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탄생 500주년, 서산대사의 행장을 다시 살피다
올해 탄생 500주년, 서산대사의 행장을 다시 살피다
  • 허섭 허섭
  • 승인 2020.01.29 00:08
  • 업데이트 2020.01.2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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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그대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후에는 내가 그대로구나
(서산대사 임종게)

서산대사의 진영은 현재 해남 대흥사와 양산 통도사에 모셔져 있다.
서산대사의 초상과 친필 임종게. 서산대사의 진영은 현재 해남 대흥사와 양산 통도사에 모셔져 있다.

올해 경자년(庚子年)은 서산대사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월 16일은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휴정(淸虛休靜)이 저 영원한 적멸의 세계로 들어간 날이다. 그날을 맞아 여기 몇 가지 단상을 적어 올린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전거시아) 팔십 년 전에는 그대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팔십 년 후에는 내가 그대로구나

이 대체 무슨 말인고? 청허휴정(西山休靜 1520~1604)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임종할 무렵 영정(影幀)에 직접 남긴 글-영찬(影讚)이라고 전한다. 필자는 20대 후반 첫 직장을 구하면서 ‘자기소개서’ 를 쓰면서 이 말씀을 인용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아지 못게라(不知)’ 이다.

여기 서산대사가 지은 몇 편의 시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몇 구절을 소개하면서 서산대사와 관련한 내 생각의 편린(片鱗) 몇 조각을 늘어놓아 본다.

오도송(悟道頌)

髮白非心白 (발백비심백)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안 센다고
古人曾漏洩 (고인증루설) 옛사람이 일찍이 말했던가
今聞一聲鷄 (금문일성계) 이제 닭 우는 소리 듣고
丈夫能事畢 (장부능사필) 장부의 큰 일 모두 마쳤네
忽得自家處 (홀득자가처) 홀연히 본 고향을 깨달아 얻으니
頭頭只此爾 (두두지차이) 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萬千金寶藏 (만천금보장) 팔만사천의 보배인 대장경도
元是一空紙 (원시일공지) 원래 하나의 빈 종이로다

* 서산대사는 18세에 출가하여 21세에 정식으로 수계를 받았으며 30세에 어느 고을을 지나다가 ‘한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침을 얻었다’ 고 한다.

임종게(臨終偈)

千計萬思量 (청계만사량) 생각하고 꾀하던 모든 것들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화롯불에 떨어진 한 점 눈이로다
泥牛水上行 (니우수상행) 진흙으로 만든 소가 물 위로 가니
大地虛空裂 (대지허공렬) 대지와 허공이 꺼져버렸네

* ‘紅爐一點雪/紅爐點雪’ 은 ‘도를 깨달아 의혹이나 번뇌가 일시에 사라짐’ 을 뜻하는 말이나 때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것’ 을 뜻하기도 한다. 여러 조사들의 선시에 종종 나오는데 성철스님의 출가 시에도 나온다.

* ‘泥牛’ 란, 일종의 선어(禪語)로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 라는 뜻으로 수행자(修行者) 즉 구도자(求道者)로 해석할 수 있다.

‘泥牛入海’ - 진흙소가 바다로 들어가니 흙으로 만든 소는 물로 들어가면 흙이 물에 녹아 더 이상 소일 수 없는 딜레마를 뜻한다. 일종의 화두인 것이다. ‘泥牛水上行’ 도 같은 의미이다.

내가 자주 쓰는 선구(禪句)로 <作泥牛以耕心田 - 흙으로 소를 빚어 마음밭을 갈다> 라는 말이 있으니, 20대 초반에 대표적인 선서의 하나인 『벽암록(碧巖錄)』 읽으며 흉내내어 본 자작구(自作句)이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니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구름이야 본래 실체가 없는 것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살고 죽고 오고 감이 또한 그러하다오

삼몽사(三夢詞) - 세 개의 꿈

主人夢說客 (주인몽설객) 주인은 손님에게 제 꿈 얘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객몽설주인) 손님은 주인에게 제 꿈 얘기를 하네
今說二夢客 (금설이몽객) 지금 두 꿈 얘기를 하는 나그네도
亦是夢中人 (역시몽중인) 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어라

* 이 시는 서산이 37세에 이르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직책이 선승(禪僧)의 본분이 아님을 통감하고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한갓 납승으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떠나 전국을 떠돌던 중 금강산 미륵봉에서 지은 선시이다.

