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역사의 어둠을 뚫은 육종학자 우장춘
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역사의 어둠을 뚫은 육종학자 우장춘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7.11 22:07
  • 업데이트 2020.07.1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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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제1031호(2020.7.12)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우장춘 기념관

부산 온천장에는 오랫동안 원예고등학교가 있어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거주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부산전자학교를 거쳐 자동차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학교 일대의 길을 우장촌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나라에는 일본에서 공부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있다고 들었고 비록 씨없는 수박을 직접 먹어본 일은 없어도 한국인은 모두 한 때 <씨 없는 수박>이 있었고 그것을 동포 우장춘박사가 개발했다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

전문으로 채소나 꽃을 재배해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면 좀 귀찮기는 해도 손으로 발라서 먹으면 되지 굳이 씨 없는 수박을 왜 개발했을까, 강낭콩의 빛깔이 희거나 자주 빛이거나 그게 몇 대 몇의 비율로 나오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라고 생각하겠지만 해마다 수천 억 로열티를 지불하고 씨앗을 서서 농사를 짓는 원예농가, 화훼농가, 또 농수산부에서는 죽고살기만큼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 중요한 육종학의 세계적 선구자가 우리 동포인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종두법을 들여와 식민지 조선아이들을 마마(천연두)로부터 지켜낸 지석영과 함께 가난한 조국의 현실적 지킴이와 선구자로서 민족에 대한 공헌도가 엄청 큰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자랑스런 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가 을미사변 민비시해의 하수인인 우범선이란 사실을 알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설마, 설마, 그렇기는 않겠지 싶어도 그건 조금도 틀림이 없는 <불편한 진실>일 뿐입니다.

우장춘은 1888년 일본의 동경에서 망명자 우범선과 일본인 아내 사가와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조국이 멸망으로 치닫는 것도 부족해 아비가 조국을 배반한 망명자가 된 것도 모르고 태어난 생명, 그것도 조선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으로서 말입니다. 아비의 소행으로만 치자면 그는 대역죄인의 아들이지만 한 생명의 탄생 과정만 보면 조선의 노총각과 일본의 처녀가 만나 결혼을 한 극히 정상적인 가정, 건강한 남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제 어디서 암살될지 모른다고 늘 불안에 떨던 일제의 끄나풀 우범선은 아들 장춘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고종이 보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고 맙니다.

만약 후일의 우범선이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 죽었다면 그의 죽음은 한 도피자의 죽음으로 끝났겠지만 자신이 제대로 키우지도 못한 아들이 나중에 세계적 육종학자가 됨으로서 다시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또 한 번 조국을 배신한 자, 용서받지 못할 자로서 각인되게 됩니다. 말하자면 성공한 육종학자, 훌륭한 아들이 됨으로서 또 한 번 아비를 욕되게 하는 아이러니가 탄생한 것이지요.

사람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과 명암에 대해 천착하는 제 입장에서 이 우범선, 우장춘 부자만큼 사람에게 이름이 무엇이며 그게 대(代)를 이어 어떤 의미가 되며 역할을 하는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표본이 없습니다.

먼저 우범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망명객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현지 여인을 취했고 남들처럼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거기다 제대로 기르지도 못했으니 애비로서의 역할이나 의미가 거의 없이 단지 생물학적 애비일 뿐입니다.

1940년대 우장춘 박사.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그런데 아들 우장춘의 입장으로 보면 그는 일찍부터 아비가 죽은 <조센진>으로 주변에 괄시를 당했고 그로서는 어쩔 수도 없는 먼 옛날 아비의 행적 때문에 역적, 배신자의 자식으로 멸시당하며 배척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선 먹고살기가 힘들었을 텐데 그건 어미아비가 결혼을 할 때 주례를 서준 아라이란 왜승이 부부의 앞날을 걱정해 만약 우범선이 암살되더라도 자식 한 명을 제대로 성장시켜주겠다는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일 아비가 암살된 우범선이 제 몸을 건사할 청년, 그러니까 육종학자가 될 때까지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그에게는 홍춘이라는 아우도 있었지만 아라이라는 한 착한 왜승(倭僧)이 우장춘을 선택)

거기다 우장춘의 첫 연구성과물 <씨 없는 수박> 역시 제겐 묘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혹시 우장춘이 자신을 낳아준 아비의 오욕에 찌든 이름, 자신은 손가락하나 남을 헤친 일이 없더라도 아비나 조상, 심지어 나라의 잘못으로 죄인이 되고 지탄을 받는 현실에서 그 아비의 그늘과 오욕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그래 다시는 그런 오욕의 생명은 태어나지도 말라.’라는 억하심정으로 그렇게 연구대상을 잡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득수 시인

역사에는 복습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연극이라도 앵콜공연이 없지만 피맺힌 역사, 오욕의 역사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을 쌓은 이름은 대대로 명예가 되고 역적의 오명 역시 치욕이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천하의 역적 우범선이 태어나지 않아 그날 을미사변이 실패하고 조선이 한동안 더 유지가 되었다면 말입니다. 그럼 우범선의 망명도 일녀(日女)와의 결혼도 우장춘의 출생도 없었겠지요. 아무튼 역사는 흐르고 좋든 싫든 이름도 그 역사에 실려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경 속에서 꿋꿋이 살아간 한 양심적 학자, 심지어 이승만 정부가 농림부장관을 제의해도 단숨에 거절하고 일생을 육종학 연구에만 몰두, 그의 아비가 망친 조국의 식량정책에 일조한 참으로 깨끗한 선비, 의식 있는 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굴레,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오늘도 유장하게 흘러갈 따름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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