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민화가 치바이스(제백석) 전시회를 보고
중국 국민화가 치바이스(제백석) 전시회를 보고
  • 허섭 허섭
  • 승인 2020.02.03 07:29
  • 업데이트 2020.02.0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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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5주년 기념 제백석 전시회(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17.7.31~10.8)

치바이스 초상

긴긴 추석 연휴의 막바지인 10.7(토) 저녁 필자 처형들의 별장이 있는 인제군 기린면 귀둔리에서 급히 서둘러 상경하였다. 이유인 즉슨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치바이스전(齊白石展)》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한중수교 25주년 특별전으로 10.8(일)이 마지막 날이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깜박 잊고 놓칠 뻔한 것이다.

지난 5월 어느날 고교동기 내외와 함께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전(2017.5.12~6.11)을 보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들렀다. 친구 부인인 강재경 선생의 서예대전 입선도 축하할 겸 부부동반으로 만난 것인데 그곳에서 제백석전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모교 재학생들의 서울 대학 탐방 행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던지라 동창회 사무국장 조태용 선배에게 이번 대학 투어(순회) 중에 어떻게라도 짬을 내어 후배들에게 정도준 전을 꼭 보여주라고 당부했었다. 물론 진주시립 <이성자미술관> 에서도 전시일정〔2017.6.29~8.27〕이 잡혀 있었지만 그 감동이 어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나는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고향 진주가 예향으로서의 품격을 점점 잃어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기에 후배들에게 비록 작으나마 문화적 충격을 안기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이번 제백석전에 대한 언론 보도를 살펴보았다. 대표작이나 대작들은 오지 않고 몇몇 지방 박물관에서 가져온 것들로 채워져 한마디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라’ 고 전했다. 말씀인즉 중국 고궁박물관이나 대만 고궁박물관 소장품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중 수교 25주년 기념 행사이니 대만으로부터는 당연히 협조를 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북경 고궁박물관이나 요녕성박물관에서 소장한 보물급 작품들이 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제백석의 작품을 실제로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90년대 이후 웬만한 서양화가들은 예술의 전당을 비롯한 대형 미술관을 모두 다녀갔지만, 아직까지 중국 작가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전시한 개인전은 내가 알기로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지금까지 열린 대규모 중국화 전시는 2002년 《중국근현대오대가전 - 임백년 오창석 황빈홍 제백석 서비홍》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으며, 이어서 2003년 덕수궁미술관에서《한중대가 장우성/이가염 전》이 있었고, 그리고 몇 년 후인 2009년 《중국 수묵화의 법고창신 -중국근대수묵화명가전》이 서울대박물관에 이어 대구 계명대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에는 앞의 5대가에 부심여 황군벽 장대천 임풍면 부포석 이가염을 합쳐 전부 11명 87점의 작품이 소개되어 지금까지 최대 규모의 풍성한 전시였다.

이번 전시에는 호남성박물관 소장 원작 50건 55점, 상담시제백석기념관 소장 자료 19건 83점, 국내 소장 치바이스 작품 3건 3점 등 총 72건 141점을 전시했다고 한다. 인물 산수 화훼는 물론 공예 전각 서법 등 다양한 분야와 화목(畵目)에 걸쳐 초반기 중반기 후반기 전 생애 대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기에 평생 수만 점을 남긴 치바이스의 예술의 전모는 아니더라도 그 본질을 보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는 것이 주체 측의 설명이다. 그리고 치바이스 한국전을 계기로 치바이스의 삶과 예술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한국과 중국 작가들의 오마쥬((Hommage) 전시도 기획했다는 전언이다.

* 오마주(Hommage)는 존경(respect), 존중을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예술과 문학에서는 존경하는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원작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영화에서 쓰던 용어이나 다른 분야에도 사용하게 되었는데, 우리말로는 <헌정(獻呈)> 이라고 하면 되겠다.

예술의전당은 올 때마다 항상 공공건물의 근접성에 대해 반성케 한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보다는 낫지만 예술의 전당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그 고생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접근성이 떨어져 오히려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이 훨씬 대중들과 친숙하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친구더러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라고 한 뒤 땀을 뻘뻘 흘리면서 2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마치 극장에 들어서는 느낌으로 길게 내려놓은 검은 커튼 사이로 들어가자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나를 이끌었다. 우선 전시 공간이 너무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접 조명으로 작품에 몰입 집중하도록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정도가 다소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늘 보아왔지만 예술의전당 서예관(현재 공식 명칭은 서예박물관) 전시와 전시 도록(圖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친절한 전시와 도록이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알아볼 수 없는 서예 작품에 대해 일일이 본문과 부기(附記-畵題나 題詩, 題跋까지를 통틀어 말함)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전당 서예관이 생기면서 최초로 시도한 일이며 아직 다른 미술관이나 화랑에서는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 현 실정이다. 특히 서예전이나 문인화 전시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공식화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 원칙이 관철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써놓고도 자기가 쓴 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서예계의 부끄러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제백석의 생애와 작품 세계

1. 제백석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제백석을 두고 ‘동양의 피카소’ 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절대 수긍할 수 없다. 동서양을 통틀어 지난 한 세기의 대표적인 예술가를 손꼽으라 한다면 분명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0.25~1973.4.8)와 제백석(齊白石 1864.1.1~1957.9.15)이 될 것이고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백석과 피카소의 구체적인 면면들을 견주면서 두 사람의 예술세계와 인생역정이 닮았다고 하는 데에 대해서는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90세를 넘어 죽기 직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친 것이나 80세에도 자식을 낳은 넘치는 정력까지 닮았다고들 하는데, 이는 제대로 알고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성(性)은 예술의 원동력’ 이라고 말할 만큼 피카소의 곁에는 언제나 여인이 있었고 그의 생애와 예술은 많은 여인들과의 관계를 살피지 않고는 깊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피카소는 평생 일곱 명의 여자와 동거했고 그 중 두 명의 여자와 결혼했다. 과히 ‘여성편력(女性遍歷)’ 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백석은 북경에 정착하면서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어린 나이의 측실(側室)을 둔 것뿐이다. 그것도 부인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이 추천한 사람으로 측실을 맞이한 것이다. 부인이 별세한 이후 측실을 정식 부인인 계실(繼室)로 맞이하였으며, 계실의 사망 이후로는 건강을 돌보며 살림을 맡을 비서로 여인을 곁에 두었을 뿐이다.

