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1) ‘무덤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①
[김해룡 교수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햄릿』(11) ‘무덤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①
  • 김해룡 김해룡
  • 승인 2020.08.18 21:52
  • 업데이트 2020.10.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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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와 제임스 헤일즈 경

목차
#프롤로그 - ‘메멘토 모리’의 뿌리 찾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아나모피즘
#종교개혁의 상황을 빗댄 은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무덤파는 광대’(Grave-digger)의 인류를 향한 애도(哀悼)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제인 그레이의 처형 장면 [Paul Delaroche, 1833. National Gallery, London / Public Domain]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이 늦어진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독자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지난 10회에 필자가 인용했던 스펄전(E.E. Spurgeon)의 의견을 잠시 상기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는 “『햄릿』에는 죽음(death)과 병(sickness)에 대한 심상(이미저리)이 압도적이다.”(Shakespeare's Imagery)라고 적었다. 독자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지적이다. “To be or not to be”를 11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햄릿』 읽기를 마무리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부득불 그 계획을 수정할 까닭이 생겼다. “압도적”인 죽음에 대한 심상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이다. 따라서 그 심상이 차고 넘치는 5막 1장 ‘묘지 장면’을 들여다볼 것이다. 이 장면을 살피지 않고는 이야기를 온전히 마무리지을 수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며 인부(광대) 둘이 벌이는 다툼이 영국사에 “9일의 여왕”(the Nine Days’ Queen)으로 기록된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c. 1537~1554.2.12.)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판사 제임스 헤일즈(Sir James Hales, 1500–1554)의 비극적 개인사에 닿아 있음을 밝히는 일은 필자로서는 노역(勞役)이지만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불행히도 국내 연구자들이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광대들의 무지로 인한 잘못 구사된 어휘들과, 역시 무지로 인해 형성된 패러디에 왕실 역사가 배어 있음을 발견하는 기쁨을 독자들이 누리길 바란다. 묘를 파며 이 ‘무덤파기 인부’(Grave-digger)가 부르는 파편적인 발라드가 오필리어의 장례 절차에 허용되지 않은 애도(哀悼)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도 밝힐 것이다. 텍스트에 일부만 소개된 이 발라드의 노랫말 전체도 소개하고자 한다. 묘지 장면을 읽기 위해 먼저 숙지해야 할 제인 그레이와 제임스 헤일즈의 개인사를 개략하면 아래와 같다.

●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헨리 8세(Henry VIII, 1491.6.28~1547.1.28)의 왕위를 승계한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10.12~1553.7.6, 재위 1547.1.28.~1553.7.6)의 재위 시기와 그의 왕위를 승계한 메리 여왕(Mary I, 1516.2.18.~1558.11.17, 재위 1553.7.19.~1558.11.17) 재위 초기에 제임스 헤일즈(Sir James Hales, 1500–1554)는 왕실에서 고위 민사법 판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영국의 종교개혁에 찬동해 일찍이 영국 국교도(Protestant)로 개종했다.

제인 그레이의 초상화 [public Domain]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는 요절하기 1년 전인 1533년, 자신의 숙모, 즉 부왕(父王) 헨리 8세의 누이 메리 튜더(Mary Tudor, 1498~1533)의 손녀, 즉 자신과 6촌(first cousin once removed) 간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계승자로 선포한다. 제인의 나이 17세 때였다. 선포하기 직전 왕실 고위 관료들이 이 ‘왕위 승계 칙서’에 서명하지만 제임스 헤일즈는 서명하기를 거부한다. 헨리 8세 왕의 유언에 위배되는 왕위 승계였던 것이다. 선왕 헨리 8세는 재위 중 의회의 승인을 얻어 ‘제3차 왕위 승계법’(Third Succession Act)을 확정했다. 이 ‘승계법’에 명시된 왕위 승계는 철저히 헨리 왕의 직계에 한정되었으며 단 한 번의 예외를 인정했다. 그레이 가문이 그 경우이다. 순서는 이러했다.

1. 헨리 8세의 사후, 왕위는 그의 적통인 에드워드 6세에게, 이후 그 자손들에게,
2. 에드워드가 왕위 계승자 없이 사망하면 역시 헨리의 적통인 메리 튜더에게, 이후 그 자손들에게,
3. 메리 튜더가 왕위 계승자 없이 사망하면 역시 헨리의 적통인 엘리자베스에게,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게,
4.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자 없이 사망하면 프랑스 왕가에 출가한 헨리 8세의 누이 메리 튜더(프랑스 루이 12세의 미망인, 1495~1533)의 사위 서폭크 백작 헨리 그레이(Duke of Suffolk Henry Grey, 1517~1585)의 딸, 즉, 그레이(Grey) 가문의 제인 그레이(Jane Grey)와 그녀의 자매 중 한 명에게, 이후 그 자손들에게,
5.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한 헨리 왕의 누나 마가렛(Margaret Tudor, 1489~1541)의 자손, 즉 스튜어트(Stuart) 가문 후손은 영국 왕위 승계 불가.

