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4)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삶의 모토가 ‘메멘토 모리’인 인물”
[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4)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삶의 모토가 ‘메멘토 모리’인 인물”
  • 김해룡 김해룡
  • 승인 2020.03.28 15:21
  • 업데이트 2020.03.2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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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의 명작 〈대사들(the Ambassadors〉에 숨겨진 이야기들

한스 홀바인의 2인 초상화 'Jean de Dinteville and Georges de Selve', 일명 '대사들' [Hans Holbein / wikipedia]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 lifes)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후(死後)에 꿈을 꾸다니?
#햄릿, 죽다

 

● “삶의 모토가 ‘메멘토 모리’인 인물” 쟝 드 당뜨빌(Jean de Dinteville, 1504–1555)

단 한 줄로 당뜨빌의 개인사를 정리한 『위키피디아』와는 달리 『구글』에는 이 개인사가 팜플렛 한 권 분량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개인사에는 당뜨빌이 다섯 차례나 영국을 방문하며 행한 외교업무의 내용과 그가 겪은 것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햄릿』 이야기를 시작할 즈음 필자는 당뜨빌의 개인사를 무시하려 했다. “삶의 모토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인 인물”이라는 낙인이 왜 당뜨빌에게 새겨졌는지를 그림을 통해 유추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어서 그림을 관통하는, ‘메멘토 모리’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이 『햄릿』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했다. 그러나 이 개인사 또한 『햄릿』의 토양을 풍부하게 할 것이기에 간단히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가계의 뿌리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가계의 조상이 프랑스의 귀족 계급 중 가장 오래되고 권위를 자랑하는 ‘noblesse d'épée’(노블레스 데빼, ‘Nobles of the Sword’)의 일원이었다. ‘칼을 든 귀족’, 즉 ‘귀족 기사단’이다. ‘귀족 기사단’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봉토(封土)를 하사받고 전쟁을 수행하는 봉건영주 세력이었다. ‘당뜨빌’(Dinteville)이라는 명칭은 이 가계의 선조가 왕으로부터 받은 영지(領地)의 지역 이름이었다. 이 선조의 여러 후손들 중 쟝 드 당뜨빌의 조부가 폴리시(Polissy) 지역의 영주였다. 이 ‘폴리시 영주’(Seigneur of Polissy)의 직위를 당뜨빌의 부친이 이어받았고, 그에게 ‘귀족 기사단’의 직위도 승계되었다. 이 부친은 프랑스 왕실에서 여러 직책들을 수행했다.

부친이 왕세자 프랑소와(Dauphin François)의 집사장(執事長, Premier Maître d'Hotel) 직을 수행하는 동안 당뜨빌은 1521년에서 1524년까지 왕실의 어린 왕손(王孫)들의 ‘음료관헌’(Cup Bearer)직을 수행했다. 왕손들이 마시는 음료의 청결성을 살피는 직이었다. 구약 성서 개역판은 이 직(職)을 ‘술관헌’이라고 번역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는 이 직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왕이 당뜨빌을 신뢰했다는 뜻이다. 1531년, 부친이 사망하자 당뜨빌은 ‘폴리시 영주’, ‘귀족 기사단’, 그리고 ‘성 미카엘 기사단’(Order of St. Michael)의 지위를 다 물려 받는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33년 1월, 이 직위들을 한 몸에 지닌 당뜨빌은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의 직까지 맡아 영국에 도착한다. 그림 속 당뜨빌이 목에 ‘성 미카엘 기사단’ 소속임을 드러내는 메달을 걸고 있다.

〈대사들〉의 두 대사, 귀족 기사단의 일원인 쟝 드 장뜨빌(왼쪽)과 성직자 조르즈 드 셀브. 