독파능엄(讀罷楞嚴) - 능엄경을 읽고

風靜花猶落 (풍정화유락) 바람이 고요해도 꽃은 떨어지고
鳥鳴山更幽 (조명산경유) 새가 울어도 산은 더욱 그윽하네
天共白雲曉 (천공백운효) 하늘은 흰 구름과 함께 밝아오고
水和明月流 (수화명월류) 물은 밝은 달과 함께 흐르네

대우(待友) - 벗을 기다리며 * 소동파의 운을 따라(次蘇仙韻待友)

夜深君不來 (야심군불래) 밤은 깊은데 님은 아니 오고
鳥宿千山靜 (조숙천산정) 새들도 잠이 드니 온산이 고요하네
松月照花林 (송월조화림) 소나무 사이로 달빛은 꽃숲을 비추니
滿身紅綠影 (만신홍록영) 붉고 푸른 그림자 온몸에 가득하네

밤은 깊어 가는데 / 그댄 어이 오질 않나 // 새들도 잠이 들어 / 산은 온통 적막한데 // 소나무 걸린 달이 / 꽃 수풀을 비추이니 // 이내 몸은 알록달록 그림자 지네

※ 내 좁은 소견으로는 선시(禪詩)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야보도천(冶父道川 생몰연대 불명 宋代 1100년대에 살았던 인물)이, 우리나라에서는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이 아마 최고이리라. 그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는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과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가 있는 정도이다. 서산은 많은 시를 남겼으나 깨달음의 오롯한 경지를 드러낸 작품보다는 이 시처럼 정감어린 작품들이 오히려 많다. 당대 선비들의 일반적인 경향을 뛰어넘어 훨씬 더 문학적이다. 이는 그가 유불도(儒彿道) 삼교(三敎) 통합의 정신세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며, 특히 20대까지는 유가의 선비로서 문학적 소양을 착실히 쌓았음에 연유할 것이다.

청허가(淸虛歌) - 나의 노래는

君抱琴兮倚長松 (군포금혜의장송) 그대 거문고 안고 늙은 소나무에 기대었으니
長松兮不改心 (장송혜불개심) 늙은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로다
我長歌兮坐綠水 (아장가혜좌녹수) 나는 긴 노래 부르며 푸른 물가에 앉았으니
綠水兮淸虛心 (녹수혜청허심) 푸른 물은 맑고 빈 마음이로다 (내 마음이어라)
心兮心兮 (심혜심혜) 마음이여, 마음이여!
我與君兮 (아여군혜) 다만 그대와 나뿐이로다

환향곡(還鄕曲) - 라라 리리리 라라

嚗然放杖天魔走 (박연방장천마주) 주장자 내려치니 천마가 달아나고
古路分明脚不差 (고금분명각부차) 옛 길이 분명하여 걸음이 어김없네
生死去來爲一貫 (생사거래위일관)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을 하나로 뚫었으니
囉囉哩哩哩囉囉 (라라리리리라라) 라라 리리리 라라

* <오고 감에 걸림이 없으니, 오는 것이 가는 것이요, 가는 것이 오는 것이다.> - 이를 안다면 과히 죽으면서도 닐니리랄라 콧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가 지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온 시 한 편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에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지니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간 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께서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한시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이 지은 「야설(野雪)」이라는 작품인데, 서산대사의 시라고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왔다.

