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주 무용단의 한-덴마크 공동예술작업 동행기
신은주 무용단의 한-덴마크 공동예술작업 동행기
  • 하영식 하영식
  • 승인 2019.01.24 16:08
  • 업데이트 2019.01.24 16:2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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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단세카펠렛 로비에서 한국-덴마크 공동예술팀.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국인 입양아 출신의 나나(Naja Lee Jensen), Perter Koch Gehlshoj, 하영식, 
김근영, 김현정, 신은주, 김희진. 사진=신은주무용단 제공

2019년은 한국과 덴마크의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다.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 분야의 협력과 교류가 어느 해보다 활발하다. 수년 전부터 한국-덴마크 협력작업을 추진해온 신은주무용단이 최근 한국 입양아 출신의 덴마크 예술가들과 단세카펠렛(Dansekapellet) 스튜디오A에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분쟁전문기자 출신인 하영식 작가의 동행기를 싣는다.

서울의 합정동에 위치한 외국인 묘지에 가면 눈에 띄는 묘비명을 볼 수 있다. ‘뮐렌슈테드(H. J. Muhlensteth)(한국명:미륜사)’라는 이름이다. 한국과 덴마크를 이어주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미륜사는 덴마크에서 대북전신주식회사에 입사한 후, 중국 파견 근무를 위해 상하이로 갔다가 1885년 8월23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입국했다. 그 후로부터 통신선로인 전신선 가설에 참가하고 그 이후 약 30년간 반(半)평생을 우리나라에서 보냈다. 특히, 1896년부터 1905년까지는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대한제국의 전무교사직을 수행했다. 전무교사란 전기통신을 가르치던 전무학당의 교사이다. 사실상 초창기 거의 모든 우리나라의 전신 제도가 그의 노력과 자문으로 결정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한일통신 협정 관련으로 통신 권한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전무학당은 폐쇄되고 미륜사는 강제 퇴직을 당했다.

평지의 나라인 덴마크에서 173미터로 측정된 이딩 스코이보이(Yding Skovhøj) 산이 가장 높다. 당연히 산이 없는 덴마크인들은 산의 나라인 한국에 오면 산만 쳐다본다고 한다. 필자가 덴마크에 도착하자마자 한국과는 확연하게 다르다고 느낀 점은 편평하다는 느낌이었다. 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편평한 코펜하겐에 머물다가 동화작가인 안데르센의 고향인 ‘오덴세’를 방문했을 때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느꼈던 굴곡의 감은 신선했다. 언덕과 산을 일상처럼 보면서 직접 오르락내리락 하던 한국인들에게는 산이 신기한 존재일 수 없지만 덴마크인들에게는 신비스럽다. 덴마크인 미륜사가 135년 전에 한국에 와서 반해버린 것도 산의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흐린 날씨에 비바람 거세고 겨울엔 꽁꽁 얼어붙는 덴마크보다는 뚜렷한 사계절,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이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신은주무용단과 한국 입양아 출신의 덴마크 예술가들이 단세카펠렛 스튜디오에서 공동예술작품 '이방인'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신은주무용단

필자의 25년 이상의 외국생활에서 유럽 생활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덴마크는 언제나 마지막 목적지로 남겨놓고 방문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북부에서 잠시 덴마크의 남부지역을 하루 정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여전히 덴마크를 방문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폴란드의 산골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긴 겨울밤의 동반자가 되어줬던 안데르센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안데르센의 생가를 방문할 것이라는 마음을 담고 있었지만 발걸음은 계속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때가 왔다. 덴마크를 방문하는 신은주무용단으로부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이 온 것이다. 물론 나의 대답은 ‘같이 가겠다’였다. 세 명의 춤꾼들과 한 명의 예술감독, 그리고 기획자,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 김해공항에서 만나서 덴마크로 떠났다. 12월 초에 떠나면서 덴마크는 한국보다 훨씬 춥다는 얘기를 누누이 들은 터라 내가 가진 두꺼운 옷가지와 외투는 모두 여행 가방에 쑤셔 넣었다. 추위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이 한국 사람들의 심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의 여행준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로 가는 길은 모험이었다. 부산의 기상악화로 인해 일본에 도착하니 덴마크로 향하는 비행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하루 종일 공항에서 기다리다 저녁이 돼서야 방콕으로 향하던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서 다시 폴란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잡아타고 겨우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한 때는 다음 날 새벽이었다. 밤새도록 비행기 안에서 지냈던 셈이다. 한국과 덴마크가 먼 거리에 있음을 그 때 실감했다. 비행기도 없고 느린 증기선만 있던 시대에 미륜사는 어떻게 중국으로 왔으며 또 어떻게 한국으로 왔을지 궁금했다. 배타고 기차타고 걷고 수레에 몸을 싣고 그렇게 왔다면 아마 반년은 걸렸을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지구의 끝에 있는 덴마크라는 나라에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모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먼 여행을 했어도 춤꾼들의 체력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월등했는지 불평 한 마디 없었다.

