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놀이터 작업 중인 2024년 어울림반 아이들[해운대구아이랑어린이집 제공]

<차례>

1. 우리 아이 잘 자라고 있나요?
2. 7세까지 아이의 뇌는 어떻게 배우고 자라는가?
3. 아이들은 논다 : 뇌가 좋아하는 놀이
4. 아이들은 표현한다 : 만들고 그리고 이야기하며 발달하는 뇌
5. 아이들은 일상을 반복하다 : 뇌 발달을 보장하는 하루 일과
6. 아이들은 공간과 호흡한다 : 뇌발달을 지원하는 환경
7. 대한민국에서 지혜로운 부모 되기

아이들은 표현한다. 아니, 인간은 표현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느끼고 경험한 것, 생각한 것을 손짓, 발짓, 표정, 말이나 글, 때로는 다른 사물을 매개로 드러내고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 필자는 이를 ‘표현 본능’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자주 하는 활동 중에는 바로 이 ‘표현 본능’이 원동력인 경우가 많다. 그리기와 만들기,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4-18. 그리기, 아이는 누구나 그리고 싶어 한다

늦가을이다. 낙엽을 밟으며 색색으로 물든 가로수 길을 걷고 싶어진다. 왠지 미술관이라도 가야 할 것 같은 감성이 충만해지는 계절이다. 요맘때 생태유아교육기관에서는 미술전시회가 열린다. 생태유아교육기관의 오랜 전통인 미술전시회는 아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뽐내는 시간이자, 부모와 지역사회, 이웃들을 초대하여 아이들의 한 해간의 성장을 축하하고 서로 격려하는 자리이다.

2024 어울림반 공동작품 숲속의 놀이터[해운대구아이랑어린이집 제공]

그림 그리는 아이는 무언가 표현하고 싶다

생태유아교육기관의 미술전시회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은 일반적인 아이들의 그림과는 다르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2019년 미술전시회에 전시된 부산대학교 부설 어린이집 7살 아이의 ‘끝이 없는 나무’라는 작품이다. 어른이 봐도 참 멋스럽지 않은가. 고작 7살 아이가 그렸다니 믿기지 않는다.

어떤 점이 이 그림을 멋지고 특별하다고 느끼게 할까? 꽃과 나무, 곤충이라는 자연이 등장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홍빛과 흰색이 어우러진 특유의 은은한 색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서툰 듯 정성 가득한 수많은 별꽃에서 느껴지는 아이다운 표현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그림에서 어린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작가가 바탕색을 흔한 하늘색이 아니라 연한 분홍빛으로 칠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무를 둘러싼 153개가 넘는 별꽃들(필자가 직접 세어 보았다.)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었을 아이를 상상해 보라. 아이가 ‘표현’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느껴진다. 이 꽃들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더 멋지다. “여기 촘촘히 핀 꽃들은 나무가 아름다워지려는 거예요.”

영유아기 최적의 표현, 그리기

사실 그리기만큼 아이의 표현 본능을 쉽게 충족시켜주는 활동은 드물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영아에게 종이와 크레용을 쥐어줘 보라. 아이가 크레용을 잡을 힘만 있다면 종이 위에 수많은 형태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 흔적이 비록 무의미한 낙서로 보일지라도 아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나름의 표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두세 살 영아들이 가진 표현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수천 개 이상의 어휘를 알고 매일 수만 개의 단어를 말하는 성인과 달리, 영아들이 할 수 있는 표현은 손짓 발짓이나 울음과 옹알이가 고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 입장에서 그리기(긁적이기)는 엄청난 표현이다. 팔과 어깨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아이는 종이 위에 수만 가지 다른 형태와 모양을 남길 수 있다.

그리기 표현의 중요한 특징은 말과 몸짓은 행위와 동시에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그린 흔적은 남아 자신은 물론 타인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리기의 특성은 뇌의 인지 능력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사마귀 [출처 : 2019 자연과아이다움을 살리는 생태놀이사례집]

그리기의 뇌과학적 의미, 표상 활동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 하는데, 이 표상을 그림이나 언어, 모형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표상 활동’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기는 내면의 이미지를 평면 위에 나타내는 표상 활동이다.

