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란 말은 고대부터 사용된 말로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서안지구, 가자지구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이란 주로 이스라엘 사람(유대인)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2천년이 흐른 뒤 그 의미는 바뀌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유대인이 아닌 아랍인들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유대민족의 역사를 잠시 얘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서에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광야로 탈출 해나온 히브리 민족의 삶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히브리 민족은 이집트와의 전쟁을 피해 자유와 안전을 찾아 광야로 나온 난민들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이나 되는 민족 전체가 예정된 안식처도 없이 광야로 나온 것입니다. 뒤에는 이집트 군이 기다리고 있어 돌아갈 수도 없고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힘겨운 난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지도자였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다고 했지만 여정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부족해 이스라엘 민족이 불만을 터뜨릴 때마다 요구하는 것들을 공급하면서 달래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토착민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수확한 포도 한 송이를 건장한 두 남자가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서 두려움에 질려 돌아온 스파이들이 이 사실을 과장해서 보고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으로의 행진을 포기하게 됩니다. 모세가 죽은 뒤, 40년 전 당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용감하게 주장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가나안 땅 입구에 위치한 최초의 성인 여리고 성이 무너졌고 성들과 마을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면서 마침내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정복됩니다. 토착민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성서에서 유명한 장사 ‘삼손’과 그의 아내 ‘데릴라’ 이야기는 현재 ‘하마스’가 지배하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는 가자지구가 지리적인 배경입니다. 삼손은 히브리 민족의 자손이고 데릴라는 가자지역 토착민의 딸이었습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데릴라는 ‘필리스틴’(filistine)이라는 지역의 출신입니다.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도 바로 이스라엘 민족과 필리스틴 민족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다윗과 필리스틴을 대표하던 골리앗의 한판 승부였는데 다윗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어쨌든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자신들이 수천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아온 필리스틴 지역의 토착민들이라 주장합니다만 유대인 측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은 ‘아랍인’들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분쟁 중에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에서 지게 되면 민족의 생존이 위태로워지고 민족의 역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성서에도 나와 있는 유명한 유대인입니다. 물론 유대인에 의해 정죄를 당한 뒤 로마총독이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로마병사의 손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으로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됐던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의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현재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지구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베들레헴은 유대인들이 살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예수가 태어난 곳은 팔레스타인 땅이기 때문에 예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수반인 ‘압바스’가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예수를 팔레스타인 사람이라 주장하면서 전 세계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세계 현대사의 비극으로 꼽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의 기원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동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국가는 오토만제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400년 동안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본다면 1517년에서 1917년까지 정확하게 400년간을 오토만제국이 지배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동을 지배하던 오토만제국이 붕괴하면서 지배권은 대영제국(영국)과 프랑스로 넘어가게 됩니다. 영국은 1917년부터 1947년까지 30년간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 하게 됩니다. 영국은 유대민족과 아랍민족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상 어느 민족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유대민족은 유대민족대로 아랍민족은 아랍민족대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계속 충돌하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혼란의 세월이 지속됩니다. 유대민족은 유럽전역에서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국가건설은 민족의 사활을 건 투쟁이 됩니다.
‘홀로코스트’(유대인대학살)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학살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무자비했고 처참했습니다. 히틀러와 독일의 나치당은 아예 민족 전체를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음악가, 미술가, 대학교수, 채소장수, 공장노동자, 남자, 여자, 어린 아이, 노인 등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잡아들여서 수용소로 끌고가서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학살해버렸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을 학살한 수용소들은 그대로 남아서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대표적인 장소로 남아있습니다.
2005년 여름, 예루살렘에서 당시 60대 중반의 미국 출신의 한 유대인 여인과 인터뷰를 한 적 있습니다. 이름은 ‘엘리자베트’였는데 히틀러에 의해 완전히 뒤바뀐 자신의 인생역정을 토로해낸 적 있습니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 때 유대인 부모들은 모두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삼촌이 자신을 데리고 영국으로 탈출했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서도 삼촌은 히틀러가 미국까지 침공해서 유대인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아예 유대인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꿔버렸고 유대인들과는 아예 접촉도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영국이 통치자로 들어오기 전에 중동을 다스리고 있던 오토만제국은 이슬람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아랍인)들은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아예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는 소수의 유대민족과 다수의 아랍인구가 부족단위로 살면서 농업이나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박해 받으면서 살던 유대민족은 조상들이 살았던 성지로 돌아가서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온주의 사상을 갖기 시작합니다. 당시 반유대주의로 인해 차별과 공격을 받아왔던 러시아와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없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떠납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민해온 유대인들은 아랍인들로부터 정착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곳곳에 ‘키부츠’라는 농업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버려놓은 불모지나 늪지들을 헐값에 매입해서 농경지로 개척해나가면서 농경지를 넓혀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온주의운동을 관찰해오던 유대인 출신의 유럽 최대의 거부 ‘로쓰차일드’가 거액을 기부하면서 시온주의운동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1917년에는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이던 ‘발포어(Balfour)’까지 나서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홈(home)’을 건설하는 것을 영국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시온주의운동은 새로운 장을 맞게 됩니다.

☞필자 하영식은

▷국제분쟁 전문기자
▷멕시코 빈민 지역 선교사, 이스라엘 키부츠 자원봉사대장, 아테네칼리지 동양문화강사 등으로 활동
▷2003년 아시아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쿠르드 게릴라 기지인 칸딜 산을 방문해 쿠르드 게릴라들의 삶과 활동을 취재
▷ 201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쿠르드족과 IS와의 전쟁 취재
▷저서로는 『굿바이 바그다드』(2004),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2005), 『남미 인권 기행』(2009),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2010), 『IS, 분쟁전문 기자 하영식 IS를 말하다』(2016), 『난민 희망을 향한 끝없는 행진』(2017), 『난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행』(2017)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