한국 신은주무용단과 덴마크 예술가들이 공동작품 '이방인'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신은주

나는 덴마크에서 온 예술가들을 이미 부산에서 만났다. 부산의 예술가들과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실행할 덴마크의 세 예술가들은 특이하게도 한국의 입양아들이었다. 한국에서 간 입양아들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는 이들에게 나의 장황한 뼈대 없는 사죄 비슷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한국의 기성세대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한국이라는 조국이 과거에 제대로 아들딸들을 품어주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덴마크와 한국은 1959년에 정식으로 수교했으며 내년(2019년)이면 수교 60년이 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먹을 게 없어 많은 사람들은 강냉이 죽으로 끼니 때우던 시절이었으니 입 하나를 줄이느라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당시 가난한 부모들은 고아원에서는 최소한 아이들이 굶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당시 고아원에서 덴마크를 비롯,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의 어린이들은 수만 명에 이른다. 낯선 이국땅에서 성인으로 자라난 뒤 입양아들은 부모의 땅인 한국으로 무작정 찾아와서 뿌리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20년 전, 필자는 충격적인 만남을 경험했다. 아기 때 스웨덴으로 입양돼 그곳에서 자라났던 한 청년이 서울에 와서 생부모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당시 나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던 겉모습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스웨덴 인이었다. 미국에서 이민 2세대나 3세대의 청년들을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당시 그와 얘기하면서 한국인으로서 너무 미안한 감정이 솟았고 그가 부모를 찾는 일을 도와주고 싶었으나 사실 그가 가진 기억이나 기억될 만한 물건을 없었다.

(2018년) 10월 부산에서 만났던 세 명의 한국태생의 예술가들은 덴마크에서도 존경받는 예술가들로 성장해주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됐다. 나나와 캐롤라인, 줄리, 이들의 이름은 만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나나는 안무가로 캐롤라인은 춤꾼으로 줄리는 성악가로 각각 특색을 가진 예술가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인이지만 덴마크에서 성장한 입양아들이다. 물론 북유럽의 자연환경이 이들의 한국인적인 외모를 조금은 앗아가면서 이국적으로 변형시켰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이었다. 당연히 한국말은 할 수 없었고 영어로만 소통이 가능했다.

세 명의 한국인 덴마크 예술가들을 다시 만난 건 코펜하겐에서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났지만 여전히 반가웠고 정다웠다. 이들과 한국 무용가들이 함께 만들 작품의 주제는 ‘이방인’이다. 덴마크에 입양돼온 예술가들로부터 들었던 삶의 얘기를 통해서 왜 이들이 정체성을 주제로 작품을 하려는지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비록 덴마크 말은 유창하게 했지만 동양인의 외모를 하고서 학교를 다니면서 주위의 학생들에게서 당했던 수모는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한 예술가는 같은 반 아이가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고 실토했다. 태어난 지 반 년 만에 입양돼왔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고 덴마크인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덴마크를 자신의 나라라고 믿고 자랐던 아이가 이런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덴마크 협력기관 기획자와 인터뷰하는 하영식 작가. 사진=신은주무용단 

부산에서 만났을 때 꺼내놓았던 얘기들은 모두 같은 맥락의 문제였다. 조국이라는 한국에 와서도 한국인이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말을 할 수 없으니 이방인 취급을 받겠지만 이미 외모나 차림새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어떤가. 덴마크 말은 유창하게 하지만 이미 생김새나 피부색, 머리 색깔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덴마크 인이면서도 덴마크 사회에 쉽게 편입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이방인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에 선 사람들이 이들일 것이다.

이들은 한국인 춤꾼들과 함께 작품을 논의할 때도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꺼내들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 주위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을 하게 만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 주제였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어려서부터 덴마크 인들 사이에서 무언가 다른 존재로 여겨지면서 살아온 삶이 계속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해왔다는 당위성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이해력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이들의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는 이상 이들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이들을 더욱 감싸줘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서 입양 온 예술가들과 한국의 예술가들이 함께 손을 잡고 뒹굴고 몸을 부대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성악가인 줄리는 이집트에서 독창콘서트를 한 뒤 코펜하겐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들에게 달려왔다고 했다. 한국의 예술가들에게서 다정다감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내게는 이집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얘기해주었다. 수백 명 앞에서 독창회를 한 뒤 관객들이 보였던 반응이나 머물렀던 값비싼 호텔에 대한 얘기나 카이로의 공해문제 등을 얘기했다. 이방인으로 서로 만났지만 이방인이라는 벽이 허물어졌음을 볼 수 있었다.

한국과 덴마크의 교류를 통해 세 명의 입양인 예술가들은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었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시간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밖에서 한국을 애타게 찾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도 숙제로 남겨져있다. 예술가들에게도 이방인들 사이의 벽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하나가 될 것인가를 명쾌하게 표현하는 숙제가 남겨져 있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