영국으로 향하기 전 프랑스 왕궁에서 당뜨빌은 성직자 조르즈 드 셀브(Georges de Selve)를 만나 친구가 된다. 또한 당뜨빌은 이 왕궁에서 당대 프랑스 최고의 인문학자이며 신학자인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Jacobus Faber Stapulensis, 1450 ?~1537)을 만나 교제한다. 이 인문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연구와 병행하여 고대 문예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조화를 꾀하여 성서의 원전을 연구하였으며 최초로 신약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프랑스 대사 당뜨빌은 1533년 두 번째 런던 방문 이후 1537년 까지 세 차례 더 런던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의 종교개혁 과정과 헨리 왕의 이혼과 결혼에 얽힌 사연, 그리고 헨리 왕이 추진하는 영국국교 설립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의 의지와 영국 왕실 내에서 흘러나오는 반대의 의견들을 들어 알았다. 이 격정의 시기에 왕실에서 자행된 유혈의 참극을 목격하거나 들었다. 헨리 왕은 왕비 둘을 단두대로 보냈다. 두 번째 왕비 앤 볼린과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호워드(Catherine Howard, d. 1557)였다. 앤은 모함당해, 캐서린은 간통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와 주교 죤 피셔(Bishop John Fisher, 1469–1535)

1535년 임무 수행 차 세 번째로 런던을 방문했던 당뜨빌은 토머스 모어가 무자비하게 처형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헨리 왕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대법관이었으며, 『유토피아』(Utopia)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를 단두대로 보냈다. 교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영국국교의 수장(Supreme Head of the Church of England)이 되려는 헨리 왕의 의도에 찬동하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첫 왕비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모어는 반역죄를 선고 받았다.

이 세 번째 방문에서 당뜨빌은 새 교황 폴 3세(Paul III)가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Francis I)왕에게 영국과 단교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정황과, 프란시스 왕은 끝까지 영국의 편에 설 것이라는 뜻을 헨리 왕에게 전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교황이 전쟁을 부추긴 것으로 인해 분노로 끓고 있던 헨리 왕을 격노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헨리 8세 왕의 영국국교 수립과 앤 볼린과의 재혼을 반대한 것으로 주교 존 피셔가 반역죄로 몰려 일 년여 동안 런던 탑(Tower of London)에 갇혀 있던 때였다. 주교의 직도 박탈당한 상태였다. 헨리 왕은 피셔가 굴복하리라 믿고 일 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차였다. 그 퇴위당한 주교를 교황이 추기경으로 임명한 것이다. 런던 탑 내에서 가혹한 취급을 받던 피셔가 추기경의 신분에 적합한 대우를 받도록 하기 위한 교황의 배려였다. 그러나 이 의도가 실현되리라 기대한 자는 교황뿐이었다.

임명 며칠 후 이 추기경은 가장 혹독한 처형을 당한다(1535.6.22.). 오전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그의 시신은 발가벗겨진 채 저녁까지 단두대 바닥에 방치되었다가 임시로 마련된 무덤에 내팽개쳐져 2주간 머물다가 토머스 모어의 무덤 곁에 장사(葬事)된다. 런던 탑 구내에 위치한 ‘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의 교회’(Church of St Peter ad Vincula) 묘지이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성령의 기적으로 풀려난 베드로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 뒷마당에는 런던탑에서 처형당한 유명한 인물들의 무덤이 있다. 헨리 왕의 두 번째 왕비 앤 볼린,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호워드(Catherine Howard)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추기경의 베어진 머리는 장대에 꽂혀 런던 다리위에 2주간 효시되다가 테임즈 강에 버려진다. 16일 전인 6월 6일 토머스 모어의 머리가 버려진 바로 그 위치였다. 헨리 왕의 지시대로 행해진 일이었고 교황의 뜻에 따른 자들에 대한 처형은 헨리 왕이 교황청에 보내는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였다. 당뜨빌이 이 무자비한 처형을 목격했다.

5년 후, 당뜨빌은 모어를 단두대로 보내는 일에 앞장섰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1485-1540)도 반역죄로 단두대에서 삶을 마감하는 과정을 동료 대사를 통해 전해 듣는다. 당뜨빌이 ‘메멘토 모리’를 가슴에 새기기에 충분하리만치 유혈은 넘쳐났다. 이제 〈대사들〉에서 ‘메멘토 모리’의 흔적을 찾을 차례이다.

