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순례기(2) - 유대 땅을 밟다
나의 순례기(2) - 유대 땅을 밟다
  • 하영식 하영식
  • 승인 2020.07.30 15:58
  • 업데이트 2020.08.11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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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식 국제분쟁 전문기자 여행기

이미 이륙하기 전 공항에서 모든 조사를 마친 탓인지 텔아비브 공항에서의 입국수속은 간단하게 끝났다. 공항에서 나와 이스라엘 땅을 밟은 느낌은 지금까지도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소중했다. 어릴 때부터 읽어왔던 성서의 무대였던 땅에 직접 발을 내디딘 감회를 어찌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마치 조상들에게서 말로만 들어왔던 고향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 같은 감회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결코 낯설지 않은 푸근한 느낌의 고향처럼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늦은 밤에 도착한 터라 공항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했다. 숙소는 옥상으로 정했고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꿈속에 빠져들었다. 해가 뜨고 더워지기 시작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중동의 아침은 금방 더워졌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 메뉴는 돌처럼 딱딱한 빵 한 덩이와 오렌지 잼이었다. 이빨이 아플 정도로 딱딱한 빵은 물에 적신 후에야 씹을 수 있었다. 텔아비브와는 그렇게 헤어졌고, 그 후로는 인연이 없었던지 머문 기억이 없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남녀 군인들이 군용 배낭을 짊어지고 소총을 착용한 채 여행을 하기 위해 오고가는 모습이 어디서나 보였다. 버스터미널로 오는 길에도 몇 명의 병사들을 보기는 했지만 버스터미널은 수백 명의 완전무장한 군인들의 집합소처럼 보였다. 수많은 완전무장 군인들이 모여 있다 해도 분위기는 전혀 긴장돼있지 않았고 평화스런 공기가 일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음식을 사먹으면서 재잘대고 있었고 다른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특히 여군들에게서는 군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 색깔도 가지가지로, 블론드에서 칠흑 같은 머리까지 다양했다. 뿐만 아니라 땋은 머리, 숏 커트한 머리, 긴 머리 등 여군들의 헤어스타일은 너무나 자유분방했다. 같은 군복을 입었지만 여전히 개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군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리의 분위기는 전혀 무겁지 않고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모두들 다정다감한 미소를 머금고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루살렘 구 도시로 들어가는 야파 게이트의 모습
예루살렘 구 도시로 들어가는 야파 게이트의 모습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두 도시를 꼽으라면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이니 버스는 계속 연이어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광야를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햇빛에 반사된 광야는 하얀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래가 존재하는 사막이 아니라 내버려진 쓸모없는 광야였다.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금방 버스는 예루살렘 인근까지 근접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했는지 버스는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고지대에 지어진 도시여서 텔아비브에 비해 공기는 한층 시원해졌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구도시로 향하는 대로인 '야파'거리를 걸으면서 나의 마음은 계속 잔잔한 감동으로 넘쳐흘렀다. 검은 양복에 둥근 테의 검은 모자를 쓴 전통적인 유대교도들과 양편으로 댕기머리를 하고 '키파'를 쓴 유대 소년들, 단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긴 치마를 입은 유대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유대 땅을 밟고 섰다는 사실이 현실임을 실감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중심가인 킹 다비드 거리의 이스라엘 젊은이들
예루살렘 중심가인 킹 다비드 거리의 이스라엘 젊은이들

나는 아예 예루살렘의 구 도시에서 장기간 머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운 좋게도 구 예루살렘의 뉴게이트와 그리 멀지않은 기독교 구역의 한 아랍인 집에 방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야파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필리핀 여인을 통해 쉽게 스튜디오를 구할 수 있었다. 아랍인 가족이 주인인 그 집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의 외국인이 세 들어 살게 되었다. 필리핀 여인들은 이스라엘에서 거동한 불편한 노인들을 보살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말이 기독교구역이지 집주인은 철저한 무슬림 교도였다. 또한 기독교 구역의 거주민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슬림 교도들이었다. 50대 중반의 집주인 여인은 집에 있을 때도 언제나 스카프를 둘러쓰고 있었다. 마당에서 나와 마주칠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었다.

유대인 구역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저주를 퍼부었다.

탱크로 우리 무슬림들을 억압하는 유대인들을 보라! 이들은 우리 땅을 무력으로 정복한 야만인들이다.”

난 처음에는 집주인이 왜 그렇게 한이 맺혀 유대인들을 저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를 알게 됐다. 순전히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하루는 무슬림여주인과 열여덟 살 된 아들이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온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이들은 나를 불러서 자신들의 집안내력을 잠시 들려주었다. 주인집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유는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요르단의 영토로서 요르단정부가 관할하고 있었다.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에서 패배한 요르단은 이때부터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예루살렘 전체는 이스라엘의 관할로 바뀌었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아랍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통치를 거부한 아랍인들은 요르단으로 넘어갔다. 집주인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

1967년의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당시 군 지휘관들인 모세 다이안(중앙)과 이삭 라빈(우측). 이삭 라빈은 이스라엘의 총리 재임 중 1995년에 암살 당했다.
1967년의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당시 군 지휘관들인 모세 다이안(중앙)과 이삭 라빈(우측). 이삭 라빈은 이스라엘의 총리 재임 중 1995년에 암살당했다.

이스라엘로서는 25백 년 만에 수도인 예루살렘을 되찾은 환희의 순간이었지만 요르단 측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을 뺏기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잃어버린 셈이다. 일 년 내내 전 세계에서 기독교와 카톨릭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자손손 전 세계에서 찾아드는 곳이다. 수천 년 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던 유대민족에게 이스라엘은 모국이기도 하며,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고향인 성지이기도 하다. 또한 아랍민족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세 번 째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하영식 작가

☞필자 하영식은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92년 한국을 떠났다. 미국·영국·멕시코·이스라엘·폴란드·그리스 등 50여개 국을 누비며 멕시코 빈민 지역 선교사, 이스라엘 키부츠 자원봉사대장, 아테네칼리지 동양문화강사 등으로 활동했다. 2003년 아시아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쿠르드 게릴라 기지인 칸딜 산을 방문해 쿠르드 게릴라들의 삶과 활동을 취재했으며, 그 뒤로도 계속 중동과 세계에서 벌어지는 국제 분쟁 문제와 관련된 기사를 써왔다.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시리아의 코바니에서 벌어졌던 쿠르드민족과 IS와의 전쟁을 현지 취재해 한국 언론에 소개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굿바이 바그다드』(2004),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2005), 『남미 인권 기행』(2009),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2010), 『IS, 분쟁전문 기자 하영식 IS를 말하다』(2016), 『난민 희망을 향한 끝없는 행진』(2017), 『난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행』(201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