튜더왕조의 가계도

제인 그레이 혹은 그녀의 자손의 영국 왕위 승계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 계승자 없이 사망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헨리 8세의 뜻을 거역한 이 왕위 승계는 에드워드 6세의 섭정 노섬버란드 백작(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 1504–1553)이 어린 왕을 설득한 결과였다. 이 섭정은 제인 그레이의 시부((媤父)였다. 자신의 며느리를 여왕으로 등극시키려는 욕망에 취해 이 섭정은 헨리 왕이 제정한 ‘왕위 승계법’의 효력을 유보시키도록 병약한 어린 왕을 설득한 것이다. 섭정에게 설득당한 에드워드 왕은 “승계법”에 따라 가톨릭 맹신자였던 자신의 배다른 누나 메리(후에 Bloody Mary로 불림)가 자신의 왕위를 승계하면 영국이 다시 가톨릭 국가로 회귀할 것이라 믿었고, 따라서 부왕 헨리 8세로부터 이어 오던 종교개혁이 무위로 끝날 것을 염려했다. 곧이어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왕은 1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7월 10일 왕실 최고 의결 기관인 ‘추밀원’(Privy Council of England)은 제인 그레이를 왕위 계승자로 선언한다.

이 선언 직후 섭정 노섬버란드 백작이 제일 먼저 감행한 일은 왕위 계승 1순위인 메리를 감금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의도를 알아 챈 메리는 거처를 떠나 도피한다. 도피처에서 그녀가 많은 지원 세력을 얻게 되자 백작의 계획은 수포로 끝난다. 단기간에 사태가 급변해 메리의 추종 세력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고 제인 그레이의 지지 세력은 와해된다. 이 시류에 편승해 추밀원은 제인을 여왕으로 선언한 지 9일 만에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 제인을 폐위시키고 메리를 여왕으로 선포한다. 동시에 제인에게 왕위찬탈자의 낙인이 찍힌다. 관례대로 런던 탑(Tower of London)에서 대관식을 기다리던 제인 그레이는 영문도 모른 채 9일 만에 여왕의 신분에서 반역자의 신분으로 추락한 것이다. 며느리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암약했던 노섬버랜드 백작 죤 다드리는 체포되어 한 달 후인 1533년 8월 22일 반역죄로 참수 당한다. 그의 삶의 마지막 4년 동안 그는 신하가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과 지위를 누렸다. 며느리 여왕을 앞세워 왕의 권력을 누리려던 최후의 욕망으로 인해 그는 장래 영국 왕권을 이어받을 혈통 한 줄기와 자신의 가문이 멸절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John Dudley, Duke of Northumberland 1504-1553, by David Loades, 2011)

● 메리 여왕

설상가상으로 제인의 부친 서포크 백작, 헨리 그레이(Henry Grey, 1st Duke of Suffolk)와 그의 두 아들이 메리 여왕과 스페인의 필립 왕(Philip II of Spain)의 혼인에 반대하는 반란(Wyatt's rebellion)에 가담한다. 당시 이 결혼은 종교적 문제로 대부분의 영국인에게 반감을 샀다. 당대 유럽 가톨릭의 종주국의 지위에 있던 스페인과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된 영국이 화합하기는 난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반란 세력은 자신들의 궐기가 “외국인의 지배로부터 영국을 방어하기 위한”(to prevent us from over-running by strangers) 것이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 반란 주동자들은 사실상 가톨릭을 신봉하는 메리 여왕을 퇴위시키고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치열한 공방 끝에 5000여 명의 반란 세력이 진압되고 헨리 그레이와 그의 두 아들을 위시한 주동자 90여 명이 사지절단과 참수를 당한다. 이 반란에 연루되었거나 반란을 사주한 것으로 의심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여러 차례 호출되어 반역자들과의 공모 여부를 심문당하지만 슬기롭게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가까스로 처형을 면한다. 이 반역 사건으로 인해 메리 여왕에게 엘리자베스와 제인 그레이는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부각되었고 엘리자베스도 오랜 동안 감금당한다.

