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신불산과 아버지
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신불산과 아버지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6.11 11:07
  • 업데이트 2020.06.1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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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00호(2020.6.11)
사진2.제가 태어날 당시의 생가 버든마을. 추석날이라 흰옷을 입고 성묘를 가는 저 평화로운 마을에도 이념의 물결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답니다. 사진제공 마을친구 김영선)   (2020 6.11)
필자가 태어날 당시의 생가 버든마을. 추석날이라 흰옷을 입고 성묘를 가는 저 평화로운 마을에도 이념의 물결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답니다. [사진 = 마을친구 김영선 제공]

가장 품이 너른 신불산을 중심으로 1,000m가 넘은 산이 열 곳도 더 되는 영남알프스는 지리산 일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빨치산의 소굴이었습니다. 6.25 땐 북에 점령되지 않은 최후의 보루였지만 낮에는 대한민국으로,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불린 혼란과 저항(抵抗)의 땅입니다. 거기다 <단조성>이란 석성이 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의 근거지가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영남알프스 복합웰빙센터에는 빨치산에 관한 사진이나 기록물의 전시관도 있고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도 상영해 민족분단의 아픔을 직접 느껴볼 수 있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 제가 태어나기 한해 전의 신불산을 찾아간다면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상세히 표현된 이념과 생존의 괴리(乖離), 대대로 굶주린 농민들이 공산당의 선동적 깃발 아래 죽창(竹槍)을 들고 나섰지만 결국은 헐벗고 굶주리고 공포에 떨며 눈을 부릅뜬 채 죽어나자빠진 저 시산혈해의 신불평전을 바라보고 치를 떨고 말 것입니다. 

동란 중에 저 신불산 아래 마을에서 배태(胚胎)하여 간신히 태어난 제가 여기서 감히 당시의 민족사를 되돌아보느니 차라리 제 선친이 겪은 빨치산으로 인한 곤욕에 대해서 오늘 참으로 모진 맘을 먹고 털어놓기로 하겠습니다.

유복자(遺腹子)인 아버님에게는 아주 어릴 때 통도사 앞 논골이란 곳으로 시집간 큰 누님이 있었는데 6.25 발발 당시에 누님과 매형이 모두 죽고 그 외동아들이 어려서부터 타관을 떠돌다 빨치산의 간부가 되어 신불산에서 활약한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그래서 생질인 빨치산을 잡기 위해 지서의 순경과 군인들이 우우 우리 마을로 몰려와 아버지를 잡아가려 했는데 당시 열다섯 살의 눈치 빠른 둘째 누님이 아버지를 삼동면의 먼 친척집으로 숨기는 바람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답니다. 

대신 당시 임신 중이던 저희 어머니가 남편 간 곳을 대라는 경찰의 추궁에 자신은 모른다고 끝끝내 입을 다물다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강타당해 하혈을 하고 쓰러졌답니다. 그래도 모진 것이 생명이라 그 태아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 일흔 살의 머리 허연 노인이 되어 이 뼈아픈 민족사와 가족사를 쓰고 여러분은 그걸 읽고 있는 것입니다. 또 1만 쪽짜리 대하소설 <신불산>을 쓰고 있고요. 하마터면 저도 아버지에 이어 대를 이은 유복자(遺腹子)가 될 번했던 것이지요.

(사진1 경부고속도로에서 찍은 신불산 전경. 희한하게도 신불산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이 고속도로위라 찍었는데 빨간 교통표지가 유년과 노년의 묘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함. 
경부고속도로에서 찍은 신불산 전경. 희한하게도 신불산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이 고속도로 위라 찍었는데 빨간 교통표지가 유년과 노년의 묘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함. 

또 한 가지.
당시에는 언양지방에 눈이 엄청 내렸는데 어느 겨울밤 빨치산의 기습을 받은 버든(생가)마을 장정 넷이 지금 가천리 삼성 S. D. I 뒤쪽인 금강폭포 위의 재 너머 빨치산의 소굴까지 소를 몰거나 쌀을 지고 부역(負役)을 간 일이 있었답니다. 무사히 빨치산의 소굴에 도착 짐을 부리고 그들이 하는 달콤한 선전이 솔깃해진 방앗간 집 머슴은 현장에서 바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고 입산(入山)을 하고 나머지 셋이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꽁꽁 얼어붙은 산비탈을 조심조심 넘어오다 허기와 추위에 탈진하여
“형님, 쪼매만 쉬었다 갑시더.”
“안 된다. 앉으면 바로 얼어 죽는다. 바로 가자!”
연장자인 제 아버지가 만류했지만 그들은 부득부득 걸음을 멈추고 담뱃대에 담배를 채우는 것을 보고
“불만 붙이고 바로 내러오너라.”
하고 아버지 먼저 출발해 몇 시간 뒤 삽짝 앞에 쿵 하고 큰 대자로 쓰러졌는데 동태처럼 꽁꽁 언 몸을 어머니와 마을사람들이 물을 데워 씻기고 주물러 목숨을 건졌답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사람이 그날도, 이튿날도, 겨우내 돌아오지 않아 부인과 가족으로부터 우리 아버지가 그들을 해친 것처럼 온갖 의심을 하고 지서에 신고를 하고 해서 큰 곤욕을 치렀는데 이듬해 봄, 눈이 녹고 나서 금강골 어름에서 지게와 시체를 찾고 마무리된 일도 있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좁은 국토도,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사람들도 결국은 역사적 현장과 주인공이며 아무리 좁은 땅 한 조각도 한때 전장(戰場)이 아닌 곳이 없으며 아무리 무지한 농사꾼이라도 모두 민족사의 주역이며 희생자인 것입니다. 벌써 돌아가신지 53년이 된 아버님의 영전에 머리를 숙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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