런던 국립갤러리 큐레이터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을 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The National Gallery / YouTube]

●런던 국립 갤러리(London, National Gallery)

19세기 내내 이 그림은 영국에 있었다. 어떤 경로로 이 대작이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운반되었는지는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 그림은 당뜨빌이 1533년에 프랑스의 자신의 폴리시 성(Chateau de Polisse)으로 옮겨 간 후 18세기 말까지는 프랑스에 있었다. 1890년, 런던 국립 갤러리(London, National Gallery)가 기부금과 대규모 모금을 통해 롱포드 성(Longford Castle)의 성주 라드노 백작(Earl of Radnor)으로부터 이 그림을 매입한다. 지금은 선명한 초록색을 띠는 휘장이 매입 당시에는 색이 상당히 바라져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다. 결국 그림은 전반적인 정교한 보수 작업을 거쳤다.

그림 속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영국인, 혹은 독일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의상으로 국적을 구분할 수 있을 만치 의상이 특화되어 있지 않았거나 유럽인들은 유사한 복장을 했다는 뜻이다. 1900년, 예술사가(Art historian) 메리 하비(Mary Harvey)가 당뜨빌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림에 얽힌 역사를 연구한 결과물을 책으로 발간하면서 비로소 그림 속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려졌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 라틴어로 ‘1533년에 한스 홀바인이 이 그림을 그렸다’는 싸인 덕분에 그림 매입 당시 화가의 이름은 알려졌었다. 홀바인은 그의 작품에 이렇게 길게 자신을 밝힌 예가 없다. 이는 이 그림이 예사로운 그림이 아니라는 의미의 방증이다.

그림의 왼편에 서 있는 자가 당뜨빌이고 오른 쪽은 셀브이다. 당뜨빌은 기사이고 셀브는 성직자이다. 중앙의 진열장 위치에 프랑스 왕이 앉았다고 가정하면 이 장면은 왕을 중심으로 왕의 오른쪽에는 무사 집단, 왼쪽에는 성직자, 학자, 법관 집단이 무리지어 국사를 논하던 프랑스 왕실의 재현이다. 이는 동적(active)인 힘과 정적(contemplative)인 힘의 조화에서 가치를 발견했던 르네상스적 이분론(dichotomy)의 재현이기도 하다. 실제로 프랑스 왕실에서 당뜨빌은 프랑시스 1세 왕의 오른 쪽에,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왕의 왼쪽에 서서 함께 국사를 논했을 것이다.

런던 국립 갤러리(London, National Gallery)의 큐레이터의 설명에 의하면 당뜨빌이 쥐고 있는 단검의 손잡이와 칼집(scabbard)은 금으로 만들어 졌으며 거기에 달려있는 화려하고 풍성한 장식용 금술(tassel)을 재현하려고 홀바인은 금술 부분에 아교를 칠하고 그 위에 금박을 입혀 정밀함의 극치를 이루어 냈다. 오른 손에 단검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뜨빌은 왼손잡이였다. 고가(高價)의 스라소니(살쾡이) 가죽으로 된 화려한 의상은 당뜨빌이 부유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털은 가닥가닥이 다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치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어께 부분은 절개된 부분이 금으로 된 작은 집게들(tags)로 연결되어 있다. 칼집에 인각된 숫자 29는 그의 나이이다. 남성미와 권력을 드러내려고 부풀려진 어깨에 주목하자. 5년 후, 홀바인이 그린 헨리 왕의 전신 초상화(1538)에는 헨리 왕의 어깨가 더 부풀려져 있다.

장뜨빌의 단검엔 29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왼쪽)과 셀브의 오른쪽 팔꿈치의 아래 책에는 25란 글씨가 보인다.

당뜨빌이 단검을 쥐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라보의 주교(Bishop of Lavour) 셀브의 오른쪽 팔꿈치는 책 위에 걸쳐 있다. 무기와 책의 대비이다. 주교 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셀브가 이 그림의 모델로 설 때는 아직 성직 수임(consecration) 전(前)이기에 그러하다. 대신 모피 외투를 입고 가죽으로 된 장갑을 쥐고 있다. 책의 엣지(edge)에 숫자 25가 보인다. 셀브의 나이이다. 이 둘은 이십 대의 나이로 프랑스 왕실을 대신해 영국 왕을 알현하는 지위에 있었다.