피카소가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이며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아방가르드(avant-garde)적인 예술활동을 펼친 것에 비해, 제백석은 전통적인 양식 내에서 끊임없이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지 고유의 형식 그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피카소는 젊은 시절 이룬 명성을 평생 유지하면서 생을 마감한 예술가라면, 제백석은 말 그대로 생활 예술가에서 출발하여 평생 그 많은 식구(食口 - 이 얼마나 원초적인 단어인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림을 그렸으며, 70세를 넘겨 비로소 세상에 그 이름을 제대로 알렸으며, 90세 이후에 존경하는 인민화가(人民畵家)로 모든 이들의 칭송받았으며, 오히려 사후에 ‘일대종사(一代宗師) - 한 시대의 큰 스승’ 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가이다.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양식과 기법을 창출한 피카소의 이러한 일면들을 굳이 중국현대미술사에서 찾는다면 나는 제백석보다는 오히려 장다첸(張大千1899~1983)이 그 기질 상 훨씬 닮았다고 생각한다.

* 아방가르드(avant-garde) : 기성의 예술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한 예술 운동, 또는 그 유파.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위예술(前衛藝術)이다.

* 제백석은 7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났으며, 전처에게서 5명, 측실이다가 정식으로 계실이 된 후처에게서 8명의 자식이 났으며, 더 나이 들어서는 증손까지 보게 되니 직계 자손만 따져도 4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95세까지 살다보니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우들뿐만이 아니라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그 당시의 의학 수준에서는 자식과 손자까지 앞세우는 참척(慘慽)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다욕장수(多辱長壽)’ 라고 농담으로 말하지만 ‘장수다욕(長壽多辱)’ 이 이치에 맞는 말일 것이다. 오래 살다보면 아랫사람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참척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겠는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중국문화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크게 황하(黃河)로 대표되는 북방문화와 장강(長江, 揚子江) 이남의 남방문화의 두 흐름이 있다. 북방문화권에서는 현실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이 발원하였고 남방문화권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사상이 발생하였다. 흔히 문학에 있어서 두보와 이백을 그 대표 주자로 이야기한다. 나는 중국의 현대 미술에 있어 이 둘을 대표하는 작가가 제백석과 장대천이라고 생각한다. 제백석은 호남성(湖南省)에서 나서 북경에서 생을 마쳤지만 장대천은 사천성(四川省)에서 나서 중국뿐만이 아니라 고국을 떠나 세계를 떠돌았으며 최종적으로는 대만에서 생을 마쳤다. 장대천의 화려함과 장쾌함, 과감한 실험정신과 장대한 스케일, 특정 이념을 떠난 자유분방함, 분명 이런 요소는 피카소와 많이 닮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장대천은 피카소와 교유하면서 그에게 동양의 회화정신과 더불어 설채(設彩)와 용필(用筆)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대천의 산수화

제백석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오로지 ‘입에 풀칠하기’ 위해 -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목공(木工)이 되었으나 그의 천부적인 소질은 자연히 그를 그림이라는 예술세계로 이끌었으며, 이후 그림을 배우고 인장(印章)을 새기고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면서 그는 평생 끝없이 자기를 변혁해간 예술가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예술가의 정신을 지키려고 애썼기에 평생 겸허한 가운데서도 자존을 잃지 않고 끝없이 인격을 도야(陶冶)한 구도자(求道者)였다.

그래서 나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잘못 붙였다고 분명히 밝힌다.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 이건 아니다. 제백석은 단순한 거장이 아니다. 제백석의 인생은 한마디로 ‘위대한 인간 승리’ 이며 그는 단순한 거장을 넘어 ‘일대종사(一代宗師) - 한 시대 최고의 스승’ 이 된 것이다. 마땅히 그 제목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목장(木匠)에서 일대종사(一代宗師)가 되기까지』라고…

천가시주석과 개자원화전

2. 제백석의 생애와 시대 구분

(1)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장(木匠)이 되다〔1864년(1세) ~ 1886년(26세)〕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위 글은 제백석이 본인의 자서전 첫머리에 한 말이다. 제백석은 1864년 후난성(湖南省) 상탄현(湘潭縣)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네 식구만 있는 가난한 농가의 맏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춘즈(純芝)였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화롯가에서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이삼백 글자를 완전히 익힌 뒤에는 외할아버지 서당에 나가 글공부를 이어갔으나 이 또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집안일을 도와야 할 처지인지라 일 년 남짓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나무하고 소 먹이는 목동으로 일하며『논어』를 스스로 독파하였다. 서당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린 유치한 그림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 때 배운『천가시(千家詩)』는 나중에 스무살이 넘어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를 읽고 시를 짓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목우도
목우도

- 1877년(15세)에, 병약하여 농부로서 삶을 포기하고 목수로 입문하였으나 그것도 집 짓는 대목장은 체력이 감당되지 않아 결국 소목장으로 살기로 결정하다.
- 목공일이 체질에 맞아 스승 저우즈메이(周之美)로부터 모든 기술을 이어받고 나아가 새로운 기법으로 도안과 인물을 창작하니 사람들로부터 ‘즈(芝)사부’ 로 불리게 되었다.
- 12세에 한 살 위인 아내 천춘쥔(陳春君)이 민며느리로 시집와 19세에 신방을 차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 장가 든 해 단오날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다.
- 목공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밤 늦도록 빌려온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를 베끼며 화조와 인물화를 그리게 되다.
- 1988년(26세)에 민간예술가 샤오상가이(蕭薌陔)를 스승으로 모시고 초상화를 배우다.

