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술 권하는 동장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술 권하는 동장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9.09 19:29
  • 업데이트 2020.09.0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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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2090호(2020.9.10)

 95년 가을 처녀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출판기념회
1995년 가을 처녀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출판기념회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보니 어느 듯 남부민1동 관할에서는 젊은 동장이 시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는 동장, 거기다 술을 잘 권하는 동장으로 소문이 났다. 주로 나보다 여남은 살 많은 통장이나 새마을 지도자, 근래에 단체원으로 가입한 사람들이 같이 밤바다를 보며 술을 마시고 자리가 파하면 택시를 잡아 택시비 만 원짜리 하나를 기사에게 주는 일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나와 동년배나 젊은 친구들은 나마 술자리를 갖는 자체를 굉장히 뜻 깊고 황송하게 생각했으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은 동네 유지들은 

“아니, 동장이 아무리 젊다 해도 그렇게 날마다 술을 먹어 건강이 어디 감당하겠나?”

껄껄 웃으면서 몸을 좀 도우라며 한 10만 원 쯤 봉투를 주기도 했다. 젊은 패기 하나로 열심히 마을일을 꾸려가고 푸른 산을 가꾸려는 꿈을 가진 동장, 그 희망찬 동장이 민선시대의 정치판에서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자신들이 어떻게든 스크럼을 짜고 보호해야 된다는 그런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고마운 뜻을 기리고 평범한 직업의 깨끗한 봉사자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나는 또 내가 조석으로 만나는 주민들을 위한 시를 쓰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조그만 기계 하나를 놓고 부부가 교대로 장갑을 짜는 가난한 새마을지도자이지만 너무 선량해 나보다 열살이나 많지만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예, 동장님!” 절대 복종을 하는 박기옥이란 새마을지도자를 위해 

장갑공장 박씨
(박기옥 새마을 지도자께)  /  이득수

철거덕 철거덕
장갑공장 박씨는 하루 종일
올 곧은 흰 실로 쓰를 쓰지요.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부산시내 한복판에 가게를 열고
배운 것이 없어도 말은 못해도
날마다 은백색 시를 쓰지요.

가장 신나는 건 내 장갑의 쓰임새
자갈치아지매 언 손등도 녹이고 
용접공 총각 불티도 막아주고
청소부 아저씨들 벗이 되니까

옛날 직녀는 배를 짜다 
한해 한 번 견우를 만났지만 
박씨부부는 날마다 함께 배를 짜지요.
멍텅구리장갑처럼 편안한 아내
눈이 마주치며 싱긋이 웃고
철거덕 철거덕 오늘도 하루해가 짧아요.

라는 시를 썼다.

첫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왼쪽)과 이 시집에 실린 〈장갑공장 박씨〉

또 산불을 감시하러 산에만 오르면 “우리 동장님 물 한잔만 하고 가시라"는 머리가 허연 박순남 할머니를 만나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가난한 피난민의 처녀로 살다 원양항어선 수부(水夫) 하나를 만나 결혼을 하고 몇 년을 산 뒤 바다에 아간 남편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홀로 늙어 병들어 세상과 교류한 흔적이라고는 <자궁탈출증>이란 난감한 병뿐인 그녀가 죽은 영감의 제사를 지내게 명절마다 제수(祭須)보내기운동도 벌렸는데 그 할머니를 위해

박순남 전(傳)

새싹이던 시절도 있었어요.
꽃잎이던 시절엔
된장찌개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며
내 아이 젖 물리며 흐뭇했지요.

이제 다 떠나갔어요.
그리운 사람도 좋은 시간도 하나뿐인 딸도
내게 남은 건 청색 카드
병원에서 돈 안 받는 거택보호자 딱지에
세상사랑 흔적 자궁탈출증.

뿌연 흑백 TV도 견딜 만하고
공짜 전화도 쓸 알아 별로 없고
죽는 게 겁나서는 아니지만
연탄가스 때문에 문을 열고 자면
바람은 차갑기보다 외로워서 무서워요.
 
... 이하 생략 ...

이득수

나는 그렇게 다가갔고 그런 동민들이 그런 나를 받아들여 여차하면 보내버리겠다는 구청장과 측근들의 위협을 1년 넘게 견뎌내며 첫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출판기념회를 열어 전동민이 먹고 마시고 노는 하룻밤이 되기도 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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