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백(魄)이 혼(魂)에게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백(魄)이 혼(魂)에게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9.12 12:46
  • 업데이트 2020.09.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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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093호(2020.9.13)

그나마 한껏 멋을 부린 10년 전의 모습(10. 3.28)
한껏 멋을 부린 10년 전의 모습

혼아, 내 속에 닮긴 나의 혼으로 둘도 없는 나의 친구이자 빛이며 지도자인 혼아, 사실 나는 지금껏 네 그림자로 남아왔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담보하는 하수인이 되기도 하면서 살아왔으니 내가 존재한 이유는 오직 유달리 감성이 강하고 승부욕이 강한 혼이라는 너, 금방 쓰러질 것 같다가도 어느새 또 멀쩡하게 일어서 무언가 또 할 일을 찾아 골똘하게 골몰하는 좀 유별난 네가 재미있기도 했고 감당이 힘들 때도 많았지만 마침내 너와 내가 분리되어 너는 아득한 시간 속으로 소멸 되고 나는 이 넓은 천지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나는 설마 아니겠지, 나 아직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비로소 세상 이치를 좀 깨달아 차분히 글 잘 쓰는 너를, 평생을 같이 하며 비로소 하나의 조용한 성과물 같은 무엇으로 자리 잡은 너를 차마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수술을 받느라 살을 찢고 뼈를 자를 때 이 무딘 외형 때문에 연하고 감성적인 내가 온몸으로 아파하고 한없는 절망에 빠져 슬퍼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아무리 힘든 수술을 하든, 독한 약을 먹든 우리 자랄 때 진장골짝논에 엎드려 다리는 거미리에 뜯기고 등은 쇠파리에 쏘이며 논을 매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 나는 참고 또 참았다. 그런 과정에서 네가 조금씩 컨디션을 회복해 글을 쓰고 나도 조금씩 안정상태를 찾아가며 몇 년이나 보내면서 병든 육신에 담긴 내 넋이 <해양문학상대상>을 타는 기쁨을 맛보며 나도 서울나들이를 하고 이번에 포토 에세이집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를 출판하며 경향각지의 관심을 받아 네 어깨가 으쓱할 때 나는 잠깐 한시도 떠나지 않던 어깨와 옆구리의 통증을 딛고 우리 젊을 때 조기축구회를 다니며 드넓은 운동장을 질주하던 생각을 했다. 혼아. 지치고 늙고 병까지 든 혼아, 그래도 네가 이렇게 내 숨결이 되고 얼굴이 되어 이렇게 살아있어 고맙다.

혼아, 내 오랜 친구 혼아,
내 일부러 그렇게 생기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거칠고 검은 피부에 이목구비가 있는 둥 없는 둥 윤곽이 없이 몇 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나 살았을 코로마뇽인을 닮아 내 자랑스런 혼이 한 평생 기를 못 펴는 외모 콤플렉스에 휩싸인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니가 일상 쓰던 말처럼 저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날마다 피난민의 행렬이 석남재 넘고 운문재 넘어 상북바닥 거쳐 부리시봇디미 너머 언양장터로 밀려오고 밤마다 빨치산들이 피운 봉화불이 신불산에서 가지산 능선을 불꽃처럼 태우던 그 막막하고 불안하던 밤에 다 큰 큰딸 둘째 딸의 얼굴에 숯검댕칠해 콩밭에 숨겨놓고 방에 들어와 어쩌면 인종(人種)이 멸종될지 모른다고 잠든 엄마를 깨워 짐승처럼 거칠고 짧은 정사를 벌일 때 한없이 두렵고 피곤한 두 분이 어찌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얼굴이 희고 잘 생기고 남에게 호감 받을 얼굴이기를 생각이냐 했겠느냐, 짧은 방사 뒤에 끄응, 몸 한번 뒤채고 잠이 든 아버지는 그렇게 생겨날 아이의 얼굴에 대한 색상(色相)이나 디자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자며, 잘 걷는 아이가 태어나 곧 멸종될지 모르는 인간의 종자로써 또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냥 건강하게만 살아남기 원했겠지. 젊은 날의 혼인 네가 그 재미난 말솜씨로 수많은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아 어쩌면 그날 밤 핑크빛 정사가 벌어질 것 같아 백인 나는 이미 페르몬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황홀한 정사를 준비했어도 마지막에 그 많은 아가씨들이 다 떠나버리고 너 혼자 허망한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쉴 때는 나도 어쩌다 그렇게도 검고 못 생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내 외형, 내 백의 실체가 너무 미웠다. 그럴 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야속히 떠나버린 여인을 생각하며 끝없이 술을 마시며 탄식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게 다 내 탓이라 생각하고 네 끝없는 통음을 견뎌내었다.

늙어가면서 오히려 조금씩 태가 나는 필자

그리고 네가 40, 50대가 되어 그 좋은 감수성과 머리, 책을 많이 읽은 사무관이 되어 승승장구할 때 나는 너를 두고 주변의 경쟁자(사실은 패배자)들이 저 시꺼멓게 못 생긴 언양촌놈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일을 하고 아이디어와 성과를 내고 거기다 술까지 잘 마셔 많은 부하들의 신임을 얻으니 우리 반드시 그를 찍어야 된다며 패거리를 모아 시기, 질투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혹시 내가 조금만 밝고 환하고 친절하게 생겨 뒤를 받쳤으면 네가 그런 시기질투를 받기는커녕 윗사람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 금방 한 두 계급 더 올라갈 텐데 아부를 좋아하고 사람을 의심하기 즐기는 그 용렬한 지도자를 둘러싼 시기질투의 무리들이, 그들의 조소와 백안시가 너무너무 싫고 내 몸의 주인공이 너무 너무 불쌍해 네가 마음을 잡고 잠들려 할 때 오히려 내가 잠이 안 와 온몸을 뒤챌 때도 많았다. 그 역시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나로 인하여 네가 불편했으니 내가 사과해야겠지.

그런데 말이야, 나이 예순이 지나 정년퇴직을 하고 희끗희끗 센 머리카락과 윤곽과 돌출이 별로 없이 전체가 갸름하고 동그라진 내 얼굴이 참으로 편안해지고 거기에 담긴 내 영혼인 네 눈빛이 한층 그윽해져 사람들이 모두들 좋아하고 조용한 너의 얼굴, 세상을 달관한 눈빛에서 모두 평안을 느끼고 존경하니 나는 살다, 살다 내 몸 주인이 이렇게 점점 대단한 사람이 되고 나도 덩달아 멋져버리는구나 싶어 너무너무 고맙고 황공하다, 정말 고맙다 혼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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