『선가귀감 / 서산대사집』 법정(法頂) / 박경훈(朴敬勛) 역 대양서적 1973(이 책은 동 출판사가 기획한 한국명저대전집 시리즈 중의 한 권이다.)
『선가귀감 / 서산대사집』(법정(法頂) / 박경훈(朴敬勛), 대양서적. 1973). 이 책은 동 출판사가 기획한 한국명저대전집 시리즈 중의 한 권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의 한 구절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說者는 爲敎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니라.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 셋째이니, 이른바 가섭존자가 선의 들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부처님 일생에 말씀하신 것이란, 49년 동안 말씀하신 다섯 가지 교인데, 첫째는 인천교 둘째는 소승교, 셋째는 대승교, 넷째는 돈교, 다섯째는 원교이다. 이른바 아난존자가 교의 바다를 널리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다. 또한 마음이 선법(禪法)이고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한 맛(一味)라도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선과 교의 두 길을 가려 놓은 것이다.

- 三處者는 多子塔前에 分半座함이 一也요, 靈山會上에 擧拈花함이 二也요, 雙樹下에 槨示雙趺함이 三也니 所謂迦葉의 別傳禪燈者가 此也라. 一代者는 四十九年間 所說五敎也니 人天敎가 一也요, 小乘敎가 二也요, 大乘敎가 三也요, 頓敎가 四也요, 圓敎가 五也니 所謂阿難의 流通敎海者가 此也라. 然則禪敎之源者는 世尊也요, 禪敎之派者는 迦葉阿難也니 以無言으로 至於無言者는 禪也요, 以有言으로 至於無言者는 敎也라. 乃至心是禪法也요 語是敎法也라. 則法雖一味나 見解則天地懸隔이니 此는 辨禪敎二途하니라.

내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정현종 시인의 시론 강의 첫 시간이었다. 시인은 시론을 강의하면서 어찌 한갓 중놈의 말을 인용하는 것인지 아무도 그 속내를 알 수 없었으니, 돌이켜 보니 시(詩)란 곧 ‘말로써 말 없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 이니 시인이란 이런 무모하고 대책 없는 모순의 형역(形役)을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해 여름방학 나는 고향의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법정 스님이 번역한 『선가귀감』을 읽으며 알 듯 모를 듯한 선(禪)의 세계에 빠져들며 선(禪)과 교(敎)에 대하여 이렇듯 명쾌한 언명(言明)이 세상천지 또 어디에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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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이 승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한 것은 그 이전의 호국불교의 전통과는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진 공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가 단순히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 교리에 의하자면 부처님의 제자가 차라리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지언정 어찌 스스로 살생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분명 이러한 지점까지 생각을 몰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피폐해질 대로 쇠락하였으며 승려들은 천한 신분으로 전락하여 도성 사대문 안으로도 들어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함으로써 땅에 떨어진 불교의 입지를 수도자의 도력으로 다시 회복하고자 하였음이며, 그 무엇보다도 전쟁의 참화에서 중생을 구하겠다는 부처님의 대자비심(大慈悲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살생으로써 더 큰 살생을 막겠다는 논리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 땅의 불교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저 멀리 삼국시대로 올라가 삼국통일의 전란 속에서 오로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으로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졌던 원효(元曉 617~686)의 정토불교(淨土佛敎)와, 화엄사상의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이념으로 통일국가의 기반을 닦았던 의상(義湘 625~702)의 불국토(佛國土) 사상이 있었고, 라말려초(羅末麗初)의 교체기에 전국을 떠돌며 이 땅에 수많은 전설과 비기(秘記)를 남긴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있었으며, 고려로 넘어와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에 왕자의 신분으로 화엄승으로 출가하여 천태종을 창립하여 교선일치를 이루어 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이 있었으며,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며 정혜결사(定慧結社)로 왕실귀족 불교의 타락상을 걷어내고 불교를 혁신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있었으며, 려말선초(麗末鮮初)에는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이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역사적 변혁기에 시대적 사명에 대해 고뇌했던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과 그 제자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가 있었으며, 중국 임제종(臨濟宗)을 조선에 가져와 심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있으며, 서산대사는 법맥을 따지자면 태고보우의 제7대손에 해당한다.

