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12)땅에도 불꽃, 이이벌
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12)땅에도 불꽃, 이이벌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5.01 16:18
  • 업데이트 2020.05.0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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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지화마을에서 바라본 간월산 능선.[사진=이득수] 

밤마다 천불이 일렁거리는 간월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땅에도 불, 강변전체가 시뻘건 땅불로 불타오르는 마을의 옛 이름은 이이벌이었습니다.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의 행정동인 지화마을 안내비를 보면 이이벌은 울주군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이벌'이란 이름자체가 서라벌(경주), 비사벌(상주), 달구벌(대구)처럼 경상도의 넓은 들에 터 잡은 오랜 주거지를 뜻하는 지명과 일맥상통하여 적어도 통일신라 이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인근의 석남사, 간월사의 건립연도에 비추어서도).

이 '이이벌'을 이곳 사람들은 보통 '이불'이라 부르며 굳이 이이벌이라 길게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발음 자체는 침구를 뜻하는 '이불'이 된소리로 시작되는데 비해 부드러운 평성으로 시작되어 '이불마을'이나 '이불사람'에서 요나 베개 따위가 연상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불마을'을 면사무소의 행정서류를 비롯한 일반적 기록에 '지화(知火)' 부락으로 기록하는데 이는 신통하게 땅불 지화(地火)와 발음이 같아 그 연결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이불' 자체를 군산과 더불어 호남평야의 중심으로 일제의 미곡(米穀) 수탈의 표적이 된 철도도시 익산군 이리(솜리, 裡里)와 연관시키면 역시 솜에서 속불 이 난 형상, 즉 땅에서 불이 난 마을 지화(地火)리가 되는 것입니다(언양지방 속담에 '소캐(솜)에 불이 붙으면 절대로 끌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류에 따라 지명이나 풍습이 돌고 돌아도 그 본류나 본질이 바뀌지 않는 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지화리의 정확한 위치는 가지산의 가장 은밀한 계곡 쌀바위 석남사(石南寺) 뒷산에어 발원(發源), 드넓은 상북벌을 적시며 70리 물줄기가 굽이치는 지금의 향산리 자동차면허시험장에서 강을 건너 직강공사로 개발된 하천부지에 드넓은 길천리 일반산업단지의 뒷면에 웅크리듯 붙어있는 자연부락입니다. 
 
이 지점에서 위아래로 왼쪽 향산, 능산, 언양읍 화장산의 산모롱이 '붕디시못디미'까지 내려가 거기서 강을 건너 맞은편 천전마을 앞을 거슬러 올라와 다시 산업단지에 이르는 삼각형 지역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웅덩이와 늪 사이로 실 줄기 같은 강물이 구불구불 기자 간월산 너머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굽는 사람들과 마주보며 천불과 땅불을 지폈던 것이지요.
 
이를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저 들길처럼 아득한 고고학과 인류학의 마을로 들어가야 하는데 애초 원숭이나 오랑우탄처럼 거대한 나뭇가지 위에서 살던 인간이 온갖 풀과 나무에서 씨앗과 과일이 익고 웅덩이에서 조개를 잡을 수 있는 풍족한 식탁(食卓), 육지로 내려오는 데는 수만 년의 긴 세월 동안의 망설임이 필요했습니다. 그 후 가장 용감한 무리 몇몇이 가장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일부는 산기슭의 칡덩굴 속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물가의 갈대밭에 들어가 칡과 갈대의 뿌리를 캐먹으려 열두 개의 어금니를 거대한 맷돌처럼 장치한 유인원(類人猿)으로 살아오게 되었답니다. 
 
