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혼(魂)이 술에게, 혼(魂)이 시(詩)에게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혼(魂)이 술에게, 혼(魂)이 시(詩)에게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9.08 14:09
  • 업데이트 2020.09.08 14: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세이 제1089호(2020.9.9)

천마산 꼭대기 체육공원에서 단체원 100명과 함께 보물찾기와 윷놀이를 하며 보낸 단합대회 
천마산 꼭대기 체육공원에서 단체원 100명과 함께 보물찾기와 윷놀이를 하며 보낸 단합대회 

그럼 백척간두(百尺竿頭) 위기에 선 저는 어떻게 그 기막힌 난관을 통과했겠습니까?

저는 태어나서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거칠게 자라며 농사일까지 하는 소(少)농군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추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이 넉넉하지 못 해 단 한 번도 금력을 동원할 수 없었고 언양사람 특유의 독불장군 기질 같은 게 있어 소위 말하는 빽, 지연이나 학연도 거의 활용하지 못 했으니 그런 위기를 맞으면 곱다시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격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운동신경이 둔한 저에게 늘상  하던 말 <굼벵이도 구부는 재주가 있다>는 것처럼 가까운 사람과 오붓이 술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하여 나의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내가 꿈꾸는 미래와 행정의 방향에 대해 설명하며 동료나 부하직원, 관변단체원들의 동의와 지원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제가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마을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던 토색(討索)질의 무리 <7형제회>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과감한 개혁을 한 이후 남부민1동 사무소에는 새로운 기운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송도아랫길과 새벽시장, 청과시장에서 일하는 생선장사, 쌀장사, 금방, 식당업주들이 동사무소의 새마을단체나 청년회에 다수 들어오면서 새로 온 동장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친위대가 생긴 것입니다. 거기엔 새벽마다 직접 몸빼를 입고 생선을 파는 <고기 배 따는 여자>도 있었고 가끔씩 육상에 들어오는 원양, 외항선원과 채소장사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고 6.25피난 시절부터 양초나 선풍기를 팔던 소규모 업주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보고 각자 친정조카나 오빠, 제부나 형부, 또 죽은 아들이 생각난다면서 간단히 점심을 사거나 저녁에 소주를 한 잔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조그만 공장의 사장님들은 직원들과 저녁을 먹으라고 봉투에 한 30만 원씩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퇴근길에는 제가 <젊은 날의 초상>이라고 부르는 경북상주 출신의 저를 너무 많이 닮은 외로운 표정의 직원을 비롯해 몇 명의 단체원들이나 직원들과 주로 자갈치의 밤바다를 보며 술을 마시는데 제가 술도 꽤나 셀 뿐더러 분위기에 맞는 이야기도 잘 하고 또 장갑공장이나 연탄가게 같은 보잘 것 없는 직업도 훌륭한 가치가 있다며 그들의 생활을 시로 써주기도 해서 <우리 동장님>과 자갈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잔 마시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이웃에게 큰 긍지와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 괴로운 상황에서의 탈출을 마치 홍길동이 율도국의 탈출에 빗대어 일개 동장이 신천지를 찾아 무리를 이끌고 길을 나서는 일련의 시 <꿈꾸는 율도국>을 써 시집을 내어 홍길동을 꿈꾸는 동장시인>으로 한 동안 제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는데 그 때의 시 한편을 올리면 

방황 / 이득수

 교통사고로 고리뼈를 떼낸 자리에 
 아담의 늑골(肋骨)을 벌충이라도 하듯

 삐삐가 매달려있다, 우주인의 교신기처럼
 저녁 내내 아내가
 이브처럼 울고 있다, 옆구리를 찌르며

 이제 술은 시작이다 이야기도 푸짐하고
 밤이 깊어 
 불빛이 바다에 빠져야 포장마차는 포근해진다.
 한 잔 들고 바라보면
 꿈길처럼 아늑한 이 항구의 밤

 순아, 문득
 울어버리고 싶다.
 정든 이 밤바다나 아내의 아파트나
 내 설운 영혼이 사는 그 추억속의 세계가
 어느 곳이 더 나은지 알 수가 없다.

 순아, 모두가 다 즐거운
 이 꽃밭 같은 세상에서 나는 
 왜 혼자 서성이는지
 어디가 에덴인지
 에덴의 동쪽인지

 순아, 
 울어버리고 싶다.

이런 시를 포장마차에서 직접 들려주니 다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 점점 우리가 앉은 포장마차가 아늑히 갈아 앉으며 자갈치의 인파와 소음이 줄고 부웅- 밤배가 떠나는 고동소리가 울릴 때 저 위 천마산 달동네의 전등불들이 꽃밭처럼 피어나면 

 꿈꾸는 율도국 12 
  칙령(勅令)

 비오는 날엔 음악 들으세요
 부둣가 사람들은 소주 마시고
 바다 쪽 창문에 전등 켜고
 도란도란 이야기 해 봐요.

 여기는 율도국
 슬픈 사연 가진 사람 살 수 없는 곳-

 개인 날에는 창을 여세요.
 들장미 한 그루 없는 집에도
 바다가 보이는 게 멋지잖아요.
 떠나가는 배를 보며 손 흔드세요.

이득수

일개 골목대장인 젊은 동장의 칙령에 그날 술자리에 동참했던 착한 서민들은 동장이 이야기하던 조그만 업무, 주로 마을을 가꾸는 일에 이튿날 바로 힘을 모은 것입니다. 그렇게 술과 시를 빌려 그 갑갑한 하루하루를 지나간 것이었습니다.

<시인·소설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