* 중국 청초(淸初)에 만들어진 화보로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입문서이며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2) 그림을 배우며 목공에서 화가로 변신하다 〔1887년(27세) ~ 1918년(56세)〕

개자원화전을 통해 화가로 눈을 뜨게 되어 이후 자연스럽게 그림이라는 예술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상탄 지역의 명사인 후친위안(胡沁園)과 천사오판(陳少蕃)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시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 1889년(27세) 두 스승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시화(詩畵)를 배우다. 황(璜)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호를 빈성(瀕生) 별호를 바이스산런(白石山人)으로 삼다. (이후 사람들은 이름이 황이고 호가 백석인 것으로 알다.)
- 1894~1899년(32~37세) 룽산시사(龍山詩社)와 뤄산시사(羅山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배우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각에 매달려 첫 인보(印譜)를 내게 된다.
- 1900년(38세) 어렵게 마련한 살림집 <백매서옥(白梅書屋)>과 별도로 집 한 채를 지어 서재로 꾸미고 <차산음관(借山吟館)>이라 당호를 붙이다.

초창기의 초상화와 산수화 - 려부인전 / 용산칠자도

■ 오출오귀(五出五歸)의 여행을 통해 전국의 명승를 가슴에 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명사와 교류하다.

시를 쓰고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고 각을 새기는 일은 모두 여행하는 가운데 더욱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림의 경우는 여행 중에 직접 관찰함으로써 더욱 그 진수를 얻을 수 있지요. 에 사람들이 말한 ‘강산(江山)의 도움’ 이 바로 이것이겠지요. 그저 고인들의 화집이나 화보만을 따라 그린다면 평범한 화가로 밥이야 먹고살 수 있겠으나, 조금이라도 창작을 하려고 한다면 마치 가려운 것을 옷 위로 긁는 것처럼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먼 길을 많이 떠남으로서 시각의 경계를 넓히고 마음의 경지도 발전시킨다면 그대의 타고난 자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는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원유(遠遊)를 권하는 샤우이(夏午詒)의 편지글이다. 이후 시안(서안)을 시작으로 광시 구이린 베이징 상하이 친저우 광저우 베트남 광둥 등지에 5차에 걸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게 된다. 이 다섯 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그가 보고 느낀 풍경과 풍물은 모두 『차산도권(借山圖卷)』에 실리게 된다.

오출오귀의 여행을 통해 고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고 각 지역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들이 소장한 전대 작가들 - 서위 팔대산인, 김농 라빙을 비롯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숱한 진품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강산의 도움' 을 얻게 되니 그의 화풍도 초기의 공필화(工筆畵 - 세밀화)를 벗어나 마음속 풍경을 담아내는 사의화(寫意畵)로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 1903년(41세) 샤우이가 서태후의 내정공봉(內廷供奉)으로 추천하려 하자 극구 사양하다.
- 다섯 번의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1909년부터 1917년까지 8년 동안 칩거에 들어가 독서와 창작에 집중하게 된다. 이 시기의 맹렬한 노력 덕분에 그는 민간예술가에서 문인화가로 격상할 수 있었다.
- 1917년(55세) 군벌들과 비적들의 난리를 피해 잠시 베이징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천스찡(陣師曾)을 만나 예술의 차원을 높이게 되며 이후 베이징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다.

(3) 베이징(北京)에 정착하다 〔1919년(57세) ~ 1936년(74세)〕

베이징을 드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던 제백석은 12살 아래인 친스찡을 만나게 되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진정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되니 인생의 대전환을 맞게 된 것이다. 1919년 세 번째 베이징 방문에서 주 활동무대로 정착을 결심하였다.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쇠년변법(衰年變法)’ 이라 일컬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 1919년(57세) 18세의 아내 후바오주(胡寶珠)를 측실로 들이고 베이징에 정착하다.
- 1922년(60세) 천스찡이 일본에 가서 중국화전람회를 개최하다. 이때 전시된 바이스의 작품 전부가 고가에 판매되었고 그의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1923년(61세) 천스쩡이 난징에서 병사하다. 비록 6여년에 지나지 않은 짧은 교유였지만 천스칭이 없었다면 오늘날 제백석의 예술도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단언할 만큼 그는 제백석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1927년(65세)에 린펑멘(林風眠)의 삼고초려로 베이징 국립 예술전문학교에 교수로 출강하다.
- 1936년(74세) 쓰촨(四川)에서 전통 회화에 대한 최고 이론가이자 현대 화론을 정립한 화가, 두 살 아래의 황빈홍(黃賓鴻)을 알게 되다.
- 1926년(64세) 4월 어머니 별세, 같은 해 8월에 아버지 별세. 고향 가는 길이 전란에 휩싸여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여 평생 한이 되다.

(4) 피난 시절 〔1937년(75세) ~ 1948년(86세)〕

1937년 일본은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침탈하기 시작하여 이후 8년간의 중일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이 시기가 제백석에겐 가장 슬픈 시기였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일본인들의 강압적인 요구가 너무 힘들어 몇 차례나 그림을 팔지 않는다는 방을 내붙이기도 했다. 부인 춘쥔이 세상을 떠났고 계실인 후바오주마저 죽으니 시대의 비운은 한 개인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 1937년 점쟁이의 점괘로 나이를 두 살 올려 횡액을 피하다. (이후 모든 작품에 두 살 올린 나이로 기명하다.) 7월9일 북경이 함락되어 두문불출 울분의 세월을 보내다.
- 1940년(78세/80세) 부인 천춘쥔이 사망하다.
- 1944년(82세/84세) 계실 후바오주가 사망하다.
- 1946년(84세/86세) 남경에서 푸신위(溥心畬)와 함께 전시를 열다. 장제스(張介石)에게 <송매(松鷹) – 일명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 > 와 그의 이름을 새긴 인장을 선물하다.
- 1948년(86세/88세) 국민당 정부가 부패와 독재로 내정에 실패하자 통화팽창이 심해져 그림 그려 번 돈이 휴지조각이 되다.