제인 그레이의 친필 서명
제인 그레이의 친필 서명

“9일의 여왕”(the Nine Days' Queen)의 신분을 끝으로 이듬해 1554년 2월 12일, 제인 그레이와 그녀의 남편 다드리(Lord Guildford Dudley, c. 1535~1554.2.12.)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제인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왕위와 이 반란 사건이 그녀의 운명을 봉인한 것이다. 제인 그레이의 죄목, 즉, ‘왕위를 반역적으로 참칭한 죄’는 9일간의 여왕의 신분으로 그녀가 몇몇 왕실 문건에 “Jane the Quene”이라고 서명한 것으로 인해 입증되었다. 제인에게 반역죄(high treason)를 선고한 왕실 법원이 그녀를 처형할 방식을 두 가지로 결정했고 선택은 메리 여왕에게 위임되었다. 한 가지는 전통적으로 여성 반역자에게 가해지던 ‘Tower Hill에서의 산 채로 화형’이었고 다른 방식은 단두대였다. 메리 여왕은 친척인 제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고통이 한 순간에 끝나는 단두대로 결정했다. 왕실은 제인의 처형 직전 그 앞 순서로 광장에서 처형당해 목이 잘리고 사지가 절단된 제인의 남편의 시신을 제인에게 보여 주는 야만을 감행했다. 처형당하기 전 반역죄의 결과가 어떠한 지를 목격하라는 메리 여왕의 잔인성에 의해 행해진 만행이었다. 필자는 『햄릿』에 제인 그레이의 참혹한 최후가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믿기에 그녀의 최후의 순간이 기록된 야만의 역사 한 페이지를 인용한다.

...단두대가 마련된 형장에 끌려 나온 제인 그레이는 시편 51편(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전편을 영어로 낭송했고, 그녀의 장갑과 손수건을 하녀에게 주었다. 사형집행인이 그녀에게 용서를 빌자 그녀는 그에게 용서를 베풀며, “단 순간에 형을 집행해 줄 것”을 간청했다.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제인이 “내가 엎드리기 전에 이걸 잘라 내느냐?”고 묻자 집행인이 “아니오, 마님.”이라고 답했다. 곧이어 그녀 스스로 눈가리개로 눈을 가렸다. 눈이 가려져 양 손으로 단두대를 찾지 못하게 되자 그녀가 울부짖었다. “어떡해요? 그게 어디 있어요?”(What shall I do? Where is it?)라고. 아마도 형장을 감독하던 런던탑의 부성주(副城主, Deputy Lieutenant) 토마스 브릿지(Sir Thomas Brydges)가 제인을 도와 단두대로 그녀를 이끌었을 것이다. 머리를 단두대에 맡긴 채 그녀는 누가복음(Luke)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최후의 말씀을 읊조렸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기나이다.” (Wikipedia)

여왕이 되리라는 의지를 추호도 드러낸 일이 없었기에 제인 그레이는 무죄였다. 그녀는 시부를 위시한 주변 인물들이 병약한 에드워드 6세를 설득해 추진되었던 왕위 승계 음모의 희생자일 뿐이었다. 시부로부터 여왕의 신분이 될 수 있음을 처음 듣는 순간 그녀가 혼절해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일화가 역사에 기록되었다. 추밀원이 그녀를 여왕으로 선포했을 때도 그녀는 마지못해 직을 수락한다고 동의했다.

제임스 헤일즈가 무죄한 제인 그레이를 반역죄로 단죄하는 재판에 참여했고 왕실의 압도적인 여론에 밀려 본의 아니게 그녀의 처형에 찬동했거나 묵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제임스 헤일즈가 착란 상태에서 강물에 투신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자신의 행위로 인한 죄책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제임스 헤일즈 경

에드워드 6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메리가 여왕으로 군림하자 영국의 국교는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한다. 재위 기간 중, 여왕은 개종하지 않은 개신교 목사 300여 명을 처형하며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얻는다. 예배 형식의 차이로 목숨이 위험에 처해지는 무지와 광기의 시대에 제임스 헤일즈(Sir James Hales, 1500–1554)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유지한 채 여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제인 그레이의 왕위 승계를 반대한 것이 메리 여왕에게 충성을 표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판사의 신분도 유지하고 있었다.