●오브제들

당뜨빌이 남긴 서신들에 의하면 중앙의 진열대에 무엇을 배치할 것인가에 대해 화가와 두 대사 사이에 많은 토론이 있었다. 오브제들을 최종 결정할 단계에 한 인물이 토론에 합류한다. 헨리 왕에게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던 독일인 천문학자 니콜라스 클라체(Nicholas Kratzer)이다. 이 천문학자의 도움으로 진열대 상단은 천구의, 다면 해시계(polyhedral dial), 대양에서 선박의 위치를 알려주는 콤파스,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들이 사용했다는, 지금은 사전에서도 사라진 ‘토르퀘텀’(torquetum)이라는 천문관측계기 등 태양의 움직임과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들, 항해용 도구들, 즉 천문에 관한 도구들이 진열되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의 과학의 시대를 대변할 만한 오브제를 중심으로 학식과 권력을 지닌 두 대사가 서 있는 것이다.

그림 중앙의 오브제들. 천구의, 다면 해시계(polyhedral dial), 콤파스, 천문관측계기인 토르퀘텀(torquetum) 등 당시로서는 첨단 과학과 항해기술 도구들이 진열되었다.

반면 선반 하단에는 지구의(地球儀)가 놓여졌다. 종교개혁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유럽이 기형적으로 그려져 있고 프랑스에는 파리(Paris)가 바리(Baris)로 적혔다. 독일인인 홀바인이 프랑스어를 이렇게 발음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뜨빌의 영지인 폴리시(Polisy)가 표기되었다. 당뜨빌이 “내가 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듯하다.

홀바인의 특정한 의도가 담긴 오브제들이 있다. 선반 하단에 있는 악기 루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구글 이미지로 확대하면 정중앙의 현 한 줄이 끊어져 있다. 로마와 영국의 화음(和音)이 깨졌다는 의미이다. 그 곁의 플릇은 다섯 개가 한 세트인데 하나가 빠져 나가고 없다. 역시 하모니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플릇 옆의 책은 독일어로 된 개신교(Lutherine) 찬송가이다. 왼쪽 페이지의 곡은 ‘오소서, 성령이여’(Come, Holy Ghost)라는 곡이며 오른 쪽은 10계명에 곡을 붙인 찬송이다.

줄 끊어진 루트. 영국과 로마 교황청 간의 화음이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책의 원본에는 이 두 곡이 이렇게 연이어 붙어 있지 않다. 홀바인이 작위적으로 10계명 곡을 이 페이지에 연결시켰다. 국가 간 종교의 차이로 인한 분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10계명은 루터파와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가톨릭 진영에 여전히 공통의 계명이었다. 홀바인이 종교간 화합의 염원을 이 찬송가에 담았다. 10계명이 하나이듯 신앙도 하나임을 천명한 것이다.

지구의(地球儀) 아래에 위치한 책에도 의미가 있다. 막대자로 인해 30도 정도만 펼쳐진 이 책은 당대 독일의 수학자였던 피터 아피언(Peter Apian)이 집필한, 당시 독일에서 쓰이던 수학책이다. 펼쳐진 면이 공교롭게도 나눗셈의 공식이 담긴 면이다. 아마 나뉘기만하는 유럽의 기독교 공동체를 빗댔을 것이다.

나눗셈 공식을 담은 수학책 페이지. 유럽의 균열을 나타낸다.

역시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오브제가 또 있다. 당뜨빌이 쓴 모자에 붙은 배지(hat badge)이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궁전에서 남성들이 모자에 다양한 문양의 배지를 다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뜨빌은 모자에 해골 문양의 배지를 달았다. 모자 배지(hat badge)의 해골 문양은 반지나 다른 장신구에 새긴 해골 문양과는 사뭇 그 의미가 달랐다. 모자 배지의 문양은 모자를 쓴 당사자의 신념이나 삶의 모토를 전하는 수단이었다.

당뜨빌의 모자에 붙은 배지는 해골 형상이다.

●마지막 과제

마지막 과제이다. 두 대사의 발치에 비현실적으로 자리 잡은 물체와, 그림의 왼쪽 상단 모서리에 붙은 조그만 오브제의 실체를 살펴야 한다. 〈대사들〉의 메시지를 전혀 다른 층위로 옮겨 놓는 오브제들이다. 중앙의 물체는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을 의아해하게 했다. 19세기말 런던 갤러리에 속한 큐레이터이자 홀바인 전문가였던 한 인물은 이 물체가 오징어 뼈라고 주장했다. 아나모피즘(Anamorphism), 즉 왜상화법(歪像畵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때였다.