과히 서산의 불교는 이 모든 것을 통섭한 조선 불교의 완성이었다 할 것이다. 조선 유학의 완성을 후대의 다산(茶山)이 이루었다면, 조선 불교의 완성은 서산(西山)이 앞서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의 근간(根幹)은 서산이 구축하였으니, 敎를 부정하지는 않되 禪을 근본으로 삼는 그의 사교입선(捨敎入禪)이 한국불교의 근본 입장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것이다.

※ 오늘날 한국불교의 본류라 할 조계종(曹溪宗)은 중국 임제종(臨濟宗)을 들여온 종파로, 멀리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생몰년 미상)를 초조(初祖)로 삼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태고보우가 중흥조이니 그는 중국 임제종의 19대조인 석옥청공(石屋淸珙)으로부터 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임제종을 열었으니 그가 곧 조계종의 제1대 종사이다. 조계종이 해방 후 대처승단인 태고종(太古宗)에 맞서 불교정화운동을 벌이면서 태고종이 종조(宗祖)로 모시고 있는 태고보우와 차별화를 위해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의 정신을 잇는다는 뜻으로 그를 조계종의 중흥조로 모시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게 되니 성철 스님이 이에 반대 아비와 할애비를 바꾸는 환부역조(換父易祖)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성철이 종정이 된 후에 종맥을 바로 잡으려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바로잡히지 않은 셈이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돈점(頓漸) 논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 조계종의 ‘조계(曹溪)’ 라는 말은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비조(鼻祖)인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별명에서 연유한 것이다. 혜능이 선법을 크게 선양했던 곳이 조계의 보림사(寶林寺)이므로 그를 가리켜 ‘조계’ 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벌였던 순천의 송광사(松廣寺)가 조계산에 있었기에 이후 조계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들 하나, 지눌 당시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지눌은 길상사를 수선사(修禪寺)라 개칭하고 산이름도 조계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계라는 명칭은 지눌 이전에도 이미 있었기에 조계종은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에 맞서 교종에 흡수되기를 거부했던 구산선문을 총칭하는 말로 받아들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조선조에 내려와서는 불교의 특정 종파를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 속에 선종과 교종이 함께 있다는 의미로 ‘선교양종(禪敎兩宗)’ 으로 불리었으며, 서산대사 이후에 조계라는 말이 다시 쓰이게 된 듯하다. 한말에 외국의 불교 종파가 들어오는 사태를 맞게 되자 ‘조선불교선교양종’ 이라는 이름으로는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없어 1908년에 원종(圓宗)이라는 이름으로, 1911년에 임제종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불리우다가, 이후 다시 선교양종으로 되었다가 비로소 1941인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본산으로 하는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법적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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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곡(回心曲) 테이프를 틀어드리면 그 가사 내용을 아시는 둥 모르시는 둥 마냥 편안하게 잠에 드시던 나의 할머니, 스물한 살에 낳은 큰 아들인 내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는 머리를 풀고 길게 곡을 하셨던 할머니, 그리고 5년 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 교통사고로 순교(殉敎)한 둘째 소생의 손자까지 앞세우자 마침내 곡기(穀氣)를 끊어 98세로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할머니, 그분께서 평소 즐겨 들으시던 그 회심곡도 서산대사가 포교(布敎)를 위해 지은 불교가사(佛敎歌辭)라 한다.

*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묘비명을 통해 본 서산대사의 생애(출생에서 임종까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임진왜란 의병생활을 마친 후 돌아온 것이 69세, 그 후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칩거하였다. 그의 임종은 참으로 선사다웠는데 제자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전거시아)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그리고 나서 운명하기 직전에 최후로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千計萬思量 (천계만사량)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붉은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泥牛水上行 (니우수상행) 진흙소가 물 위로 걸어가니
大地虛空裂 (대지허공렬)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대사는 마지막 임종게(臨終偈)를 읊고 나서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 가부좌(跏趺座)를 하고 앉아 조용히 잠들듯이 입적(入寂)하였다고 한다. 비명병서(碑銘竝書)의 전문 번역문을 여기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조선 중기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의 한 분이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선생의 작품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백화암에 부도와 비를 각각 세웠는데 구조물들의 형태는 두 절의 것이 서로 다르나 비문은 둘 다 이정구가 쓴 것으로서 내용이 같다. (같은 시기에 세웠던 묘향산 보현사의 비와 부도는 지난 6.25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음.)(『월사집(月沙集)』 제45권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하 역)

