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오늘의 詩」 ... 연잎의 지혜 / 법정
도무지(道无知)의 「오늘의 詩」 ... 연잎의 지혜 / 법정
  • 허섭 허섭
  • 승인 2020.03.16 15:38
  • 업데이트 2020.03.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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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입적 10주기(3월 11일)에 즈음하여

얼마 전 11일은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신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불가에서는 음력으로 기일을 찾으니 2010년 음력 1.26은 올해는 양력 2.19일이 된다. 지난 2월 21일에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는 <법정스님 열반 10주기 추모법회> 가 있었다.)

법정 스님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소유> 가 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는 말씀을 하셨으니, 스님의 무소유 사상은 종교와 이념의 벽을 넘어 이 시대의 많은 대중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아직도 우리들 가슴 속에는 그 메아리가 남아 있다.

무소유(無所有) 사상은 서양에서는 멀리 디오게네스(Diogenes)로 대표되는 견유학파(犬儒學派)에까지 소급하며 동양에서는 장자(莊子)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현대사에서는 간디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만년(晩年)의 톨스토이도 이를 실천하였다.

비구(比丘) 법정(法頂)은 살아생전에 대중들이 자신의 무소유 사상을 마치 소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라고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기도 했다.

여기 법정 스님이 남긴 유언을 다시 살펴본다.

〖 남기는 말 〗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 맑고향기롭게> 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 상좌들 보아라 〗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

Sim1992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법정 스님이 주석한 길상사. [Sim1992 / CC BY-SA 3.0/ 위키피디아]

스님께서 유언하시기를 자신이 말과 글로써 세상에 진 말빚을 다음생에 가져가고 싶지 않으니 자신의 책들을 일체 발간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申申當付) 하고 떠나셨다. 그래서 스님께서 떠나신 직후 시중에서는 기존에 나온 스님의 책들이 품귀 현상을 이루며 헌책방에서 고가에 팔리는 일시적인 이변도 일어났었다.

그러나 세상에 고스란히 그대로 지켜지는 유언은 없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이 남긴 말을 무슨 명분을 대어서라도 자기네들 편한 대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스님과 인연이 깊은 몇몇 출판사에서는 <맑고 향기롭게> 재단의 잠정적인 허락 하에 스님의 책들을 다시 편집하여 내게 되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공공연히 출간하지 못하는 저간의 사정을 틈타 이런저런 인연을 내세워 자신들이 편집한 책들을 출간하면서 결국 법정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성철 스님 사후에 성철 스님의 법제자들이 성철 스님을 내세워 자신들의 못남을 가리고 그 알량한 법통만 내세우는 사태를 두고 판화가 이철수는 ‘성철 식은 방귀나 파는 놈들’ 이라고 호되게 질타하였다. 법정을 기리는 사람들 또한 이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호랑이가 고양이 새끼를 키운 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성철이 법정처럼 유언했다면 밑줄 친 부분은 이렇게 고쳐질 것이다.

'그간 내가 짧은 혓바닥으로 세상을 속인 죄가 수미산같이 높으니'

평생 글자 하나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성철이 주위의 강권에 생각을 바꾸어 책을 내면서부터는 법정의 손을 빌리기도 하였으나, 성철의 언어와 법정의 언어는 이렇듯 달랐던 것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이것이 진정한 선불교의 정신이다. 일체의 우상(偶像)을 두지 않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자리에서 ‘나를 믿지 말고 법(法)에 의지하라’ 는 간곡한 가르침을 말씀하였겠는가. 여기서 말한 법이 부처님이 설법하신 경전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 법귀의(法歸依)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 자귀의(自歸依)
남을 등불로 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 자등명(自燈明)
사람을 등불로 삼지 말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 법등명(法燈明)

이것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석 달 전에 남기신 유언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망발을 하였으니, 만일 예수가 재림한다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모두가 스스로 우상을 만든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이다.

나는 어느 해 인사동에서, 수묵화가 김호석의 전시회에 들렀다가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초상 두 장을 구입한 적이 있다. 그는 전통적인 초상화의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을 오늘에까지 이어가고 있는 인물화의 대가이다(전신사조傳神寫照 :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형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담아내는 일. 동양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시하던 가치이다). 포구를 해서 서재에 걸어 두기에는 포스터 크기가 너무 커서 둘둘 말아서 어느 구석에 처박아 두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두 영정을 걸어놓고 성철과 법정 두 사람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날이 있으리라.

성철 스님의 책들이 꽂혀 있는 학사재 서가의 한 귀퉁이.

다만 지금 여기에서 말하자면, 평소 성철과 법정에 대해 묻는 시답잖은 놈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해 왔다.

법정은 죽었다 깨어나도 성철의 세계는 알 수 없지, 성철이 자신이 깨친 세계가 어떠한지 법정 아니라 그 누구에게 말한다 해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그건 누군들 스스로 깨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경계일 것이니, 허나 법정이 굳이 성철의 세계를 넘볼 필요가 없으니, 법정은 법정대로 건너야 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으니, 부처님의 세계는 이토록 넓고도 깊은 것인가!

오는 주말에는 성북동 길상사에 들를까 한다. 길상사엔 카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 선생이 만든 관음보살입상이 있으니, 길상사에서는 오직 이것만 보면 된다. 지난해 가을 광릉수목원에 다녀오면서 들른 봉선사에도 이와 똑같은 관음상이 나를 반겨주었다.

끝으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낸 짧은 글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내 꼬인 혓바닥을 닫을까 한다.

연잎의 지혜 / 법정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거리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욕심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사람들은 가질 줄만 알지
비울 줄은 모른다.
모이면 모일수록,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무겁게 짓누른다.

삶이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놓아버려야 할 것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짓누르는 물방울을 가볍게 비워버리는 연잎처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욕심에 집착하면
불명예 외에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좋은 것을 담으려면 먼저 그릇을 비워야 한다.

욕심은 버려야 채워진다.
악기는 비어 있기 때문에 울린다.
비우면 내면에서 울리는 자신의 외침을 듣는다.

- 법정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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