측실 후바오주와 정식 결혼식을 마치고 기념촬영
측실 후바오주와 정식 결혼식을 마치고 기념촬영

(5) 해방 이후 〔1949년(87세) ~ 1957년(95세)〕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고 해방이 된 것은 1945년 8월15일이지만 곧 이어 중국은 국공내전에 휩쓸리게 된다. 국민당 정부 시절 부패한 권력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제백석에 있어 진정한 해방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1949년 이후가 될 것이다.

생의 마지막 시기인 10년 남짓의 세월,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인민화가로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장개석에게 준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
장개석에게 선물한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

- 1949년(87세/89세) 1월 베이징이 해방되다. 저우언라이(周銀來) 총리의 연회에 초대받아 참석하여 석인 두 개를 마오쩌뚱(毛澤東) 주석에게 선물하다. 서베이홍의 초빙으로 중앙미술학원 명예교수로 부임하다.
- 1950년(88세/90세) 4월 마오쩌뚱으로부터 만찬에 초대받아 자신의 건강과 예술활동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과 걱정을 직접 듣다. 10월에 자신이 82세 때 그린 <매(鷹)>와 <바다는 용의 세계, 구름은 학의 고향 - 海爲龍世界 雲是鶴之鄕> 이라는 전서 대련(篆書對聯)을 마오쩌뚱에게 헌정하다.

/ 모택동에게 준 그림과 글씨
모택동 주석에게 헌정한 그림과 글씨

- 1952년(90세/92세) 아시아 태평양 지역 평화대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자 그는 사흘 밤낮으로 145×365㎝의 대작 <꽃들과 평화의 비둘기>를 그려 극찬을 받다.
- 1953년(91세/93세) 고친 나이로 93세 생일날에 쉬베이홍(徐悲鴻)을 위시한 미술계 인사 200여 명이 축하연을 마련하다. 같은 날 중화전국미술공작자협회와 중앙미술학원이 주관한 연회에서 저우언라이 총리가 출석하여 ‘중국 인민의 걸출한 예술가’ 라고 찬양함으로써 최고의 인민 화가로 등극하다. 그리고 베이징중국화연구회의 주석을 맡다. 이 한 해 동안 600여 폭의 그림을 완성하여 초인적 열정을 분출하다.
- 1954년(92세/94세) 4월28일 중국미술가협회가 베이징 고궁박물관에서《치바이스회화전람회(齊白石繪畫展覽會)》를 개최하다. 9월1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 후난 대표로 참석하다.
- 1955년(93세/95세) 6월 14명의 후배 화가들과 함께 보름에 걸쳐 거대한 <평화송(平和頌)>을 집단으로 창작하다.
- 1956년(94세) 4월27일 세계평화평의회에서 1955년 국제평화상을 중국화가 치바이스에게 수여한다고 선포하다. 9월1일 수도 베이징에서 국제평화상 수여식이 주은래 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다.

국제평화상 수상 연회에서 주은래 총리와 담소 / 주은래에게 준 그림
국제평화상 수상 연회에서 주은래 총리와 담소하는 치바이스. 오른쪽은 주은래 총리에게 선물한 그림

- 1957년(95세) 5월15일 베이징중국화원(북경중국화원) 명예원장에 추대되다. 5~6월에 마지막 그림인 모란을 그리다.

9월15일 자리에 누웠고 16일 오후 3~4시경 베이징의원에 입원하였고 6시40분에 세상을 떠나다. 정부 주도로 <치바이스장례위원회>가 조직되고 위원장에 궈모뤄(郭末若)이 임명되다. 9월22일 가흥사(嘉興社)에서 장례식을 거행하다. 장례가 끝난 후 베이징 후난 공묘에 안장되다. 그의 유언대로 자신의 본적과 성명이 새겨진 석인 두 모와 30년 가까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지팡이를 함께 관에 넣다.

- 그가 서거한 다음해인 1958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와 중국미술가협회가 공동으로 베이징 전람관의 문화관에서 《치바이스유작전람회(齊白石遺作展覽會)》를 개최하다. 1983년부터 1957년 사이에 그린 그림 584점과 화고, 스케치, 시전, 화집, 인보 그리고 손수 새긴 석인 306건이 전시되다. 이후 전국 각 도시에서 치바이스 유작전과 좌담회가 계속해서 열리다.

- 1963년 「세계 10대 문화 거장(巨匠)」으로 선정되다.

3. 제백석의 예술세계와 예술관

(1) 대자연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는 시경(詩境)

생전에 치바이스는 ‘나는 시(詩)가 첫째, 전각(印)이 둘째, 글씨(字)가 셋째, 그림(畵)이 넷째이다.’ 라고 했다. ‘어찌하여 화가가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시를 최고로 칠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그러나 제백석의 인생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그가 왜 이토록 자신의 시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모든 예술의 그 바탕에 시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제백석은 평생 엄청난 분량의 시를 썼고 이를 몇 차례나 시집으로 엮어 출간하였다. 물론 앞으로 제백석의 시에 대한 본격적인 문학연구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차산관 당호 제액

제백석이 화가로 입문하여 서서히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그가 목수 출신인 것을 업신여겨 그림은 맡기되 화제는 못 쓰게 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시를 짓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또 많이 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만으로 그가 자신의 시를 최고라 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타고난 시심(詩心)의 소유자였으며 예술적 영감이란 것은 바로 시심 그 자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 짓는 일(詩作)’ 에 얼마나 결벽증을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두 번째 여행에서 “칠석날 난창에서 시를 짓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새삼 시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깨달았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해서 기초가 튼튼해야만 되는 일이었다. 평측(平仄) 운운하며 다만 몇 구절 흥얼거릴 수 있다고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내 당호인 ‘차산음관(借山吟館)’ 에서 ‘음’ 자를 빼버리고 그냥 ‘차산관’ 이라 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차산음관도 와 차산관 당호 제액
차산음관도