©경기문화재연구원
월사집 목판 ©경기문화재연구원

 

서산대사 묘비명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幷序 (유명조선국사국 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 병서)

나는 불교의 교설(敎說)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 불설(佛說)을 즐겨  말하지 않으니, 짐짓 불교를 배척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장으로 허명을 얻어 문병(文柄)을 잡은 지 30여 년이라 승려들이 나의 명성을 좇아 시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날마다 나의 집에 이르렀다. 그래서 식견이 높거나 시를 잘 짓는 승려를 만나면 흔연히 응접하였으니, 이 역시 짐짓 불교를 좋아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내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이미 휴정(休靜) 스님의 명성을 들었고 그의 시가 세상에 많이 전송(傳誦)되었기에 늘 한번 만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송운(松雲) 유정(惟政)은 바로 스님의 전법 사문(傳法沙門)이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경성(京城)으로 자주 나를 방문했었고, 내가 연산(燕山)에 갈 때에는 그가 청천강(淸川江) 가에서 나에게 증별(贈別)의 시를 주면서 스님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밤낮이 다하도록 하였었다. 이때 스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터라 아득히 그 청향(淸香)을 생각하는 마음만 때로 가슴속에 오갔다.

하루는 공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집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세 승려가 밖에서 공경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불러오게 하여 보니 바로 스님의 제자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확흘(矱仡)이었다. 이들이 상자 속에서 책을 꺼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청허당(淸虛堂)의 유고입니다.” 하고는 이어 두 손을 모아 예(禮)를 갖추고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의 도업(道業)은 후세에 길이 전할 만합니다. 그러나 운산(雲山)이 깊고 적막하니, 세월이 오래가면 더욱 민멸(泯滅)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문도(門徒)가 기재한 바로써 행장을 만든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재숙(齋宿)하고 봉함(封緘)하여 천리 길을 가지고 와서 바칩니다. 원컨대 상공(相公)의 글을 받아 비석에 새겨 우리 스승을 불후(不朽)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는 무(無)로써 유(有)를 삼고 허(虛)로써 실(實)을 삼으니, 보존하길 기다려 보존되는 것이 아니요 민멸하길 기다려 민멸되는 것이 아니니 누가 썩어 없어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불후하게 할 수 있겠소. 우리 부자(夫子)는 ‘도가 서로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스님의 도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하니, 세 승려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도는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니, 감히 구차히 같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으면서 다른 것도 있고 다르면서 같은 것도 있으니, 가섭(迦葉)의 정전(正傳)으로 홀로 종풍(宗風)을 천명(闡明)하는 것은 진실로 같으면서 다른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충성하는 것은 어찌 다르면서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상공은 다른 것을 다르다 하고 같은 것을 같다고 하는 분입니다. 우리 스님이 생전에 늘 상공의 풍모를 흠모하셨으니, 은연중에 공과 뜻이 계합하여 명감(冥感)하신 것이 있는 듯합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거듭거듭 무릎을 꿇고 절하며 그해가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탄식하며 “불교에서 스승에게 전심(專心)으로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건대, 스님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고 자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인데 묘향산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란 호도 쓴다. 속성(俗姓)은 완산 최씨(完山崔氏)이며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인 현감(縣監) 김우(金禹)가 연산조(燕山朝)에 득죄(得罪)하여 안릉(安陵)에 귀양 가서 살았기에 그 후대는 안주(安州) 사람이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시주(詩酒)를 즐기며 살았다. 모친 김씨(金氏)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속에 한 노파가 와서 “사내아이를 배태(胚胎)했기에 마님을 위해 축하하러 왔습니다.” 하였는데 그 이듬해 경진년(1520, 중종15) 3월에 과연 스님이 탄생하였다.