제임스 6세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의 개신교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헤일즈는 1551년 주교 스테판 가디너(Stephen Gardiner)의 직분을 몰수한 바 있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이 왕위에 오른 1553년 7월 이후 사정이 급변한다. 그해 10월 가디너 주교는 복직되어 대법관(Lord Chancellor)의 직에 올라 헤일즈를 투옥시킨다. ‘가톨릭에 대한 공감 결여’가 죄목이었다. 수개월간의 투옥 생활 중 왕실은 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종용했고, 압박에 굴복해 그는 개종한다. 이후 그는 칼로 한 차례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1554년 4월 메리 여왕이 그에게 사면령을 내려 그를 석방시키지만, 석방 직후부터 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그해 8월 4일 그는 깊지 않은 강물에 투신해 얼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검시관이 그의 죽음을 ‘스스로 자기에게 가한’( self-inflicted) 중범(felony)으로 단정했다.  

4년 후인 1558년, 헤일즈의 미망인이 임차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다. 1551년에 남편 헤일즈의 명의로 사용 허가를 받아 사용해 왔던 그라벤니(Graveney) 늪지대의 임차지(lease)가 국가로 귀속되자 미망인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자살자의 임차지는 국가에 귀속된다는 법률로 인해 시행된 조치였다. 이 토지를 되찾기 위해 미망인이 변호사 월쉬(Serjeant Walsh)를  채용했다. 월쉬의 변론은 헤일즈의 ‘죽음’이 헤일즈의 생전에 발생한 것인지, 사망 이후에 발생한 것인지에 집중되었다. 이 다툼으로 인해 전개된 법적, 극세분화(subtilties)된 논리적 유희로 인해 당대의 ‘검시법’(檢屍法, Crowner's Quest Law)은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땅을 되찾기 위해 변호사 월시가 펼친 궤변이 이러하다.

무릇 행위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 처음이 ‘상상’(imagination)이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용한 것인지를 돌아보고(reflection), 덧붙여 어떤 방식으로 결행할 것인지를 심사숙고(meditation)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결심’(resolution)이며 이 단계에서 자신을 파괴하기로 마음속으로 결정하며 동시에 구체적 방법까지도 정한다. 세 번째는 ‘완료’(perfection)인데, 마음이 정한 바를 실행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완료는 두 부분, 즉 시작과 끝(the beginning and the end)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은 죽음을 야기한 행위를 행함이고, ‘끝’은 죽음인데, 이 죽음은 행함의 결과(sequel)에 불과하다. 

이 논리가 개진된 이후에는 제임스 헤일이 ‘행위자’(agent)인지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은 자’(patient)인지, 즉, 달리 말해, 그가 강물로 걸어갔는지, 혹은 강물이 그에게 다가왔는지를 밝히려는 언어유희가 이어졌다. 헤일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것과 죽음의 책임을 밝히려는 논리는 아래와 같이 전개되었다.

“제임스 헤일 경이 죽었다, 그가 어떻게 그의 죽음에 이르렀나?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사로 인해’라고. 그러면, 누가 그를 익사시켰나? 제임스 헤일 경이다. 그러면 언제 그가 자신을 익사시켰나? 살아 있을 동안. 그렇다면 제임스 헤일 경의 살아 있었음이 제임스 헤일 경의 죽음을 야기했고 (So that Sir James Hales being alive caused Sir James Hales to die), 산 자의 행위가 죽은 자의 죽음이었다 (and the act of the living man was the death of the dead man.) 그렇다면 이 가해행위로 말하자면, 죽은 자가 아니라(not the dead man) 해악을 자행한 ‘살아 있는 자’(living man)를 처벌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결인 것이다. 그러나 처벌은 죽음 이후에 가해지니 그가 살아있는 동안 처벌을 받았다고 어떻게 말 할 수 있는가? 결국 산 자의 행위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죽은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따라서 죽은 자는 무죄인 것이다. &c., &c.”

김해룡 교수

이 재판은 지연되다가 4년 후 1562년에 원고 측 변호사의 기상천외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원고 측의 패소로 끝난다. 이후 1571년 에드먼드 플로든(Edmund Plowden)이 이 재판 기록을 정리한 책(Les comentaries ou les reportes de Edmunde Plowden)을 발간한다. 이 재판은 셰익스피어(1564.4.23.~1616.4.23.)가 출생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고 프랑스어로 쓰인 플로든의 기록은 18세기 말까지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는 이 재판 이야기를 풍문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고, 『햄릿』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무덤 파는 인부들에게 이 이야기를 배당했다. 셰익스피어의 의도는 인부들이 암호 같은 어법으로 만들어내는 희화적 풍자와 오필리어의 슬픈 장례식을 병치하는 것이었을까? 당대의 ‘검시법’이 두 인부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풍자되는지가 궁금한 독자들은 5막 1장의 전반부를 잠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계속-

<전 한일장신대 교수 / 영문학 박사(셰익스피어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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