이러한 그의 예술관은 일찍이 문인화의 비조(鼻祖)인 왕유(王維699~759)의 시와 그림을 두고 소동파(蘇軾1037~1101)가 평한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 와 문동(文同1018~1079)의 묵죽(墨竹)을 두고 조보지(晁補之1053~1110)가 말한 ‘흉유성죽(胸有成竹)’ 이라는 시화동원(詩畵同源) 오랜 전통 위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제백석의 그림 중에서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里出山泉) -개구리 울음소리가 십리 계곡을 흘러가다> 이 그러한 시경(詩境)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개구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깊은 계곡물을 따라 단지 올챙이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쳐 내려오고 있다. 개구리 한 마리 보이지 않지만 개구리 울음소리가 멀리 십리 밖 계곡까지 울려 퍼지는 시경을 넉넉히 표현하고 남음이 있는 그림이다. 이것이 바로 제백석의 진면목(眞面目)인 것이다.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里出山泉)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里出山泉)

바이스 선생은 그림을 그리실 때 실제 사물도 안 보시고 그림 초본이나 초고도 없이 그리신다. 푸른 하늘 아래 흰 종이를 펼쳐놓고 자유자재로 그리신다. 그러나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과 새, 물고기와 벌레, 산과 물, 그리고 나무들이 마치 그의 손 밑에서 자라난 것처럼 생생하고 변화무쌍하게 펼쳐진다. 선생은 진정‘가슴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품고’ ‘손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다. - 현대화가 리커란(李可染1907-1989)의 회고

제백석 그림에 있어서 초충(草圖)과 화훼(花卉)와 화조(花鳥)는 물론 인물(人物)과 산수(山水)까지도 한마디로 말하면 ‘대상에 대한 절대적 사랑’ 이 흘러넘친다. 쥐나 오뚝이 등이 때로는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그의 그림 속 화면에는 ‘생명에 대한 사랑’ 으로 가득 차 있다. 늦은 밤 등잔 아래까지 기어나온 쥐들이 마치 자기들도 책을 읽는지 펼쳐놓은 책 위에 엎드려 있고, 당근을 갉아먹고 있는 청설모, 지렁이 하나를 물고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 병아리 그림도 있다. 얼마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타일상호 / 서락도책의 쥐그림들
타일상호 / '서락도책'의 쥐그림들

제백석의 그림은 동심(童心)으로 가득찬 천진난만(天眞爛漫) 세계이다. 어린 아이의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가능한, 사물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물활론(物活論)의 세계, 마침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세계 - 장자(莊子)가 말하는 제물론(齊物論)의 세계인 것이다.

(2) 생활 속에서 피어난 예술 - 평범(平凡) 속의 비범(非凡)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놔두고 신기한 것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사진작괴(捨眞作怪-진실을 버리고 기이한 것만 취함)이다.

그림이 현실을 너무 빼다박으면 천박해(淺薄)해지고, 그렇다고 현실을 너무 도외시(度外視)하면 부박(浮薄)해진다.

그림은 ‘닮음과 담지 않음 사이(似與不似之間)’ 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제백석의 그림에 대한 짤막한 어록(語錄)들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다. 물론 인물화에 있어서 귀신이나 신선을 그린 전통적인 소재는 예외이지만, 제백석의 그림 소재는 일상에서 만나는 소박한 대상들이다. 이전의 문인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소재들을 그는 그의 특수한 경험 속에서 꺼집어 내어 당당하게 자리매김한다. 그림의 소재들은 유년기의 가난과 고통 속에서 각인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목동 시절 나뭇짐을 내려놓고 개울에 발을 씻을 때 발가락을 물어뜯었던 새우, 긴 장마에 먹을 것이 없이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으니 물기가 고이고 그곳에 개구리가 살았던 황당한 기억이 있다. 남방으로 여행하면서 처음 맛본 열대과일 여지(荔枝, litchi), 경극배우 매란방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보게 된 나팔꽃 등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의 소재를 확장해 나갔다.

제백석은 한마디로 말하면 리얼리스트이다. 그러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파하는 사실주의를 넘어 자신의 마음속(意境)에 비춰진 현실을 그렸으니 이것이 바로 제백석의 대사의화(大寫意畵)이다.

(3) 민중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평화의 세계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내 조국의 풍요로운 산과 강 그리고 흙을 사랑하고,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에 한평생 평범한 중국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썼다. 최근 몇 년 동안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평화(平和)였다는 것을 …… - 「세계평화상 수상 소감」중에서

그는 평생 먹고살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목공에서 출발하여 화가가 되었지만 그는 평생 노동의 가치와 그 근본을 잊지 않았기에 ‘나무 거사(木居士)’ ‘늙은 목수 맏이(老木一)’ 라는 호를 즐겨 썼다. 그리고 그의 그림의 소재들은 민중의 가난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민화(民畵)적 성격이 강하게 배어 있다. 장수(延年益壽)와 복(奭福)을 빌고, 많은 자식을 낳기 바라는(多子) 민중들의 소박한 소망을 그림 속에 담았다.

연연익수 / 다자도
연연익수 / 다자도

그의 출신 성분이나 이러한 민중적 성격이 공산주의 이념과 맞아떨어져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제백석을 인민화가로 추대하고 예술계의 수장으로 떠받들게 되었지만, 사실 그가 세계평화상을 수상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수상소감으로 말한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일평생 추구한 세계는 ‘싸움과 전쟁이 없는 화평(和平)’ 이었고 이는 좌나 우냐 하는 이념을 떠난 민초들의 가장 원초적인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에 대한 염원이었다.

(4) 풍자와 해학

제백석의 그림에는 유머가 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되면 인생의 그 깊은 의미에 빙그레 웃게 되는 그림이 많다. 그리고 때로는 유머를 넘어 세상과 세태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기도 한다.

백성들은 굶어죽고 나라는 망해도 오직 자신과 가문만은 언제나 지키는 기득권자자들이나 토호들을 풍자하여 부도옹(不倒翁-오뚝이) 그림을 그렸으며, 대의명분도 없이 오로지 이익을 쫒아 동족 간에 살육을 벌이는 군벌들을 풍자하기 위해 ‘가마우지는 가마우지 고기를 먹지 않는다’ 는 시와 함께 가마우지 그림을 그렸다.

