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통영(統營) 신사 이승암의 단아한 삶과 죽음2
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통영(統營) 신사 이승암의 단아한 삶과 죽음2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0.09.23 18:08
  • 업데이트 2020.09.23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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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104호(2020.9.24)

송도해수욕장에서 구청장과 내빈을 모시고 해난사고 수습훈련을 진행하는 필자. 이럴 때 이승암 국장은 어디선가 조용히 진행을 살펴보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재빨리 도와주었다.
송도해수욕장에서 구청장과 내빈을 모시고 해난사고 수습훈련을 진행하는 필자. 이럴 때 이승암 국장은 어디선가 조용히 진행을 살펴보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재빨리 도와주었다.

그런가 하면 사슴이나 승냥이 같은 동물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공간적 자유를 누리며 핥고 빨고 사랑하거나 치고받고 싸우며 서로 잡아먹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 위에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단순한 하나의 운동체가 아니라 생각하며 고뇌하고 무언가 개선하고 발명하고 즐기며 언어로 소통하고 빛과 소리와 색깔로 시와 회화, 조각과 오페라 같은 예술을 창조하며 도서관과 박물관을 만들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고 천문학으로 우주를, 철학과 심리학으로 인간존재를 탐구하기도 한다. 심지어 생명의 신비를 풀려하고 신의 존재를 뛰어넘거나 부인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 최상의 존재인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고 이 인간의 인식과 사고 그 집착을, 그 형형하게 빛나던 눈동자에 어리던 뜨거운 눈길을 한문에서 살아서는 혼(魂), 죽어서는 백(魄)이라 부르며 신성시한다. 

어디 그 뿐인가? 한자문화권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또는 가장 원초적 슬픔을 슬플 애(哀)자로 표현하는데 이 애(哀)자야 말로 어미가 포대기에 쌓인 죽은 아이를 들여다보며 우는 형상이다. 중국인들은 아직 이빨이 나지 않은 젖먹이의 죽음을 애(哀)로, 성년이 되기 전에 죽는 것을 요(夭)로 표현했는데 말하자면 지상의 모든 슬픔의 기본이 죽음이요, 그 절정이 젖먹이, 즉 일찍 죽는 것으로 본 것이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생명체라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죽음은 고착된 수동적 생명체의 종말이라면 뻐꾸기나  사슴 같은 동물의 죽음은 가고 오고, 치고 달리는 본능과 감각을 가진 움직이는 생명의 정지 내지 소멸이라면 소우주(小宇宙)로 불리는 인간의 죽음은 그 하나하나가 의지와 집념이 끊어지고 꿈이 사라지는 단순한 죽음이상의 특별한 그 무엇이다. 전쟁이나 흉년, 질병으로 죽는 그 아픔이나 슬픔, 억울함도 문제겠지만 인간의 죽음 하나하나에는 상인의 부(富)와 노파의 자손, 예술가의 성취와 정치인의 카리스마와 명예, 작곡가의 선율, 가수의 바이브레이션, 화가의 실루엣, 시인의 시상(詩想)이, 발명가의 설계, 대학교수의 학식, 젊은이들의 사랑, 그 한없이 설레는 울렁거림마저도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 어찌 슬프고 허무한 일이 아닌가? 

[사진=픽사베이]

아무리 영특하고 존귀한 존재라 한 들 이미 죽어버린 다음에야 인간의 죽음이 혼이면 어떻고 백이면 어떻고 영(靈)이면 어떻고 귀신(鬼神)이라 불린다고 또 어떠랴, 어차피 죽어 육신이 소멸되고 영혼의 메아리가 없는 판에...

지금 맞닥뜨린 한 사내의 죽음, 천진한 아이, 순수한 사내, 승리의 용사, 모범공무원에 더없이 좋은 아들, 좋은 남편, 좋은 아비이던 완벽한 상(上)남자마저 어떤 저항도 못 해보고 홀연 이승을 떠나야 하는 마당에...

그렇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생명은 왜 태어나고 죽어야만 할까, 그렇게 소모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모든 생명체는 부모가 되는 전세대의 충동이나 불의의 부산물로 태어난다.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이나 윤회, 업보란 말도 냉정히 말해서 아무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제가 태어나고 싶어, 제 의지, 제 힘으로 태어나며 또 반드시 어떤 자식을 어떻게 낳겠다고 찰흙으로 조각을 빗듯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우주의 조화에 의한 수동적인 탄생으로 그저 우연일 뿐일 수도 있다. 

그리고는 짧든 길든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약간의 결과물을 남기고 죽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굳이 너무 어렵거나 고상한 역사적, 철학적 차원이 아닌 보통사람의 생애를 평할 때 그 중간평가에 해당하는 환갑 전후 은퇴 무렵에는 자녀를 몇이나 낳고 몇을 결혼시켰으며 노후에 먹고 살만한 여력이 있는지를 논하고 영결식장의 최종평가에는 손자를 몇이나 두어 대를 잇고 지적, 창조적 성과나 빌딩 같은 재산, 하다못해 사회적 명망 같은 업적을 따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순국한 이순신장군이나 일제침략에 맞선 유관순열사, 안중근의사 같은 경우 국가 또는 민족을 위하여 너무나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또 단심가(丹心歌)의 정몽주, 사육신(死六臣)의 성삼문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나 왕실의 정통성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오세신동 김시습은 비운의 임금 단종을 못 잊어 일생을 거친 초야를 떠돌며 밤이슬을 맞았고, 목민심서(牧民心書)정약용과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박지원은 몽매한 백성을 깨우치기 위하여, 이차돈과 김대건은 새로운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殉敎)의 길을 택해 목숨을 버렸다.

늘 흉년이 들고 질병이 흉흉하여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밥도 되지 않고 도(道)도 되지 않는 동떨어진 명분을 위하여, 또 수많은 당대인들을 다 두고 유독 그들만은 스스로 그 짐을 지고, 그 길을 가며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마침내 생명도 바칠 수가 있었을까?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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