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오목렌즈에 빠지다
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오목렌즈에 빠지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7.05 00:05
  • 업데이트 2020.07.0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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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통산 제1024호(2020.7.5)

  

끝없이 펼쳐진 초록들판
벼포기들이 이제 막 사람을 끝내고 바람에 나부끼는 초록 들판

좀 이르게 극성을 부리는 땡볕이 겨드랑이 사이로 선들거리는 바람에 밀려 저만치 물려난 오후 4시에 사광리언덕 내려와 고래뜰 거쳐 이불뜰 에돌아 지화마을 성황목을 향하는데, 그 많은 벼 포기들이 이제 막 사람(뿌리 뻗어 살음하기)을 끝내고 가는 바람에 나부끼면서 곧추서기를 고집하는 논배미 사이로 한참을 걷고 시멘트로 변했지만 간혹 모미싹 빨간 꽃이 색소폰 불어대는 수로를 지나 마침내 동서남북 모조리 새파란 볏논으로 둘러싸여 사방을 살펴보는 순간 
 
천전리, 명촌리의 고즈넉한 야산 너머 저 헌걸찬 영축산, 취서산, 신불산이 다가오고 동그란 간월산 어깨를 짚은 배내봉, 능동산 지나 가지산 쌀바위 넌지시 바라보자 문복산, 고헌산까지 수런대며 다가와 눈길을 돌려도 태화강 건너 언양읍 가는 고개마저 나지막한 화장산이 다시 시야를 잘라 나 아스라한 능선에 갇혀 겹겹의 논두렁 사이에 멈춰선 운동화 바닥으로 벼 포기처럼 뿌리내려 사람할 것 같은 저녁 답,

해오라기, 백로, 중대백로, 황로, 그 중에 하나이기는 분명한 이름이지만 내가 조류학자가 아닌 촌로(村老)인 담에야 일흔일곱 우리누님처럼 그냥 <흰새>로 부르는 종아리 길고 날개 넓은 새 하나 떴다 날다 다시 내려앉는 초록색 풍경에  사로잡혀 사방을 둘러보니 조석으로 보던 산과 들이 모조리 오목렌즈 되어 나지막이 에워싸는데

가장 우울한 날의 반 고흐가 그린 들녘
가장 우울한 날의 들녘

그래, 나 저 아득한 능선을 넘어 파미르고원이나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허위허위 두만강 건너온 몇 억 년 전 어느 사냥꾼의 핏줄이 흘러온 건가, 눈빛이 살아난 건가, 이명이 되살아나 환청이 되고 환각이 되고 내 숨소리 되어 여기 섰는지

나, 고조선의 화전(火田)꾼 되어 간월산 능선을 걷는다, 나 고구려의 유민(流民)이 되어 주몽을 뒤따르다 고려청산 지나  동학란 함성소리 요란한 황토고개 넘어 여기 왔는지

아침마다 지저기는 새 소리에 눈떠 이슬방울 굴려 뺨을 씻어 지나가는 바람으로 머리 감은 꽃으로 피다 마침내 어느 어깨 넓은 사냥꾼의 아내가 되어 조롱조롱 9남매 낳아 놓고 채 못키우고 마흔여섯에나 죽은 그런 여인들의 딸에, 딸에 또 딸을 얼마나 거쳐 우리 어머니가 되고 그 여섯 번째 자식이 되어 이렇게 머리 허옇게 늙었는지,

그래 마초야, 그게 무슨 인연(因緣)었던지 연기(緣起)였던지 내 한갓 번뇌 많은 인간이 되고 너 철모르는 노란 강아지 되어 우리 둘이 여기에 섰는지, 너는 날 따르고 나는 널 챙기고, 내가 주는 개 과자에 너는 행복하고 내가 쓰다듬은 접촉에 너는 기뻐하며 내 눈 흘김에 머쓱해지는

마초야, 세상이 무언지, 인생이 무언지, 너와 내가 왜 사는지 그걸 생각해 작은 일리(一理)하나 못 찾으면서도 괜히 <개소리>, <개똥철학이>라고 부르는 무식한 무리들에 무단히 욕지거리나 듣는 마초야, 

들길위의 마초
들길 위의 마초

넌 네 세포가 매머드로 머물던 어느 고생대(古生代)의 바람소리를 떠올리는가, 횃불 꼬나들고 함성 지르며 몰려오던 사냥꾼의 냄새를 기억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세포가 되고 감각이 되고 움직이는 생각이 되고 논리가 되고 철학이 되어 이렇게 만났는가? 그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에게 죽음은 무엇이고 우리 둘은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 것인가?

내가 죽어 네가 혼자 버려지는 슬픔도 잠깐은 잊자. 별별 무리들이 온갖 갈등으로 함성을 질러도 내 귀 막아버리면 무성영화(無聲映畫)가 된다. 뚜벅뚜벅 산이 다가와 울타리 되고 슬며시 하늘이 내려와 천장이 되는 이 안온한 오목렌즈 속, 그래 마초야, 너와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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