일본 점령기에는 <군서도(群鼠圖)> 를 그려 중국을 수탈하는 일본을 쥐에 비유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친구들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인생 말년에 난리를 겪는 나로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니 늙은 목숨은 저승사자도 두렵지 않다.’ 고 대답했다.

이식 / 발재도(주판) / 오뚝이 / 산수(가마우지)
이식 / 오뚝이 / 발재도(주판) / 산수(가마우지)

(5) 만남과 인연을 중시하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고결한 삶

그는 평생 겸허한 자세로 불치하문(不恥下問)하며 끝없이 자신을 혁신해 왔으며 인생의 여러 시기에 만나 도움을 받았던 스승과 친구, 후배와 제자들에 대한 존경과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절절한 애도를 다하였다.

(제백석의 화력(畵歷)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은인이 있으니 12살 아래인 천쓰쩡(陳師曾)과 서른두 살 아래의 서베이홍(徐悲鴻)이다. 천스찡은 제백석이 남의 그림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일깨워준 스승이었으며 일본 전시를 통해 제백석의 이름을 국내외에 알리기도 했다. 서비홍은 프랑스에 유학하여 정통 유화를 배운 최초의 현대화가로 일찍이 제백석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 북경 예술계에 제백석의 마땅한 위치를 확립시켜준 후배이자 탁월한 교육행정가였다.)

일찍이 서태후의 대필화가인 내정공봉(內廷供奉)으로 추천받았으나 이를 거절했으며, 각 지역의 토벌들과 군벌들이 모두 제 이익을 쫒아 국가와 인민을 버린 채 미쳐 날뛰었던 때나 일본제국주의가 침탈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때나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으나 조국은 여전히 국공내전을 치르던 시기에도 그는 그 어떤 권력에도 아부하지 않았으니, 그가 장개석과 모택동에게 그림을 선물한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보인 존경과 환대에 보답하는 형식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에 대한 자신의 여망(餘望)을 담았던 것이다.

서예의 필획을 느끼게 하는 그림
서예의 필획을 느끼게 하는 그림

4. 제백석 화법(畵法)과 각법(刻法)의 특징

나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전각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아직 공부가 모자라 ‘그림이 경지에 오르면 서예의 필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 제백석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경지가 그 특징이니 나는 제백석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앝은 개울을 발목을 걷고 건네는 심정으로 몇 마디 덧붙이고 한다.

서양화는 유화가 중심이고 유화는 덫칠하기가 기본 기법이다. 서예는 동양예술의 정수(精髓)로 붓이 한 번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고 절대 개칠(改漆)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림과 글씨가 다른 영역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은 그림도 한 번 그으면 다시 덧칠하지 않는 경지를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백석 그림에 있어서 그 조형원리는 일필휘지(一筆揮之) 하는 서예의 필법과 음양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전각의 공간배치가 대원칙으로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전각은 서예의 필법 그대로 조각도를 한 번 그을 뿐 결코 사방으로 돌려가며 깎지 않는 일도법(一刀法)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1) 생략과 여백 - 허허실실(虛虛實實)의 표현기법

제백석 조형언어의 가장 큰 힘은 생략(省略)에 있다. 복잡한 대상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본질을 필묵언어로 추출해 내는 데 있다. 꽃을 그려도 잎과 줄기는 대강만 그리고 꽃만 집중하여 표현한다든지, 소나 병아리를 그려도 소의 꼬리만 선으로 표시하고 나머지는 먹의 번짐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심지어는 뿔을 그리되 한 쪽 뿔만 농묵(濃墨)으로 처리한 그림도 있고, 병아리는 부리와 발가락만 윤곽선으로 표현하는 데도 그렇게 사실적일 수가 없다. 전체 여러 마리를 그리지만 두세 마리만 노랗게 채색할 뿐 나머지는 담묵(淡墨)으로 처리해 버린다. 초충과 화훼에서도 채소는 대담하게 소략하지만 벌레는 세밀하게 그린다. 그리고 벌레를 그림에 있어서도 특정 부분만 세밀하게 그린다. 잠자리의 날개는 하나의 묵선으로 처리하고 머리 부분만 공필화로 그리는 식이다. 산수에 있어서도 화면 전체를 빽빽하게 채운 그림도 있지만 화면을 크게 상하로 또는 상중하로 분할하여 소략하게 그리는 부분과 치밀하게 그리는 부분이 있고 주된 대상만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여백으로 처리하는 대담성을 보인다.

말하자면 제백석의 그림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 본인은 자유자재로 표현하는데 보는 사람들은 모두 왜 그렇게 그렸을까 생각하게 하니 그것이 바로 제백석 그림의 매력인 것이며 이것을 일러 ‘격외지격(格外之格)-이전까지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양식’ 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평생 무수한 그림을 그리고 그린 온축(蘊蓄)을 통해 이르게 된 것이다.

(2) 음양의 조화 -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직필(直筆)과 강열한 색채 대비

제백석은 자신의 호를 ‘삼백석부옹(三百石富翁)’ 으로 지을 만큼 평생 도장을 새기고 새겼다. 전각(篆刻)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돌에 칼로 음과 양을 새기는 예술’ 이다. 전각은 음각과 양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소(疎 성김)와 밀(密 빽빽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전각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번 전시를 통해 어렴풋이 깨달은 바는, ‘제백석 예술의 비밀은 아무래도 전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서(書) 화(畵) 각(刻)이 하나로 통일되는 그의 그림은 전각의 소소밀밀(疎疎密密)한 공간 배치와 음양의 극대화가 그림에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인 것이다. 일필휘지로 내리긋는 직필(直筆)의 힘은 분명 그의 일도법(一刀法)에서 나온 것이고, 소소밀밀한 공간 배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허허실실이란 말로 이미 설명한 대로이고, 음양의 극대화는 강렬한 색채 대비로 말할 수 있겠다.