스님이 3세 때 부친이 등석(燈夕)에 술 취하여 누워 있노라니 한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을 뵈러 왔습니다.” 하고 두 손으로 아이를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운 뒤 아이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 이름을 운학(雲鶴)으로 지으십시오.” 하였다. 그 노인은 말을 마치자 문을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훌쩍 사라졌다. 이 때문에 스님의 아명(兒名)을 운학이라 불렀다.

스님은 어릴 때 아이들과 놀 때 혹 돌을 세워 불상을 삼고 혹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곤 하였다. 조금 성장하자 풍신(風神)이 영수(英秀)하고 학문에 힘써 나태하지 않았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기에 고을 원님이 귀여워하였다.

9세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10세 때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니, 스님은 외로운 몸으로 의지할 데가 없었다. 원님이 스님을 데리고 경성(京城)으로 가서 성균관(成均館)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성균관에서 스님은 울울하여 뜻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同學) 몇 사람과 남쪽으로 가서 두류산을 유람하며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서(經書)를 탐독하였다. 그러나 늘 일찍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겼고 더욱 사생(死生)의 이치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홀연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알고 드디어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 설법을 듣고 숭인장로(崇仁長老)의 아래에서 삭발하였다. 그리고 7, 8년 동안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고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다.

하루는 스님이 탄식하며 “내가 출가한 본의가 어찌 여기에 있으리오.” 하고는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 반납하고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삼몽사(三夢詞)〉를 지었는데,

主人夢說客 (주인몽설객) 주인은 손님에게 제 꿈 얘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객몽설주인) 손님은 주인에게 제 꿈 얘기를 하네
今說二夢客 (금설이몽객) 지금 두 꿈 얘기를 하는 나그네도
亦是夢中人 (역시몽중인) 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어라

하고, 또한 향로봉(香鑪峯)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시에 말하길

萬國都城如垤蟻 (만국도성여질의)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千家豪傑若醯鷄 (천가호걸약혜계) 천가의 호걸은 초파리와 같아라
一窓明月淸虛枕 (일창명월청허침) 창에 가득 밝은 달빛을 베고 누우니
無限松風韻不齊 (무한송풍운불제) 무한한 솔바람 소리 곡조도 많아라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명성과 재능을 감추고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으니, 도를 물으러 오는 이들이 날로 많아졌다.

기축년(1589, 선조22)의 옥사(獄事) 때 요승(妖僧) 무업(無業)이 무고하여 스님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공사(供辭)가 명백하고 개절(凱切)하니, 선묘(宣廟)가 스님의 억울한 정상을 알고 즉시 석방하는 한편 스님의 시고(詩稿)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탄상(歎賞)하였으며, 어필로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고 시를 읊어 바치게 하였다. 스님이 즉시 절구(絶句)를 바치니 선묘가 역시 어제(御製) 절구 한 수를 내리고 은상(恩賞)을 매우 후하게 주고 위로하여 산으로 돌려보냈다.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여 용만(龍灣)에 머무르니, 스님은 즉시 장검을 비껴들고 진알(進謁)하였다. 이에 선묘가 하교(下敎)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와 같은데 그대가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배명(拜命)하고 말하기를, “국내의 승려들 중 늙고 병들어 군대에 편입할 수 없는 자들은 신이 명령하여 자기 절에서 분향 축원하여 신명의 도움을 빌게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신이 모두 통솔하여 군진(軍陣)에 달려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의롭게 여겨 스님을 팔도십륙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는 한편 지방관들에게 유시(諭示)하여 스님을 예우하게 하였다.

