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50)유배지에서 세상을 버린 영의정 권돈인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50)유배지에서 세상을 버린 영의정 권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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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28 22:23
  • 업데이트 2020.08.2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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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증조부뻘 '진종' 묘 이전 반대 죄목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삼정문란 극심 시기
조선시대 예송논쟁 탓 수많은 인재 희생돼

영의정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1783~1859)1851(철종 2) 순흥(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되었다가, 1859(철종 10) 연산(현 충남 논산)으로 이배된 후 유배지에서 77세로 세상을 버렸다. 유배생활을 시작한지 햇수로 9년 만이다.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그는 1844(헌종 10) 형 회평군 명()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에 책봉되었으며, 1849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를 삼았다. 1852년부터 친정(親政·임금이 직접 정치를 행함)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다. 김문근은 국구(國舅·임금의 장인)로서 정권을 장악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영의정 김창집의 대손인 김조순(17651832)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안동 김씨의 김달순·문순·희순·유근·교근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철종의 증조뻘인 진종의 묘 이전 문제가 기록된 습재 이직신의 [습재집];
철종의 증조뻘인 진종의 묘 이전 문제가 기록된 습재 이직신의 [습재집].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여하튼 현직에 있던 영의정이 귀양을 가는 경우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유배형은 조선 시대에 오형(五刑) 가운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다. 영의정은 조선시대 최고의 중앙관직으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중요한 직책이다. 그런 현직 영의정이 어떠한 일로 귀양을 가게 됐으며, 귀양지에서 죽을 만큼 큰 죄를 지었던 것일까? 그리고 권돈인 그는 누구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권돈인은 1813(순조 13) 증광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헌종 11) 영의정에 오른 문신이다. 그런 그는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을 추존할 때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파직된 뒤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면 조천례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조천례는 철종의 조카뻘인 헌종(재위 18341849)의 후사(승계자)가 된 상태에서 진종의 묘를 왕통의 순서에 따라 천묘(遷墓·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습재 이직신(일명 이소응·1852~1930)이 이항로의 직계제자인 성재 유중교(1832~1893)의 행장에 실린 내용을 자신의 습재집에 정리해둔 내용이다.

예서체를 잘 썼던 권돈인의 간찰.
예서체를 잘 썼던 권돈인의 간찰. 출처=성균관대박물관.

태조묘를 제외하면 4묘가 종묘에 배치될 수 있는데, 철종에게 친속관계·혈연논리로만 따지면 철종에게 진종은 증조부 뻘이어서 천묘대상은 아니다. 친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할 입장, 그리고 철종이 헌종의 후사라는 왕통계승의 공적인 관계(왕은 친속보다는 의리를 우선해야만 함)로만 파악한다면 진종의 묘는 옮겨져야만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문제되었다.

이에 대신과 유신들이 모두 조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함에도 여전히 권돈인은 조천이 부당하다고 말했다. 결국 묘를 옮기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반대를 했던 권돈인은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당파의 회오리바람에 몰린 것으로 추정된다.

권돈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추사 김정희와 친분이 아주 두터웠다. 그리하여 추사가 제주 유배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3년 후인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권돈인은 추사보다 세 살 위였는데, 서첩을 합벽(合璧)하거나 서로 그림을 주고받는 등 돈독한 우정을 자랑했다. 추사는 권돈인에게 묵란을 그려주었고, 제주로 귀양 가면서 그려준 고양이 그림인 모질(耄耋)이 잘 알려져 있다. 모질은 수도청 경찰국장을 지낸 장택상 소장품이었는데, 6·25때 불타 없어졌다. 사진은 남아있다.

권돈인은 서화에 능하였으며, 특히 예서체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추사의 <세한도>와 비슷한 시기에 <세한도>를 그렸는데, 추사의 그것에 가려져 덜 알려져 있다. 권돈인의 세한도 제목 서체는 추사의 솜씨로 알려져 있어, 두 사람의 합작도로 평가받고 있다.

권돈인의 세한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권돈인의 세한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권돈인의 세한도는 그가 순흥 합도동(현 동촌 조개섬)에 귀양살이 할 때 소수서원 학자수림을 보고 세한도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의 세한도가 먼저 그려졌는지, 권돈인이 먼저 그렸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진종 조천례를 넓은 의미의 예송논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예송논쟁은 허망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지 않았던가. 대표적인 예송논쟁이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의 상례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이다. 현종 때 논쟁이 된 주제는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어머니나 시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는 것이 알맞은가?”였다.

<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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