14, 15세기에 원근법이 발견되면서 부수적으로 생겨난 이 화법은 홀바인을 선두로 당대 정밀사실주의 화법에 염증을 느낀 몇몇 화가들에 의해 ‘오브제 비틀기’ 화법으로 발전했다. 이 화법으로 그려진 오브제는,  ‘오징어 뼈’로 오해받은 문제의 이 희끗한 물체가 그러하듯, 정면에서 보면 뒤틀려 보여 형체를 알 수 없지만 특이한 각도에서 사시(斜視)로 보거나, 둥근 유리잔을 갖다 대면 화가가 의도한 모습으로 떠오르거나 같은 모습으로 유리잔에 투영된다. 엄밀한 과학적 계산과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이 왜상을 그릴 수 있었다. 감히, 우리의 시각과 공간과 원근법이 빚어내는 불가사의한 결과물을 예측하는 천재성을 지녀야 가능한 작업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처음으로 이 화법에 흥미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의 눈〉(Leonardo's Eye)으로 알려진 그의 스케치는 이 화법을 실험했던 초기의 결과물이다.

그림 〈대사들〉의 바닥에 드리워진 '오징어 뼈' 모양의 물체를 특정 각도에서 보면 해골(오른쪽)처럼 보인다.
홀바인의 아나모피즘, 왜상화법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홀바인은 이 그림을 통해 "메멘도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외치는 듯 하다.

자, 이제 독자 여러분들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펴시기 바란다. 그래서 런던 내셔날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London) 전시장 한 쪽 벽에 걸린 〈대사들〉 앞에 서서 이 ‘오징어 뼈’를 바라본다고 치자. 독자들의 시선의 각도에 따라 이 ‘뼈’는 약간씩 변형될 뿐 대체로 그 모습을 유지 할 것이다. 시간이 약간 흐른 후, 피로해져 시선에 힘이 빠진 운 좋은 독자가 우연히 오른 쪽 인물의 무릎 언저리에서 무릎 꿇고 그림의 왼쪽 아래 모서리 쪽으로 이 ‘뼈’를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사람의 두개골이다.

해골의 공허한 안와(眼窩)는 초점이 없는 듯 보인다. 필자의 상상력으로 말하건대, 이 안와는, 그러나, 자기를 노려보던 이 운 좋은 독자의 시선은 물론 실내의 모든 사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응시하던 독자가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에게 무방비로 응시당하고 죽음의 밥이 된 것이다. 이 두개골은 이 운 좋은 독자의 시선에만 잡히는 게 아니다. 그림 근처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무도회를 즐기던, 그림의 비밀을 알 리 없었던, 당뜨빌의 폴리시 성에 모여 춤추던 귀족들이 치켜든 둥근 술잔에 이 두개골의 상(像)이 거짓처럼 선명하게 박혔을 것이다. 술잔에 투영된 상(像)에 놀란 귀족들의 뜨악한 표정을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셰익스피어 비극이 빚어내는 의외의 상(像)으로 인해 독자나 관객들은 폴리시 성의 귀족이 지었던 표정을 드러내었고 이후로도 드러낼 것이다.

김해룡 교수

그림의 왼쪽 상단 모서리에 붙은 조그만 오브제의 실체를 살피자. 나무로 된 십자가이다. 성직자 셀브의 의지로 이 그림에 합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의도적으로 가려진 듯 하고 우리는 옆면밖에 볼 수 없다. 그림을 그냥 살펴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십자가는 구원과 궁극적인 부활의 상징물이다. 허무의 은유인 두개골의 시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려진 십자가라니!

상상력을 더 펼치면 유화 〈대사들〉의 메시지는 이러하다. 그림속의 과학적 업적들은 순간에 살아질 것들. 신앙과 권력도 마찬가지. 따라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은 죽음을 상기하라는 것이다. 죽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헨리 8세 왕도, 프랑스 대사도, 이혼도, 종교적 분쟁도, 음악도 죽음의 밥인 것이다! 이 죽음을 이길 힘은 십자가인데 가려져 있어 거의 존재감이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그 소리는 들리나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구원은 우리 주변을 바람처럼 흐른다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햄릿』을 펼칠 시간이다.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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