이에 송운(松雲)은 7백여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일어났으며, 처영(處英)은 1천여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일어났으며, 스님은 문도(門徒) 및 스스로 모인 승려 1천 5백 명을 거느렸다. 그리하여 도합 5천여 명의 승군(僧軍)이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모여 중국 군사와 선후하여 성세(聲勢)를 도왔으며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서 죽이고 사로잡은 적이 많았다. 이에 중국 군사가 드디어 평양을 탈환하고 송도(松都)를 수복하자 경성의 적들이 밤중에 도주하였다. 스님은 용사 백 명을 보내 대가(大駕)를 영접하여 환도(還都)하게 했다. 명(明)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汝松)이 서찰을 보내 칭찬하였는데 그중에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함에 충성이 해를 꿰뚫으니, 경앙(敬仰)해 마지않는다.”라는 말이 있었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 주었는데, 그 시에

無意圖功利 (무의도공리) 공리를 도모할 뜻 없이
專心學道仙 (전심학도선) 오로지 전심하여 도만 닦더니
今聞王事急 (금문왕사급) 이제 왕사가 위급하단 말 듣고
摠攝下山嶺 (총섭하산령) 총섭이 산을 내려오셨구려

하였다.

중국 제장(諸將)들도 다투어 서찰과 선물을 보내왔다. 적이 퇴각하자 스님은 아뢰기를, “신의 나이 여든에 가까워 근력이 다했으니, 군사(軍事)를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은 도총섭의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묘향산의 처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니, 선묘가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란 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스님은 의(義)와 도(道)는 더욱 높아지고 명성은 더욱 무거워져 두류산, 풍악산, 묘향산 등을 왕래하매 제자가 1천여 명이 되었으며 이 중 출세(出世)한 제자가 70여 명이었다.

갑진년(1604, 선조37)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菴)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분향(焚香)하고 설법한 뒤 자신의 영정(影幀) 뒤에 쓰기를,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전거시아) 팔십 년 전에는 저 사람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심년후아시거) 팔십 년 뒤에는 내가 저 사람이로구나

하고, 송운과 처영에게 부치는 서찰을 쓴 다음 가부좌를 한 채 서거(逝去)하니,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7세였다.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여 21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제자 원준(圓峻)ㆍ인영(印英) 등이 다비(茶毗)하여 영골(靈骨) 한 조각과 사리(舍利) 세 개를 얻어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 봉안하였으며, 또 영골 한 조각을 제자 유정(惟政)ㆍ자휴(自休) 등이 금강산으로 모시고 가서 신주(神珠) 몇 개와 함께 유점사(崳岾寺) 북쪽에 부도(浮屠)로 모셨다.

우리 동방은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고, 구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고, 영관은 서산(西山)에게 전하였다. 이것이 실로 임제(臨濟)의 정파(正派)인데 서산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 한다.

스님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각각 한 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어 있다.

아, 스님의 도의 천심(淺深)은 내가 자세히 모르지만 스님의 유고는 내가 이미 다 읽어 보았다. 시(詩)를 보매 스님의 자득(自得)한 뜻을 알 수 있고, 문(文)을 보매 스님의 높은 조예(造詣)를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조어(措語)가 혹 아순(雅馴)하지 않은 곳도 있으나 글자마다 살아 있고 구절마다 비동(飛動)하여 흡사 고검(古劍)이 칼집에서 나오매 서늘한 바람이 이는 듯하다. 왕왕 개원(開元)ㆍ대력(大曆)의 시와 매우 비슷한 것도 있으니, 불가(佛家)의 혜휴(惠休)ㆍ도림(道林)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환난을 만나서도 그 조수(操守)를 잃지 않아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니, 임금이 시고를 자청해서 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한 영광과 어필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내려 준 것은 참으로 전고(前古)에 없던 각별한 권애(眷愛)였다. 그리고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모아 중국 군사를 도와 삼도(三都)를 수복하고 대가(大駕)를 영접하여 환도(還都)하고는 곧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옷깃을 떨치며 산으로 돌아갔으니, 그 출처(出處)의 절개는 고인(古人)에 비겨도 손색이 없다.