이들이 불과 연모를 사용하며 움집을 지을 즈음에는 자기의 원래 거주지에서 조금 떨어진 샘물이 있는 동굴이나 구릉에 터를 집고 집단생활에 들어갔는데 차츰 농사짓는 기술이 발전하여 물을 대어 벼를 재배하는 관개농업(灌漑農業)으로 대량생산과 부계(父系)씨족을 이루면서 작은 마을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마을의 조건은 가까운 곳에 농사지을 들이 있어야 하는 기본조건 외에 

 1.가까운 곳에 샘이나 호수, 저수지가 있어 먹을 물이 있고 
 2.사방의 한 두 면이 가로막혀 맹수나 이웃 부족의 기습을 막을 수 있어야 하고 
 3.볕이 잘 들고 물이 잘 빠져 포근하면서도 전염병의 위험이 적은 곳

이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마을은 강가나, 바닷가, 또는 산기슭의 동굴이나 우물을 중심으로 성립되는데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압록강 유역을 '어별(魚鱉)의 이(利)가 있다'고 물고기와 자라를 잡아먹고 살만 한 고장임을, 낙동강 하류 일대는 '어염의 이는 있으나 물에 장기(瘴氣)가 있고 왜에 가까워 사람 살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물고기와 소금은 흔하지만 갈대가 우거진 하구 지역이 모래톱의 식수에는 전염병이 잘 생기고 일본이 가까워 살기가 힘든 곳으로 나와 있습니다.
 

지화마을 만당정(萬堂亭)에서 본 이이벌마을. 옛날의 모래톱에 들어선 길천리 일반산업단지 공장건물과 전통마을이 서로 등을 대고 있다. [사진=이득수] 

그래서 가지산 고헌산의 아늑한 품에 신불산, 간월산, 배내봉이 병풍처럼 둘러싼 상북평야의 강가에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을 때 샘이 있는 얕은 구릉(丘陵)지대인 길천리 이이벌(지화마을)일대가 가장 먼저 마을아 들어선 곳으로 위에서 말한 주거조건을 두루 갖춘 곳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 땅의 모든 강은 직강공사가 잘 된 지금의 강폭의 서내 배에서 열 배 정도의 넓이로 갯벌이나 모래자갈 갱빈(강변)이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였습니다. 차마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금 언양읍 어음리 아랫마을 울주군 교육지원청과 도서관은 물론 자동차운전연습장일대는 태화강 본류와 언양읍의 감대거랑, 삼남면의  작괘천이 모여 거대한 늪지대를 이루고 그 늪지대 한가운데의 약간 높은 모래톱에 조그만 움막을 짓고 고려조정의 죄인들을 유배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유배자가 '이 몸이 죽고 죽어'의 〈단심가(丹心歌)〉, 포은 정몽주(鄭夢周)입니다. 거대한 늪지대에 엄청난 습지식물이 우거져 그 이름도 여뀌(요(蓼)약국대) 풀의 이름을 따 요도(蓼島)라고 불렀답니다. 

자, 이야기는 다시 상북면 길천리 이이벌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상북면 최초의 마을을 이룬 이이벌은 인총(人叢)이 늘고 문치(文治)가 이루어지면서 유림이나 부농이 산을 등지고 개울이 흘러가는 풍수기 좋은 이웃 명촌, 이불, 양등마을로 정착해 부촌을 이루는 모태가 되면서도 여전히 그저 개미처럼 땅이나 파는 무지렁이 농부들이 살았는데 아까 말한 그 드넓은 펄지대와 잡초가 너무 우거져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의 지옥이 되고 썩은 물이 부글거리며 전염병이 끓는 것은 물론 기형아들이 자꾸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모든 마을사람이 강가도 몰려나와 드넓은 늪지대와 모래톱의 잡초를 태우는데 그 면적이 넓고 기간이 오래 걸려 저 멀리 간월산 능선의 천불을 태우는 사람이 바라보면 꼭 자신들과 대항하는 땅불만 같아 지화(地火)라고 불렀고 그게 이이벌이라는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지금 길천리 지화마을이라는 행정동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속에 천불 간월산의 천불과 천화현을 이야기하다 그 불꽃이 멀리 강변까지 튀었습니다. 그 개펄은 지금 깨끗이 준설되어 드넓은 '길천리 일반산업단지'가 되어 '고강알루미늄'을 비롯하 수많은 업체가 입주하여 많은 근로자들의 삶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산악시인 배성동님이 쓴 『영남알프스 오디세이』의 이야기를 많이 참고하였음도 함께 밝힙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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