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8)동강 김우옹은 왜 회령으로 귀양 갔을까?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8)동강 김우옹은 왜 회령으로 귀양 갔을까?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20.02.01 21:37
  • 업데이트 2020.03.2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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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문집 내지

경북 성주 출신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은 50세인 1589년(선조 22)년에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남명 조식의 문하로 퇴계 이황의 영향도 받았던 그는 28세인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재였다.

김우옹은 정인홍·최영경·오건·곽재우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를 대표한 학자였으며, 사림정치가 시작되고 붕당이 형성되는 선조대의 정치적 격동기의 중심에서 보낸 인물이다. 유성룡·김성일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에 속하였다.

김우옹은 동인에 속해 있었지만 정치운영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동인과 서인이 본격적으로 갈라지게 된 계미삼찬(癸未三竄) 이후에도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자 하였다. 참고로 계미삼찬은 1583년(선조 16) 동인 계열의 박근원·송응개·허봉 등이 율곡 이이를 몰아내려다 모두 유배된 사건을 말한다. 김우옹의 아내는 조식의 외손녀였다. 그는 성리설과 관련하여 이황과 학문 교류를 하여 조식과 이황이라는 두 명유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남지역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면 문과에 급제해 요즘말로 잘 나가던(?) 김우옹은 왜 회령으로 유배 되었을까? 당시의 정세와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는 48세 때인 1587년 10월에 안동부사에 임명되어 이듬해 1월에 부임하였는데, 50세인 11월에 안동부사직을 빼앗기고 귀양을 갔다.

유배 가기 직전에 정여립(1546~1589) 모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난다. 당시 조정은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동서 붕당이 발생하면서 국론이 분열되었고 국내외 상황은 어지러웠다. 기축옥사는 흔히 1589년에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간의 정쟁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일어난 이 옥사는 조선 전기에 일어난 4대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조선 역사상 최대의 역모 사건이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인사는 거의 제거되었다. 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뉘어져 있다.

한편 김우옹은 회령 적소에 있을 때 퇴계가 써주었다고 하는 “思無邪 愼其獨 無自欺 毋不敬(사무사 신기독 무자기 무불경)” 글자를 벽에 걸어두고 수신하였다고 한다. “생각에 삿됨을 없애고 그 홀로 있는 자신을 조심시키며 스스로를 속임이 없으면 공경하지 않을 일이 없다 ”는 뜻이다.

귀양이 풀릴 때까지 3년 동안 김우옹은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 대표작이 『속강목(續綱目)』 15권으로 그 각판은 고향인 경북 성주군 대가면 사도실 청천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해서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 것일까? 여기에는 두 셋의 주장이 있지만 가장 신뢰할 만 것은 영의정 노수신과 관련이 되어 있다. 노수신은 김우옹과 정여립을 같이 천거한 일이 있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2) 식년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율곡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은 바 있다.

동강문집에 실린 깅우옹의 연보.

김우옹과 정여립 둘 다 장래가 촉망되던 인재여서 영의정이 천거를 할 정도였으니 분명 두 사람은 서로 친분이 깊을 것이라고 조정에서는 짐작하였다. 그러니 정여립의 역모에 김우옹도 당연히 가담했을 것으로 생각하여 안동부사직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낸 것이다. 두 사람을 추천한 노수신이 정승에서 쫓겨났음은 물론, 이 사건으로 동인의 세력은 크게 꺾이었다. 유배를 가게 된 이유 중 또 하나는 김우옹이 정여립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것이다.

여하튼 김우옹은 임진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명나라 찬획 원황의 접반사가 되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을 위한 문위사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전하였다.

그 뒤 해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였으며,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쳤다.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에 모든 벼슬을 그만두고 인천에서 지내다 이듬 해 청주로 옮겨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한편으로 김우옹은 1573년 이황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이듬해에는 조광조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저서로는 『동강문집』(21권 10책)·『속자치통감강목』 등이 있다. 동강문집에는 그의 유배와 관련한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 글들이 실려 있다. 또한 이 문집은 임진란을 전후한 정치·경제·역사·당쟁사 및 사회적 문제를 연구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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