대저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들 당시의 임금에게 지우를 입고 공명(功名)을 세워 스스로 현달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재능을 품고도 펼치지 못하고 종신토록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그런데 스님은 일개 치의(緇衣)의 신분으로 성명이 대궐에 알려지고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니, 선문(禪門)에서 이러한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을 줄 누가 생각했으랴. 이와 같은 분의 명(銘)을 쓰니, 나의 붓에 부끄럽지 않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金天之西 (금천지서) 금천의 서쪽
薩水之濱 (살수지빈) 살수의 물가에
淑氣亭毒 (숙기정독) 맑은 기운이 모여
乃降眞人 (내강진인) 이에 진인이 탄생했어라

屳婆抱送 (선파포송) 신선 노파가 안아 보냈고
釋老提携 (석노제휴) 불가 노인이 손을 잡아 인도했지
天開寶光 (천개보광) 하늘은 보광을 열었고
帝借金鎞 (제차금비) 상제는 금비를 주었어라

靈符妙契 (령부묘계) 신비한 꿈의 징조와 꼭 맞아
秀骨超凡 (수골초범) 준수한 골상이 범상치 않았으니
蚌珠出海 (방주출해) 진주가 바다에서 나온 듯하고
龍鏡發函 (룡경발함) 용경이 상자에서 나온 듯하여라

失怙無依 (실호무의)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어
千里負笈 (천리부급) 천리 먼 한양으로 공부하러 가서
淹貫諸家 (엄관제가) 제자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卓然自立 (탁연자립) 학문을 쌓아 우뚝 자립하였지

乃超覺路 (내초각로) 그러다 불교의 길로 들어서더니
遂登法席 (수등법석) 마침내 스승으로 법석에 오르니
祖月重輝 (조월중휘) 조사의 달빛이 다시금 비침에
群昏一廓 (군혼일확) 중생의 어리석음이 한바탕 걷혔지

餘事詩聲 (여사시성) 도 닦는 여가에 지은 시의 명성이
上徹楓宸 (상철풍신) 위로 대궐에 계신 임금께 들렸으니
殊恩異渥 (수은이악) 그 남달리 우악한 성은이야말로
榮耀千春 (영요천춘) 영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도다

身雖巖穴 (신수암혈) 몸은 비록 암혈에 묻혀 살아도
忠不忘君 (충불망군) 충성은 임금을 잊지 못하였네
遇難一呼 (우난일호) 난리를 만나 한 번 부르자
義旅如雲 (의려여운) 의병의 무리 구름처럼 모였지

協助天戈 (협조천과) 이에 중국 군사를 도우며
憑仗靈祐 (빙장령우) 부처의 영험에 의지하였나니
驅除腥穢 (구제성예) 더러운 오랑캐를 몰아내고
福我寰宇 (복아환우) 우리의 강토에 행복을 주었어라

出而濟世 (출이제세) 나가서 세상을 구제함에는
名動華夷 (명동화이) 그 명성이 화이에 진동하였고
入而修定 (입이수정) 들어와서 선정(禪定)을 닦음에는
法闡宗師 (법천종사) 종사로서 진리를 천명하였도다

在掌靈珠 (재장영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명주
虛明自玩 (허명자완) 그 허명한 빛을 스스로 즐기고
倘來榮辱 (당래영욕) 외부에서 오는 덧없는 영욕은
如夢一幻 (여몽일환) 한바탕 꿈과 허깨비처럼 여겼지

瞻彼妙香 (첨피묘향) 멀리 저 묘향산과
與夫金剛 (여부금강) 금강산을 보니
寔唯淨界 (식유정계) 이야말로 청정한 세계라
宜我法王 (의아법왕) 우리 법왕이 거주하실 곳이지

來往諸天 (래왕제천) 이에 제천을 내왕하니
百靈護持 (백령호지) 온갖 신령들이 호위하였네
乘化返眞 (승화반진) 세연이 다해 입적하니
去又何之 (거우화지) 떠나서 또 어디로 갔는고

功紀人間 (공기인간) 공적은 인간 세상에 기록되었고
道在山中 (도재산중) 도는 산중에 남아 있어라
一片貞珉 (일편정민) 이 한 조각 비석이여
萬古英風 (만고영풍) 만고에 영명한 풍모로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