제백석 인장 / 전서대련
제백석 인장 / 전서대련

(3)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세계

나는 제백석의 그림을 한마디로 노자(老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세계’ 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과 얼핏 보면 치졸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을 그리다가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그림까지 그는 진정 ‘삼라만상을 가슴에 품고 손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한 화가였다.

이번 전시에 대한 유감(遺憾)

1. 제백석의 예술세계를 조망(眺望)하기엔 턱없이 미흡한 전시

오늘날 중국의 회화예술이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를 맞아 서구의 모든 예술사조(藝術思潮)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화려한 온갖 기이한 예술세계를 펼쳐 보이면서도 전통적인 격조를 잃지 않고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제백석의 공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전시에 내걸린 제백석 그림은 사실 50여 점 내외였다. 수만 점에 달하는 제백석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기에는 그 작품들의 수나 격이 다소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제백석의 고향인 상담시제백석박물관에서 온 목장(木匠) 시대의 자료들도 소중하고, 호남성박물관 소장작들도 전반기에만 국한 되지 않고 후반기 작품들도 있어서 ‘치바이스의 예술의 전모는 아니더라도 그 본질을 보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는 주체 측의 변명이 전혀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각 장르별로 제백석 예술의 연대기적 변천사를 살피기에는, 그리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근대의 전통을 현대로 넘겨준 그의 미술사적 공로와 위치를 확인하자면, 이번 전시는 턱없이 미흡한 전시였다. 전대(前代)의 팔대산인(八大山人 본명은 주탑朱耷 1624~1703)이나 양주팔괴(揚州八怪)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청말의 등석여(鄧石如1743~1805) 조지겸(趙芝謙1829~1884) 임백년(任伯年1840-1895) 오창석(吳昌碩1844-1927)의 작품들과 당대(當代)의 같은 연배의 황빈홍(黃賓虹1864-1955)이나 나이로는 한 세대 아래에 해당하는 반천수(潘天壽1897~1971) 장대천(張大千1899-1983) 부포석(傅抱石1904-1965) 이가염(李可染1907-1989) 등의 작품도 함께 보여주어야 미술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양주팔괴 : 중국, 청 ∙ 건륭년간(1736~95), 장쑤성 양주에 모인 8인의 개성파 화가들을 말한다. 금농(金農), 황신(黃愼), 이선(李禪), 왕사신(汪士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을 가리키나, 그 외에도 고봉한(高鳳翰), 민정(閔貞)을 더하기도 한다. 화암(華嵒)을 추가하여 양주화파라고도 부른다.

2. 오마쥬 전에 대하여

사석원의 새우/호랑이
사석원의 새우/호랑이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일개 관람객인 나로서는 그 세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번 제백석전은 이른바 사드사태로 인하여 원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차질이 빚어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급히 오마쥬전을 기획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으니, 관람하는 내내 당황(唐惶)과 황당(荒唐)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심히 불편하였다.

오마쥬 전은 사석원 전이나 다름없었다. 제백석전에 제백석의 그림이 50여 점인데 오마쥬 전에 사석원의 그림이 10점이나 된다면 이를 누가 제백석전이라 할 것인가? 일필휘지로 휘두르는 사석원의 자유분방함과 화려함을 나도 좋아한다. 그러나 ‘온축(蘊蓄)과 절제(節制)가 없는 방일(放逸)함’ 과 '자유롭데 격을 벗어나지 않는 격외지격(格外之格)' 의 세계는 분명 다르지 않는가 말이다. 이는 내가 사석원을 폄하(貶下)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백석문하주구(白石門下走狗)로서 40년 세월 사숙(私淑)했다는 작가의 고백만 믿을 것이 아니라 작품을 두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번 오마쥬 전시에서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리어카에 배추를 가득 싣고 전시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았으나 이는 제백석의 그림 세계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상당히 참신한 발상이었다고, 사석원의 그림 10점보다 최정화의 배추 리어카 하나가 휠씬 좋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백석은 배추 그리기를 좋아했으니 그는 배추를 야채 중의 왕으로 생각했다. 제백석의 배추 그림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그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물론 최정화의 이번 작업이 제백석 예술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누군가의 귀뜀에 의해 급조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제백석-배추 /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배추와 하석 박원규의 전각 작품 / 이숭호-전각작품
제백석의 배추 /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배추, 하석 박원규의 전각 작품 / 이숭호-전각작품

차질을 빚은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호남성 서예가들의 작품과 우리나라 전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제백석과의 상관성을 설명하기엔 주체 측이 너무 성의가 없었다. 다만 가장 공부를 많이 탄탄하게 한 서예가로 현역작가 중 유일하게 화제를 제대로 적을 수 있는,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1947~ ) 선생의 작품과 백석의 ‘단도직업(單刀直入)의 일도법(一刀法)’ 을 여실하게 보여준 이숭호(李崇浩)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다소 위안이 되었다.

3. 우리 화단에 끼친 제백석의 영향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못한 전시

실제로 동시대에 제백석과 교유했던 우리 미술가들도 있으며, 그리고 해방이후 우리 미술에 덧씌워진 일본풍(왜색)을 걷어내기 위하여 우리 예술과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미술운동을 펼치면서 제백석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과 시사(示唆)를 받은 우리 작가들이 있었다. 사실 어설픈 오마주 전보다는 이들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실제로 한말(韓末) 상해로 망명하여 서화가로 활동했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翼1860~1914)이나 중국을 다녀오면서 제백석과 교류했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으며, 김규진의 아들로 직접 중국에 유학을 가서 제백석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청강(晴江) 김영기(金永基1911~ 2003), 초기 죽사(竹史)라는 호를 쓰며 김규진에게 그림을 배운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1904~ 1989), 그리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의 제자로 해방 이후 서울대에서 제자를 길러낸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1912~2005), 이들은 직간접으로 제백석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도록에 끝자락에 실린 미술사가 홍선표(洪善杓)의 「한국 화단의 치바이스 수용」이라는 소논문은 매우 중요한 글이다. 다만 소재의 동일함과 구도의 유사성을 두고 자칫하면 표절 논쟁을 유발시킬까 염려스러운 점이 있지만, 이는 동양화의 전통양식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에 생기는 기우(杞憂)일 뿐이다.