표상은 뇌의 인지 능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지(cognition)란, 머릿속에서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하는 모든 과정을 말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지각, 기억, 학습, 사고, 언어 처리 등이 포함된다. 뇌가 정보를 처리하려면 표상, 즉,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무엇인가 생각할 때 그에 상응하는 상(象, 이미지)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제대로 ‘잘’ 생각하려면 이 떠올랐다 금방 사라지는 불안정한 상들을 좀 더 오래, 또 선명하게 떠올려야 한다. 한 분야에 대해 높은 인지 능력이 있는 전문가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표상 능력이다. 예를 들어, 건축설계는 복잡한 설계도를 보고 실제 지어질 건축물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그리기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머릿속 이미지를 꺼내어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린 그림을 보며 다시 머릿속 이미지를 확장시켜 나가는 순환 과정이 바로 그리기이다. 그래서 그리기라는 표상 활동은 아이들의 인지 능력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다수의 연구들은 유아의 그리기 표상 능력이 높을수록 인지 능력도 높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기가 자극하는 것은 인지 능력뿐만이 아니다. 그리기를 통해 일어나는 표상 활동의 순환은 시각 처리, 인지, 운동 능력과 관여된 뇌의 여러 영역을 자극하여 신경 세포의 활성화와 연결을 자극한다. 그리기는 집중력을 향상하고 다양한 정서를 경험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또한, 또래와 함께하는 그리기 작업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이끈다.

요즘 아이들의 억눌려진 그리기 표현 본능

이쯤 되면 아이들에게 그리기를 안 시킬 이유가 없다. 당장 미술학원을 알아봐야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유아교육에서 ‘미술’은 가장 많이 하는 교육 활동일 것이 하다.

현장의 활발한 미술 활동에도 요즘 아이들 중에는 그리기의 표현 본능이 억눌린 아이들이 참 많다. 백지를 주고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나는 못 그려요.’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가 많다, 자신 있고 잘 그리는 특정 그림이나 캐릭터만 그리는 아이들, 그림 대신 숫자나 글자 비슷한 기호로 종이를 채우는 아이들도 많다. 왜일까?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나 자신은 그림을 잘 못 그린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그림 그리기에 익숙하지 않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싶을 정도로 의미있는 경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모습은 대개 도안에 색칠하는 색칠 공부로 그리기를 경험했거나, 미디어나 애니메이션, 상업적 캐릭터에 많이 노출이 된 경우, 숫자나 문자 공부를 빨리 시작한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부자연스럽다. 성인들에게 미술은 취향의 문제이지만, 영유아기 아이에게 그림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잘 그리던 못 그리던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이 아이이다.

생태유아교육기관 아이들의 그림이 살아있는 이유

다시 생태유아교육기관 아이들의 그림에 주목해 보자. 표현 본능이 있다고 모든 아이가 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생태유아교육기관에서는 어떻게 미술 지도를 하는 걸까?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생태유아교육기관의 미술 지도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산책이나 바깥놀이를 많이 한다. 자연에서 놀이 속에서 주체적인 경험을 쌓아가는 아이들은 저마다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선명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아이들이 그림 그릴 시간이 많다. 자유놀이 시간이 많은 생태유아교육기관에서는 아이들이 수시로 이면지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미술 시간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리며 논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 부분이 결정적인 것 같다.) 아이들의 표현 본능을 방해하지 않는다. 기관과 가정이 함께 미디어와 스마트폰, 학습지를 제한하려고 노력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관에서 주제가 정해진 그림 그리기나 색칠하기, 밑그림이 그려진 활동지나 캐릭터가 있는 색칠공부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그리고 싶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도 그것을 종이 위의 선으로 그리는 것도 아이의 몫이다.

일반적으로 미술(美術)교육은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아름다움(美)을 표현하는 기술(術)을 익히는 것도 미술 교육의 목표이다. 그러나 영유아기의 그리기에서는 그림이라는 ‘결과물’ 보다 표현이라는 ‘과정’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

미술 지도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맙게도 아이는 생명력을 타고나듯 ‘표현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그 본능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기만 하면 된다. 서너 살 아이들과 그리기를 해보라. 어쩌다 그린 선 하나, 동그라미 하나에도 따뜻한 관심과 반응을 보여주면 신이 나서 계속 그리려고 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표현들에 귀 기울여주자. 아이의 표현 본능이 표현력(力)으로 성장하는 순간을 만날 것이다.

◆ 참고문헌 ◆

▲ 교육부·보건복지부(2020). 2019 개정 누리과정 놀이사례집 <자연과 아이다움을 살리는 생태놀이> https://www.i-nuri.go.kr/생태놀이사례집

▲ 에릭 캔델(2019).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프시케의숲.

▲ 채영란·지성애 (2008). 유아의 연령에 따른 그리기표상능력과 인지능력 간의 관계. 유아교육연구, 28(4), 61-82.

생태놀이운영사례집 링크

임지연 박사

◇ 임지연 박사

▷(사)한국생태유아교육연구소(https://www.ecoikium.org/) 소장
▷서울시 생태친화보육사업 컨설턴트
▷대구교육대학교 생태유아교육 강사
▷호치민시 한국학교 유치원 교사
▷부산대 유아교육학과 학사/석사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