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배롱나무 화유백일홍 花有百日紅
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배롱나무 화유백일홍 花有百日紅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8.23 19:18
  • 업데이트 2020.08.2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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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통산 제2073호(2020.8.24)
(사진1. 가장 흔한 기본형 백일홍)
가장 흔한 기본형 백일홍

인간사회에서는 보통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여 아무리 고운 꽃이라도 열흘 이상을 붉지 못 하다고, 절세미인의 아름다움이나 영웅호걸의 권세도 영원할 수 없음을 예기하고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모란을 키워보면 3월말 경에 맺은 꽃봉오리가 한 40, 50일 지나 꽃이 피는데 날씨가 좋으면 한 일주일 성장(盛粧)한 일본전통의 무희 가부끼 배우의 하얗게 도포(塗布)하다 못해 표백해버린 그 신비하도록 새하얀 꽃잎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해 내내 화단을 돌본 원예가가 그렇게 긴 시간 꽃을 구경할 수가 있는 경우는 3, 4년에 한 번 정도일 뿐 봄 날씨가 좋지 못하면 오전에 꽃잎이 벌어지다 바로 찢어지면서 활짝 핀 모습 한 번 보지 못하고 단 한나절이나 모란의 계절이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전라도 강진의 다감한 시인 영랑은 그렇게 1년 내내 애통한 마음으로 또 한 해의 모란꽃을 기다리며 그걸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불렀겠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꽃은 아름답지만 피어나면 시들고 만다는 공식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일 년에 3, 4회를 이어서 피며 한 번에 한 달 이상 무려 120일 이상을 오래오래 피어나는 꽃이 있으니 바로 백일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배롱나무입니다. 

그 배롱나무는 원래 옛 선조들의 선영(무덤가)를 가꿀 때 주로 울타리격인 사철 푸르고 강직한 기상의 소나무로 도래 솔을 두르듯 무덤의 정면 양가에 붉디붉은 단심(丹心, 그러니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나 남편에 대한 절개)의 꽃을 심는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푸른 소나무가 올곧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 가문에 대한 기상을 나타내면 붉고 아름다운 데다 1년에 서너 번 근 100일 넘게 피는 배롱나무 꽃은 어머니나 먼저 죽은 아내에 대한 포근한 품이나 따뜻한 사랑과 그리움을 반추(反芻)하는 것이겠지요.

그 배롱나무의 장점은 꽃이 선홍색이고 오래 핀다는 점 말고도 그 나무등걸이 참으로 희고 깨끗하고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으로 굳이 꽃이 아니라 등걸만 보아도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로서 자작나무와 더불어 가장 등걸이 아름다운 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배롱나무는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아주 부잣집의 거창한 선산이 아니고는 구경하기 어려운 나무로 언양읍 일원에는 작천정 입구 벚꽃터널이 끝나는 부분의 산소에 한 곳, 상북면 향산리 능산마을고개 열녀각 뒤에 한 쌍이 있어 어쩌다 그 붉은 꽃을 구경하면 가슴에 선연한 슬픔의 기억이 남을 정도였습니다. 

보랏빛의 신비가 감도는 배롱나무꽃
신비가 감도는 보랏빛 배롱나무꽃

그래서 당시 언양지방에서는 감히 그 귀한 백일홍(배롱나무)를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판에 우리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겨울에 저더러 자기 무덤을 새마을운동으로 새로 길을 내어 구시골 가는 자동차와 삼남면 방향의 학생들이 통학하는 우리 큰집 밭에다 쓰고 그 가에 붉은 백일홍을 가득 심어 후손인 우리 가족은 물론 길가는 사람들도 그 꽃그늘에 쉬어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거의 30리가 가까운 통도사 입구까지 걸어가 지금 통도환타지아 부근의 어느 산소에서 힘들게 배롱나무새끼 두 그루를 파다 심어 그중에 하나가 활착 이듬해 정말 연연한 슬픔이나 그리움처럼 빨간 꽃이 피어 너무나 좋아했는데 며칠이 못가 누군가 꺾어가고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피고 꺾어가기를 반복한 그 가엾은 배롱나무는 끝내 수세가 번지지 못해 마침내 말라죽어 저는 대신 1년생 화초 코스모스를 많이 심었는데 가녀린 가지에 매달린 목이 긴 분홍빛 꽃, 햇빛에 반사되는 꽃송이와 날개에 무지개가 걸리는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르며 가을 한 철 너무나 서러운 사부(思父)곡을 연출해 아버지 산소가 있는 진장만디에만 올라가면 눈물이 났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그 귀한 배롱나무가 고속도로가 나면서 도로변과 톨게이트에 여기저기 심어져 여름 한 철 아버지산소에 벌초를 갈 때마다 그 붉디붉은 설움을 불효자의 가슴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렇게 주변에서 점점 흔하게 보게 된 배롱나무는 이제 도시의 공원이나 유원지에도 많이 심어져 아마도 공원과 고속도로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꽃나무를 들라면 역시 붉은 속눈썹을 자랑하는 자귀나무와 4철 내내 꽃을 피우는 동백꽃과 더불어 3총사 정도가 될 것입니다.

흰 백일홍

요새는 그 배롱나무도 개량이 되는지, 외래종이 들어왔는지 몰라도 기본형의 분홍에서 보랏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한층 더 서러운 백일홍 꽃도 나오고 요즘에는 종자개량인지, 돌연변이인지 하얀 배롱나무꽃도 출현했습니다. 그 꽃 이름자체가 백일홍으로 불리는데 그 꽃을 하얗게 개량하면 백일홍이 아닌 백일백(百日白)이라는 중(僧)도 소(俗)도 아닌 꽃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올해도 여전히 봄부터 백일홍이 피고 지고 난 자리에 다시 백일홍이 피는데 앞으로도 두어 번 더 지고 피어 10월 추석이 되도록 명촌별서에는 백일홍이 붉게 피고 제 아내 파우스티나가 그 그늘에 앉아 쉴 것입니다. 아직도 아기처럼 여린 마음의 저는 여전히 우리 아버지를 그리워하고요.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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