심한 긴장이 조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국 안보 보증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우리의 경제와 안보를 볼모로 잡아, 재협상에서 일방적인 양보를 얻어낸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 보수주의자로서 트럼프의 강압적 경제외교 정책은 비록 온당하지 않을지언정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법도 하다. 그러나 동맹국이란 미명美名이 무색하게 상대 동맹국의 일방적인 양보를 압박하는 미국을 추종하고 친미, 숭미崇美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과연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나아가 한국의 보수주의는 정체와 그 수명은 어떠할까? 이태숙의 혜안을 빌린다.⁴⁾

일반적인 혁명은 물론이고 특정한 개혁 주장에 대하여 '성급하고' '과격한' 개혁안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은 과잉 단순화(oversimplification)의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보수주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 신보수주의자를 포함하여 20세기 보수주의자의 사상과 전략에 관하여 치밀하게 탐구한 학자는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다. 그는 우선 보수주의에 관한 기존의 정의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귀족계급의 유지론이라는 정의(aristocratic theory) ②보편적인 이념체계여서 특정 계급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발생한다는 자생론적 정의(autonomous definition) ③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상황적 이데올로기라는 정의(situational definition)가 그것이다.

그러면 보수주의의 기본 내용 또는 '신조'는 무엇인가? 헌팅턴은 여섯 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①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②사회는 점진적 역사과정을 통하여 성장한 유기체다. ③인간은 이성적이면서 또한 본능적·감정적이다. ④공동체는 개인보다 우월하다. ⑤인간은 궁극적·도덕적 의미를 제외하고는 불평등하다. ⑥현재의 해악을 고치려는 기도는 대개 더 큰 해악을 초래한다.

이에 따라 보수주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약한 이성을 지니고 본능과 감정의 지배 아래 있는 개인이라는 관념에, 사회적·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제도들에 대한 높은 평가를 대비시킴으로써 기존 질서와 제도의 보수 정책을 타당하다고 제시한 사상이다.

보수주의의 기본 논지를 집약한 최근의 한 연구를 보자. 보수주의의 기본 논지는 '인식론적 겸손' 즉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역사적 공리주의'라는 두 가지이다. 인식론적 겸손이란, 기존 제도를 옹호할 때나 변혁 주장을 논박할 때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강조하는 논지이다. 역사적 공리주의란, 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제도들을 현존하는 이익과 행복의 원천이라고 규정하는 논지이다.

위와 같이 파악된 보수주의는 어떤 여건에서 대두하며 그 호소력을 어떠할까? 헌팅턴은 보수주의 대두 요건을 본격적으로 탐구하여 1957년 논문에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보수주의가 기존 제도에 대하여 심각한 위협이 대두했을 때 그에 대항하는 설득력 있는 논설로서 채용된다는 것이다. 헌팅턴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그러한 상황에서만 호소력을 지니며 번창할 수 있는 ‘상황적 이데올로기’이다. 즉 보수주의자들은 수호하고자 하는 체제에 대하여 심각한 위협 세력이 존재함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때 세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냉전시대에 기존 체제에 대한 위협 세력이 공산주의 진영이라는 인식은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진리였다. 그런데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붕괴하자 그것은 미국 보수주의자에게는 지목해왔던 위협 세력이 붕괴된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헌팅턴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새로운 위협 세력을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교와 그 신자인 무슬림들이다. 그러므로 무슬림 세력을 부각시킨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지닌 의미는, 다른 무엇보다도 미국 보수주의자의 전략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이렇게 보수주의를 특정 상황에서 대두하고 호소력을 지니는 상황적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면, 19세기 이래 몇몇 보수주의자들의 대두를 잘 설명할 수 있다. 19세기 후기 영국에서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을 비롯한 일단의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은 당시 체제에 대한 민주주의자들의 공세가 치열했기 때문이다. 20세기 경제학자 하이예크F.A.Hayek의 시장 옹호론은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역사적 공리주의를 완벽하게 채용한 결과이다. 그의 시장 옹호는 사회주의와 케인스주의의 침해에 대하여 자유시장제도를 보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수호하려는 기존체제의 성격은 일정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보수주의는 기존체제에 대한 변혁 주장에 대항하여 기존체제가 어떠한 성격이든 그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채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물론 그때 채용된 보수주의가 호소력을 얼마나 갖느냐는 문제는 기존체제의 성격이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보수주의는 상당한 위세를 지니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정치권에서 '보수 대연합론'이 제안되고 ‘선명 보수 논쟁'이 진행되는 등 '보수주의의 급격한 부상'이라고 진단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러한 한국적 보수주의를 보수주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판하고 폄하한다. 한국의 보수주의가 체계적 이론은커녕 어느 정도 사상적 기초마저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한국 정치권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문제 삼을 것은 그 이론적·철학적 측면이 아니라 제도적 측면이다. 즉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보수하고자 하는 전통제도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못하는 데 취약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제도 수호를 천명하지만,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제도는 오랜 역사와 찬란한 효능에 근거하는 보수주의 본래의 제도 옹호론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원래 선진국에서 호소력을 지니며 따라서 선진국에서 효과적으로 채택될 수 있는 이념이다. 현재의 번영과 위세를 이룩한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논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곳이 바로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버크Edmund Burke가 영국체제를 옹호하기 위하여 동원한 논지 중 하나는, 영국체제를 당시 번영의 원천으로 제시한 주장이다. 버크의 논설이 당시 가장 번영을 누리던 영국의 체제 수호론이라는 사실과, 보수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결성되어 계속 번창할 수 있는 곳이 빅토리아 시대 이래 영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20세기에 와서는 세계 최강국 미국이 보수주의자들의 아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보수주의가 선진국의 이념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로시터Clinton Rossister는 보수주의 정치가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대부분' 존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후진지역에서는 후진적 상황을 개혁하여 발전시킬 필요성이 절박할 뿐 아니라 개혁 모델을 선진국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서 보수주의 강세는 기이한 현상일 수밖에 없다.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보수주의 정의와 보수주의자들의 전략에 관한 헌팅턴의 시사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보수주의자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파악이 그것이다. 이 시각에서 보면 우리에게 북한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존재였음이 금방 분명해진다. 한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반대'가 '가장 중요한 공통분모'라는 발견은 한국 보수주의의 핵심 사항인 것이다. (곧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 더 읽기 : 북-미 대화와 ‘한국적 보수’의 종말㊦

※1)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모든 종류의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인종, 성, 성적 지향, 종교, 직업 등에 대한 차별이 느껴질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차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시사상식사전). 2)캐럴 태브리스Carol Tavris, 「편견이라는 괴물」, 『Korea SKEPTIC』(바다출판사, 2017), 13쪽. 3)할 브랜즈(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학대학원 교수), 「Trump's trade victory over South Korea will end in defeat.」, 『The Korea Herald』, 2018년 4월 5일. 4)애드먼드 버크/이태숙 옮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8), 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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