4. 이번 전시를 알리는 주요 언론의 자세에 대한 유감

이번 전시에 대한 주요 일간지의 보도는 한마디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 ‘제백석도 부끄러워할 제백석전’ 이었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설령 사실이 그러하더라도 제백석의 진품이 대거 내걸리는 전시는 일찍이 없었던 굉장히 중요한 문화행사인 것이다. 사드사태로 인하여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난항을 겪고 있더라도 민간 부문에서 이러한 냉각 관계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막힌 물꼬를 틔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터인데, 돕기는커녕 비난만 하고 있으니 이런 언론의 태도는 참으로 한심한 작태인 것이다. 특히나 몇몇 진보를 자처하는 언론에서 이번 전시를 지난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임명한 예술의 전당 이사장 일 개인의 실적 과시와 무능으로 연결지어 비난하는 것을 보고는, 참으로 이 사람들이 문화를 제대로 알고 이해할 자질과 능력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제백석 전의 실패는 정권 차원을 떠난 정부의 외교적 무능뿐만 아니라 우리 민간 부분의 문화적 역량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제대로 된 제백석전을 기대하며

최근 얼어붙었던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우리와 미국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는 근시적인 안목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국가 비전과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 세기 너머를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한 것이다.

먼 어느 시점에라도 제백석전을 다시 연다면, 그때에는 제대로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백석의 예술의 다양한 장르에 걸친 그 변천사를 살펴보려면, 또 전대나 당대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한 제백석 예술의 특징을 제대로 살피려면, 제백석이 후대에 끼친 영향과 근대에서 현대로 이끌었던 회화사적 가교(架橋)의 역할을 확인하려면, 제백석의 작품만이라도 최소 150여 점은 되어야 할 것이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최소 50여 점은 전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장소는 마땅히 국립중앙박물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굳이 한중수교를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한중일 동양 3국은 물론 대만까지 포함하여 제백석이 일평생을 통해 그토록 희구했던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제백석전》을 순회 개최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념과 이해관계를 초월한 진정한 문화의 힘이 아니겠는가?

전시기간은 2017.11.6~12.10까지이고 서울 전시에서 말썽이 많았던 오마주 전은 중국 호남성 서예인들의 작품만 전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 이번 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놓치고 지나친 한 작품이 있어서 내가 작은 사족(蛇足)을 달고자 한다.

제백석이 쥐를 그린 『서락도책(鼠樂圖冊)』에 나오는 <자칭(自稱)>이라는 그림이다.

자칭(自稱)
자칭(自稱)

저울추의 맞은편 저울대의 고리에 매달린 쥐를 그린 그림이다. ‘자칭(自稱)’ 이란, 잘 알다시피 ‘스스로를 자랑 삼아 일컫는 말’ 이다. 그런데 원래 ‘칭(稱)’ 이라는 글자는 ‘저울’ 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자칭’ 이라 하면 ‘스스로 자신의 무게를 달아 본다’ 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제백석은 호기심 많고 장난기 어린 쥐가 저울대 고리에 매달린 것을 보고는 그 장면이 너무 재미있어 그림으로 그리고 ‘자칭’ 이란 제목을 붙인 것이다. 이것이 제백석의 유머(諧謔)이다. 그런데 제백석은 왜 그림의 제목을 ‘자칭 - 스스로를 달아 보다’ 라고 붙였을까? 여기에 제백석 그림의 심오함, 단순한 유머를 넘어 인생의 깊이가 있는 것이다.

한갓 미물인 쥐도 제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달아 보는데, 그 잘난 인간은 어찌 자기 자신을 그토록 모르는가? 이것이 제백석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화두(話頭)이다. 한 마디로 ‘너 자신을 알라’ 고 그 잘난 인간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 참고 문헌 》

1. 치바이스(齊白石 Qi Baishi) - 한중수교 25주년 기념특별전 예술의전당 2017년
※ 이번 전시에 제작한 전시도록이다.

2. 쇠똥 화로에서 향내 나다 - 중국화 거목이 된 시골뜨기 목수 치바이스 자서전 치바이스 / 김남희 학고재 2003년
치바이스가 누구냐 - 중국화 거장이 된 시골 목수 치바이스 / 김남희 학고재 2012년

※ 치바이스가 구술하고 제자인 장츠시(張次溪)가 기록한 자서전으로 원제(原題)는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이다. 이 책은 바이스가 자신이 태어나서 죽기 10년 전(85세)까지 살아온 일생을 구술한 것이며, 마지막 일부는 바이스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180여 점에 이르는 제백석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책의 구판은 절판되었고 최근에 제목을 바꾸어 같은 출판사에서 재출간하였다.

이번 전시에 있어서 제백석의 연보 작성과 어록 인용은 전적으로 이 책에 의존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제백석뿐만 아니라 중국미술에 대한 제대로 된 전문가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인가? 본문

3. 中國名畵家全集 齊白石 徐改 河北敎育出版社 2000년
4. 中國書法家全集 齊白石 河北敎育出版社 2005년
5. 齊白石 畵集 (上) (下) 人民美術出版社 2003년
6. 中國近現代名家 作品選粹 齊白石 花鳥 人民美術出版社 2003년
7. 中國畵名家經典畵庫 齊白石 賈德江 河北美術出版社 2003년
8. 中國近現代書畵賞玩 1~4 湖南美術出版社 2006년
9. 中國近代書畵目錄 1~2 南方出版社 1999년
10. 中國現代書畵目錄 1~2 南方出版社 1999년
11. 대륙을 품어 화폭에 담다 徐敬東 徐欣煒 / 장준석 고래실 2002년
12. 중국회화이론사 曷路 / 강관식 돌베개 2010
13. 중국 근현대 미술 - 전통을 딛고 새로운 지평을 열다 郎紹君 / 김상철 시공사 2005년
그 외 중국 고서화골동 경매도록 다수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